제 8장, 넷: 양반이라고 다 같은 양반이 아니지...
넷: 양반이라고 다 같은 양반이 아니지...
식민지시대가 지나면서 수직적인 사회관계는 굳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백인과 원주민 사이에 새로운 중간계층이 생겨납니다. 메스띠소(Mestizo)라고 불리는 이 두 계층의 혼혈이 탄생하여 중간 사회 계층을 형성합니다. 혼혈인들은 원주민에 비해서는 그나마 좀 더 백인적인 정체성이 있다 보니, 에스빠냐어를 전혀 못 하거나 잘하지 못하는 대다수 원주민과 비교해 에스빠냐어를 잘했습니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백인과의 접촉이 많은 환경을 가지고 있어서 중간계층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말이 중간계층이지 극소수의 유럽인이나 그 후손들이 모든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사회적인 신분이 그렇게 높아질 수는 없지요. 인종적인 부분을 기본으로 하여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모든 면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던 백인들이 자신들의 피가 조금 섞였다고 하여 동물과 같이 취급하던 원주민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 우월한 지위를 인정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종합해 보면 3개의 신분이 존재합니다.
1.원주민
2.유럽인
그리고 그 둘의 혼혈인 3.메스띠소.
뻬닌술라르(Peninsular) – 에스빠냐에서 태어난 에스빠냐사람 끄리올요(Criollo) -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에스빠냐사람 |
그리고 이제 또 다른 제4의 계층이 탄생합니다. 바로 4.끄리올요(Criollo) 라고 하는 그룹이지요. 이들은 인종적으로는 유럽의 백인입니다. 보통은 원주민의 피가 안 섞였습니다. 그렇지만 출생지가 유럽이 아닙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유럽사람들을 지칭합니다. 즉 아메리카 대륙에서 나서 자란 토착 아메리카 백인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들의 혈통은 비록 유럽인이지만 태어난 곳이 아메리카 대륙이란 점에서 에스빠냐에서 온 사람들이 괄시하는 경향이 생깁니다. 결국 에스빠냐에서 태어나 아메리카에 온 뻬닌술라르(Peninsular)라고 불리는 집단이 최상부의 권력을 독점하고, 아메리카 대륙에 기반을 둔 끄리올요(Criollo)라는 토착 에스빠냐 후손들은 그 아래에 위치합니다. 이건 우리나라의 진골, 성골의 개념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혈통과 더불어 지역적인 정체성이 신분의 차이를 만든다는 점이 재미납니다.
에스빠냐에서 태어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온 에스빠냐 사람들은 이 대륙이 단순히 부임지라서 곧 본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경우도 있었고, 자신들은 본국인 에스빠냐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에스빠냐와의 밀착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끄리올요의 경우 식민지기간이 삼백여 년간 지속되다 보니 이곳에서 나고 자라 2세나 3세, 4세, 5세로 이어지며 기반을 만들게 됩니다. 당연히 에스빠냐와의 정체성의 고리가 점점 약해집니다. 또한 토착적인 그들만의 문화나 이권 등이 생겨납니다. 여기에 뻬닌술라르를 더욱 신임하고 중시하는 에스빠냐 본국의 태도 역시 문제가 됩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중요 행정직에서 끄리올요들은 상대적으로 페닌술라르에 비하여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곳에서 뿌리를 내렸고 현지 사정을 더욱 잘 알 뿐만 아니라 인종적으로도 에스빠냐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끄리올료는 자신들이 받는 서자 취급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지요.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끄리올요는 에스빠냐와 뻬닌술라르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갈망하는 세력으로 부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