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이닉 2023. 9. 1. 15:22

13, : 혁명이 들불처럼

쿠바 혁명의 원인은,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독립 이후 쿠바의 부정부패와 대내외적인 종속, 엘리트 그룹에 집중된 부, 그리고 이에 반하는 일반 민중들의 극한의 빈곤입니다. 한마디로 쿠바라고 하는 나라에는 두 개의 완전히 다른 세상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대다수 민중의 끔찍한 가난과 그에 반하는 엘리트 세력의 지독한 부의 독점과 향락이 함께 공존했던 것이지요. 이것은 혁명 시작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또한 혁명 성공의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혁명은 몽까다Moncada병영습격이라는 사건으로 구체화 되기 시작합니다. 1953726일은 쿠바 독립의 영웅이자 민족주의의 상징인 호세 마르띠José Martí의 탄생 100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이 상징적인 날을 디데이로 삼아 피델 까스뜨로Fidel Castro는 친미 바띠스따 정권을 무너뜨리려 몽까다 병영을 습격합니다. 그러나 별 힘도 못 써보고 이내 잡혀 구금됩니다. 그리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멕시코로 망명을 가게 됩니다. 그렇지만 멕시코에서도 쿠바 혁명의 꿈을 버리지 않습니다. 동지들을 규합하고 군사 훈련을 합니다. 그때 만난 동지 중에 쿠바 혁명의 상징이요 영웅인 체 게바라도 있습니다. 그렇게 멕시코에서 와신상담 혁명을 준비한 까스뜨로의 조촐한 군대는 19561125일 그란마Granma라고 하는 허름한 배로 멕시코 베라끄루스에서 출항해서 쿠바를 향합니다. 이 당시의 배 이름을 딴 신문이 지금 현재 쿠바의 가장 중요한 신문사의 이름이 됩니다: Granma

근데 이 배가 원래는 12인승으로 만들어졌는데 여기게 80여 명의 사람이 탔습니까? 당시 혁명군의 열악한 상황이 짐작됩니. 없는 돈에 간신히 사들인 낡고 작은 배에 형편없는 장비를 싣고, 그렇지만 용기와 의욕으로 넘쳐난 군대는, 결국 처음에 계획했던 곳이 아닌 엉뚱한 곳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나마도 바띠스따 군대에 발각되어 상륙과 더불어 대부분이 사살당하게 됩니다. 죽은 사람과 붙잡힌 사람을 제외하고 나니 처음에 82명으로 시작한 혁명군 중에 12명만 남게 됩니다.

겨우 전열을 정비해서 씨에라 마에스뜨라Sierra Maestra라는 꾸바섬의 동쪽 끝에 있는 산속으로 피해 들어갑니다. 그러나 희망도 없어 보이는 투쟁에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그들은 굴복하지 않았죠. 산속에서 게릴라전을 준비합니다. 이듬해인 1957116일을 기해 정부군의 요새를 기습하는 첫 군사작전을 펼칩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뉴욕타임즈에 혁명군 대장인 피델 까스뜨로의 인터뷰 기사가 실립니다. “우리들이 여기 살아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생각을 하는 자 우리를 따르라.”는 메시지가 울려 퍼진 것이지요. 그렇게 쿠바혁명은 급속도로 퍼지게 됩니다. 우리의 동학도 그렇게 퍼지고 이어져 대동세상이 만들어졌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봅니다. 우금치가 시에라 마드레가 되었더라면. 동학혁명과 비교할 만한 점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여기서 굳이 다 언급하지 않더라도 여러분들이 그러한 관점으로 생각을 연결시켜 이어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200~300명 정도의 소규모였지만 근처 주민들의 도움으로 세력을 키워갑니다. 사탕수수밭에서 온종일 일하는, 인생의 그 어떤 희망도 느껴 볼 수 없었던 무지렁이 농민들의 동참과 희생에 힘입어 혁명은 조금씩 나아갑니다. 미국의 그 많은 지원과 협조에도 바띠스따 정권은 혁명의 열기를 꺾지 못합니.

원래 혁명이란 민중에서 시작되고, 민중 그 자체이며, 민중의 도움 없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특히 장기간에 걸친 게릴라전이 이어진다면 게릴라의 처지에서는 일반 민중의 지지와 지원은 생존의 절대 관건이자 전투 성공의 결정적 요인이 됩니다. 앞에서 말한 혁명이전의 사회, 정치, 경제 분위기는 쿠바 혁명에 대한 민중들의 지지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기존의 부패한 친미 엘리트가 이끄는 바띠스따 정부군은 군사적으로 모든 유리한 조건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민심이 돌아선 상태에서의 싸움은 결과가 뻔했습니다. 세게 던진 공의 반동이 더욱 강력한 것처럼 바띠스따 정권이 부패한 만큼, 그리고 민중이 고통받은 만큼 쿠바 혁명에 대한 민중들의 지원은 더욱 열렬했습니다. 적은 인원으로 보잘것없이 무모하게 시작한 혁명은 활활 타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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