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편두에서 꼬옘까지
4부 편두에서 꼬옘까지
어린아이의 두개골을 변형하는 편두풍습으로 시작된 마야인의 삶은 죽은 사람을 위한 음식인 꼬옘으로 끝이난다.
제 14 장
언어적 특징
아메리카대륙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언어는 에스빠냐어이다. 마야와 잉까를 포함한 고대문화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에서도 역시 공용어로 에스빠냐어가 쓰인다. 그러나 마야지역을 여행하다보면 마야문명의 후손들이 사용하는 그들만의 독특한 말들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는 300여 년간의 식민 지배와 그 이후의 현대화 과정 속에서 에스빠냐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이곳 국가들에서 마야어를 듣는다는 것이 상당히 드문 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원주민어를 그대로 쓰는 것이 작은 시골에 사는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만의 일은 아니다. 멕시코 마야지역과 과테말라, 벨리스의 내륙지방 등지에서는 읍내의 장터에서, 대도시의 공원에서 만나게 되는 상당수의 하층민들이 대부분 일상의 삶 속에서 그들의 모태어(母胎語, Lengua Nativa)인 마야어를 사용한다. 마야어를 쓰는 사람에 대한 정확한 통계치를 구하는 것이 무리가 있고 공식적인 수치에 큰 신뢰를 가지기도 힘들지만 대략적으로 많게는 육백만명에서 적게는 이백만명 정도의 사람들이 아직도 유럽 침략 이전의 마야인들이 사용하였던 마야어에서 조금 변화된 형태의 마야어를 사용하고 있다.1)(각주1_ 대략적인 통계에 따르면 마야 유까떼꼬(Maya Yucateco) 약 50만명, 맘(Mam) 약 60만명, 또홀라발(Tojolabal) 약 6만명이고 라깐돈(Lacand뾫)과 이차(Itz?, 모빤(Mopan)을 합쳐 약 5000명 정도이지만 이중언어자(Biling웕)를 포함하면 이보다 훨씬 많다.) 실제로 주변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대도시나 유명한 관광지를 조금만 벗어나더라도 금방 마야어의 높은 점유율과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문화를 피부로 느끼게 된다.
큰 도시 중에서 산 끄리스또발 데 라스 까사스(San Cristobal de las Casas)라는 도시는 유난히 마야어의 점유율이 높다. 이 곳은 멕시코 치아빠스(Chiapas)주의 구(舊) 주도(州都)였는데 지금은 주도가 뚝스뜰라 구띠에레스(Tuxtla Gutierez)로 옮겨 갔다. 원주민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한평생을 바친 라스 까사스 신부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지은 유래만큼이나 원주민들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곳이다. 어림잡아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의 반은 마야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중에서도 쏘칠(Tzotzil), 쎌딸(Tzeltal), 또홀라발(Tojolabal) 등 다양한 다른 종류의 마야어가 사용된다. 거리의 풍경도 마야 전통복장 일색으로 지역과 부족에 따라 복장이 다양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여러 가지 색깔을 이용한 형형색색의 전통의상들이 눈에 띈다. 복장이나 언어와 같은 외형적인 것만이 이들의 전통에 대한 고수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인 면에서도 전통적인 색채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독특함은 많은 경우 정부나 사회와의 마찰을 불러 일으킨다. 특히 정부의 정책과 상관없이 수백 년 동안 저항을 계속해 오는 주변 마을들의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외지인을 농기구로 살해하는 경우도 있었고, 집단적인 무력행사를 한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경향이 특별히 강하다고 소문난 산 후안 데 차물라(San Juan de Chamula)와 같은 곳에서는 중앙 성당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사진촬영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몽둥이를 들고 성당입구에 지켜선 사람을 볼 수 있을 정도다. 동네전체의 분위기도 타지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엽기적이다. 무조건 팔찌를 걸어주며 네가 한번 찼던 것이기 때문에 안 사면 안 된다고 억지를 쓰는 꼬마아이의 눈빛 살벌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산 끄리스또발 데 라스 까사스는 1994년에 시작된 사빠따 농민군(Ejercito Zapatista de Liberaci뾫 Nacional)이 제일 먼저 점령한 도시 중의 하나이다. 또한 마야지역의 여러 도시 중에서도 현대 속에 공존하는 원주민의 모습이 가장 극명하게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마야어를 사용하는 사람 중에 상당수가 마야지역 국가의 공식언어인 에스빠냐어를 많건 적건 간에 할 줄 안다. 그러나 두 개의 언어를 잘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태어나기는 원주민 사회에서 태어났더라도 이후 중소도시 생활권을 가지게 된 경우, 그러니까 자라면서 도회지로 이주를 한 경우나 원주민 마을에 살면서도 도회지 사람과 많은 관계를 맺게 되는 상점을 운영한다던가 하는 경우에만 자연스럽게 에스빠냐어를 체득하게 된다. 또는 취학전까지 부모님들 밑에서 마야어를 배우고 학교에 들어가서 에스빠냐어를 배우는 일도 많다. 교육에 의한 에스빠냐어 습득은 지금 현재 마야문화권 국가의 정부가 취하는 원주민들을 위한 에스빠냐어 습득과 문맹률을 낮추기 위한 교육정책의 기본 방향이다. 이러한 혜택이 원주민 아동들에게 부분적으로 실현되어가고 있지만 경제적인 절대 빈곤의 상태에 있는 경우가 많아 그나마도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결국 많은 수의 원주민들이 에스빠냐어를 잘하지 못하고 절대적으로 마야어만을 사용하거나 에스빠냐어로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한 오늘날의 현상이 당분간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많은 수의 마야 사람들은 지난 500여 년 동안의 과정과 마찬가지로 장터에서, 그리고 도시의 하급 노동을 통해서 에스빠냐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고 필요에 의해 조금씩 배워나가게 된다. 이러한 문제점은 경제 상황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 에스빠냐어를 할 줄 아는 마야 사람들과 할 줄 모르는 마야 사람들의 경제적인 차이를 더욱 확대시킨다. 물론 두말할 나위 없이 에스빠냐어를 할 줄 아는 집단이 보다 나은 생활을 한다. 그들에게 경제적으로 더욱 많은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마야어를 사용하는 집단의 경제적인 절대 빈곤의 상태는 오늘날에도 계속적인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원주민들은 자신이 에스빠냐어를 잘 모른다는 사실을 알리기 무척 꺼려한다. 그도 당연한 것이 일단 원주민으로 에스빠냐어를 못하는 사람들은 의사소통의 문제로 노동시장에서의 가치가 떨어진다. 그 뿐만 아니라 전통성과 보수성이 강하다는 인상과 함께 낮은 교육 수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외지사람들에게 자신이 에스빠냐어를 잘 할 줄 모른다는 것을 눈치 채이게 되면 어떠한 방식으로든 불이익이 돌아오게 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들에게 에스빠냐어를 할 줄 아냐고 물으면 비록 잘 하지 못해도 잘 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워낙 말이 느리고 말수가 없는데다 부끄러움도 많이 타는 이들의 에스빠냐어 구사정도를 측정하기는 쉽지 않다.
지금 현재 사빠띠스따 반군의 거점도시중의 하나가 된 멕시코 치아빠스주의 체날호(Chenalh?에서 행한 현지 조사에 의하면 일반적인 인디오들의 경제적인 문제점과 에스빠냐어 구사 능력과의 현실적인 상관관계를 볼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그들의 언어에 대한 애정과 자존심을 느낄 수 있다. 굶주림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나름대로 그들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일면을 보게 된다. 이 연구에서 행한 설문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 이들의 언어인 쏘칠어를 보다 활성화 시켜야 한다. - 쏘칠어로 된 책을 만들어야 한다(67%), 쏘칠어를 에스빠냐어의 알파벳으로 표기하여야 한다(70%)
● 언어와 학교문제 - 쏘칠어는 중요하다(54%) 에스빠냐어만 쓰는 학교가 좋다(54%), 이중언어 학교가 좋다(23%), 학교에서 에스빠냐어를 배우는 것이 가장 좋다(60%)
●앞으로 50년 후에도 쏘칠어가 계속해서 생활에 쓰일까?(68%가 그렇다고 대답)
위의 내용들은 우리들에게 이들의 언어적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에스빠냐어를 앎으로서 경제, 사회적으로 더욱 많은 가능성이 주어지는 현실 속에서도 그들의 고유언어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보여준다. 그러나 극단적인 의견의 대립 또한 볼 수 있다. 같은 마을사람 중에서도 상당수의 실용적인 사람들은 쏘칠어의 사용을 완전히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따라서 모든 학교는 에스빠냐어를 사용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국 이것은 원주민 집단 내에서 보수와 진보의 대립 양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전체적인 사회의 흐름이 아직까지는 쏘칠어의 사용과 보존을 중시하는 보수적 경향을 유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Mc Greevy, Carol Jean, 989∼1017쪽).
현재의 마야 원주민들은 약 28개 정도의 유사성을 가진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유럽인들이 침략해왔을 당시만 해도 이보다 더욱 많은 언어가 있었으나 그 이후 자연스럽게 없어지고 지금은 아래의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은 언어들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언어는 이전에는 하나의 언어였다는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고 이것을 우리는 “쁘로또 마야(Proto Maya)”라고 부른다. 이 언어는 대략 기원전 2600년 전부터 형성되어 지금 현재의 마야지역 주변에서 광범위하게 쓰였다. 그러나 그 이후 제일 먼저 지금의 멕시코만 북부지역에서 쓰이고 있는 우아스떼꼬(Huasteco)어가 분리되는 것을 시작으로 차츰 차츰 다른 언어들로 분리되어 나가다 지금까지 독립적으로 발전함으로써 서로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류가 같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각각의 언어에서 유사한 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다음쪽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발음이 비슷하거나 아주 같은 단어들이 이들의 언어 속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마치 서양 각국의 언어들이 라틴어에서 분리되어 나가 그 원류를 같이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서로 분리된 언어로서 독립적인 특징을 유지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언어의 유사성과 원류의 동일성을 고려하여 마야의 다양한 언어를 마끄로 마야(Macro Maya)라고 하는 하나의 언어군으로 분류하고 있다(이 책에서는 이를 통칭하여 마야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마끄로 메시까(Macro Mexica)라고 불리는 멕시코 고원지방의 다른 언어군과 함께 메소아메리카의 언어적 커다란 두 맥을 형성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은 마끄로 마야와 마끄로 메시까가 완전히 틀리지 않다는 점이다. 역시 지역적으로 인접해 있었다는 점은 이들 마끄로 마야와 마끄로 메시까가 근본적인 유사성을 공유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이미 이 두 언어는 다른 문화군으로 분류할 정도의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말과 중국어, 일본어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부 발음이나 문법체계 면에서 이 언어들은 나름대로의 유사한 점을 가지고 있지만 현재는 완전히 다른 언어들로 독립하여 발전하였다는 점에 있어서 마야와 메시까 언어군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측면에서 다양한 언어군과 그 안에 속해있는 언어들의 어원과 발전, 그리고 공통적인 특징들을 밝히는 것도 앞으로 이 분야의 학자들이 해야 할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그럼 이렇게 그 뿌리를 공유하는 마야어들의 특징들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아〕,〔에〕,〔이〕,〔오〕,〔우〕의 5가지 모음 외에도 따바스꼬 촌딸(Chontal de Tabasco)어와 촐(Chol)어 에서는 〔이〕와〔우〕의 중간 발음인 〔〕와, 〔에〕와〔오〕의 중간 발음인 〔@〕등이 있다.2)
(각주2_ 마야어를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이러한 발음들이 일반적으로〔〕와〔@〕로 표기되고 있다.)
● 글로딸리사씨온(Glotalizaci뾫): 나오는 발음을 목에서 강제로 끊어 내는 소리. p’, t’, k’, ts’, ch’ 등의 발음이 글로딸리사씨온이 된다. 마야어의 이웃어인 또또나까(Totonaca)어와 떼뻬후아(Tepejua)어에도 이러한 글로딸리사씨온이 있다.
● 기수와 서수에는 접두사가 존재하며, 세고자하는 대상에 따라 다른 접미사가 붙어 다닌다. 즉 우리나라 말에서와 같이 사람을 셀 때 한 개, 두 개라 하지 않고 한 명, 두 명이라고 하고, 꽃을 셀 때는 한 송이, 두 송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다만 마야어의 경우는 말의 뒤에 붙는 접미사가 아니라 앞에 붙는 접두사로 쓰인다는 것이 다르다.
예) kotz : 동물을 셀 때, k’e: 식물을 셀 때, tej: 나무를 셀 때 등
● 여러 종류의 주격대명사가 접두사(타동사)나 접미사(자동사)의 형태로 동사에 붙어서 사용된다. 마야 유까떼꼬어를 가지고 예를 들어보자. “나는 가져온다” 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가져온다” 라는 동사인 tares에 주격 대명사 일인칭 단수인 in 이 동사의 접두사로 붙어서 intares 가 된다. 인칭대명사는 in(1인칭 단수: 나는), a(2인칭 단수: 너는), u(3인칭 단수: 그는), ka(1인칭 복수: 우리들은), i(2인칭 복수: 너희들은), u-ob(3인칭 복수: 그들은, u 는 접두사, ob은 복수를 구성하는 접미사)이다. 따라서 차례대로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나는 가져온다: intares 우리들은 가져온다: katares
너는 가져온다: atares 너희들은 가져온다: itares
그는 가져온다: utares 그들은 가져온다: utaresob
● “...이다”에 해당하는 에스빠냐어의 ser(영어의 be동사에 해당)동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큰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다”에 해당하는 것 역시 명사에 주격 대명사인 접미사가 붙어서 그 뜻을 만든다. 마야 유까떼꼬어에서 예를 찾아보면 “나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려 한다면 먼저 명사인 사람이 “winik”이고 다음과 같은 “...이다”에 해당하는 각 인칭별 주격대명사들을 붙여 문장을 완성한다.
1인칭 단수: e’n → 나는 사람이다: winike’n
2인칭 단수: e’t → 너는 사람이다: winike’t
3인칭 단수: Ø(아무것도 들어가지 않는다) → 그는 사람이다: winikØ
마야어와 관련하여 중요한 연구 과제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마야문자 해독과 관련된 사항이다. 「제22장 마야문자」 부분에서 좀 더 자세하게 보겠지만 이제까지의 마야문자 해독은 언어로서의 마야어에 대한 피상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이루어졌다. 마야문자가 상형문자가 아니라 음운문자라는 것이 밝혀진 이상 마야어에 관한 문법적인 지식이 마야문자 해독에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그때 사전과 기존의 제한된 사료에 의존한 마야문자 해독은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마야의 다른 주제에 비하여 각광받지 못하는 학문인 이 마야 언어학의 발전은 마야문자 해독과 관련하여서 뿐만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볼 때 앞으로 풀어야할 중요한 과제이자 흥미 있는 분야가 아닐 수 없다.
제 15 장
의식주 생활
현대 마야인들은 유럽 사람들에 의하여 정복된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500여 년이란 긴 세월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생활의 기술적인 면에서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게다가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원주민 마을일수록 현대적인 기계문명의 영향이 적다. 따라서 오늘날 마야의 원주민 마을에서 옛날 생활모습 그대로를 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도구면에서 전통적인 마을의 가장 큰 변화라고 한다면 기껏해야 옥수수 가는 기계나 농업용구로 사용되는 우리나라 낫과 같은 역할을 하는 마체떼(Machete, 한국의 낫은 반원형으로 휘어있는 반면 마체떼는 칼과 같은 직선형이다) 정도이다. 물론 지금 현재도 많은 수의 원주민들이 고대 마야인들이 사용하던 갈판과 갈돌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점차 손으로 돌려 옥수수를 가는 가정용 기계가 보급되어가고 있다. 이 밖에 라디오, 텔레비전, 자전거(유까딴 지역) 등의 보급도 최근 들어 비록 느리긴 하지만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또한 원주민 마을까지 도로를 만들고 전기가 들어가게 하는 사업을 각 나라의 정부에서 많이 추진하고 있다. 그렇지만 동서양의 다른 문명권의 발달 속도, 혹은 그 정도와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그 발달의 의미는 거의 없다고 하는 표현이 가능할 정도로 마야 원주민들의 생활 변화는 지극히 미미하다. 지역에 따라 많은 격차가 있기는 하지만 도시화가 진행되지 않은 곳에서는 옛날 500여 년 전이나 1000년 전 자신의 조상들과 거의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모습이 변하지 않은 것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이유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이들의 보수성이다. 여러 가지 환경의 변화가 별로 없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삶의 형태를 바꿀 수 있었던 부분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을 지키려는 마야인들의 보수성은 오늘날 마야 사람들이 생활의 도구나 방법, 그리고 생활 철학을 바꾸어 나가는데 커다란 장애물이 되어왔다. 즉 전통을 지키고 그 방법을 고수하려는 마야인들의 심리가 오늘날 마야 사람들이 생활모습을 고집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로 작용된 것이다.
다른 원인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역시 경제적인 요인일 것이다. 비록 보수성이 강하다 하더라도 경제적으로 여건이 허락된다면 전통을 지키려는 의지만을 가지고 굳이 힘든 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옥수수를 갈기 위해 믹서를 사용한다면 한 시간 동안 해야 할 일을 단 일이 분 안에 할 수 있다. 그런데 믹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을에 전기가 들어와야 하고 믹서를 살만한 돈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현재 많은 수의 마야 원주민들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결국 경제적인 원인 또한 이들이 전통적인 삶을 유지하는 데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 두 가지 요소, 즉 보수성과 경제적인 요인은 서로가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오늘날 마야인들 일상의 전통적인 모습을 만들고 있다.
마야 사람들의 생활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충분한 상상력을 동원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상상력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현대 생활에 익숙해진 우리들이 무의식중에 지금으로부터 1000년이 넘는 시절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하여 본의 아닌 오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해를 하지 않기 위해서 제일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 중 하나는 당시의 사회가 산업혁명 이전의 사회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모든 물건들이 수공업에 의하여 만들어졌고 그러다 보니 당연히 그 생산량에 있어서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의식주에 필요한 물건들은 자연에서 채취할 수 있는 재료들을 가공하여 만들어졌다. 따라서 자연의 재료를 얼마나 어떻게 이용하였는가가 곧 그들 삶의 질을 좌우하게 되는 동시에 이들 문화의 기술적인 수준을 가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먼저 이들은 어떤 자연의 재료들을 어디에 사용하였는지,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일상생활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의식주 생활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생활에 이용된 자연재료
마야 사람들이 이용하였던 여러 종류의 자연재료들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타 지역에서 수입해 오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흑요석3)(각주3_ 흑요석은 금속의 발달이 미약하였던 마야사회의 가장 중요한 도구를 만드는 광물로 이용되었다. 마야지역에서는 흑요석의 생산이 많지 않아 상대적으로 그 사용이 다른 곳에 비하여 적기는 하지만 전체 메소아메리카 지역에서의 흑요석의 중요성과 그 의존도는 높았다. 특히 날카로운 날을 만들기 좋은 흑요석의 장점 때문에, 부서지기 쉽다는 결점에도 불구하고 칼이나 화살촉을 비롯한 많은 도구들이 이 흑요석으로 만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그 광택과 색깔이 아름다워 종교적인 성격을 띠는 조각품도 흑요석으로 만들어졌다. )과 같은 품목은 수백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잘 발달된 교역망을 통하여 원자재나 완제품 등을 수입하여 왔던 것을 볼 수 있다. 즉 단순히 주변의 것들을 이용하는 수준을 벗어나 자유롭고 활발한 물자의 교류를 통하여 타 지역의 원료들을 들여와 다양한 방법과 형태로 사용하였다. 다음으로 이들이 주로 이용하였던 자연재료들과 그 쓰임새를 항목별로 살펴보자.
쪹 나무, 식물 - 바구니, 방석, 무기, 선박, 종이, 향(꼬빨나무를 이용한 제례용 향), 고무공, 채색재료(건물이나 책, 도자기 등의 채색을 위한 재료), 건축재료(지붕, 벽 등), 의복(면(棉) 등), 줄, 그물(에네껭)
쪹 동물, 해산물 - 식용(고기), 의류(노루, 재규어, 퓨마 등의 가죽), 장신구(이빨, 뼈, 조개, 새의 깃털), 악기(바다달팽이 등), 부채, 햇빛가리개, 문장(紋章)
쪹 광물질 - 건축재료, 무기, 보석(줴이드 등), 조각재료, 일상생활에 필요한 그릇류, 종교행사용 제기(祭器), 조각상, 가면, 방추, 그물용 추, 벽돌
고무를 이용한 공이 마야와 메소아메리카 사람들에 의하여 최초로 만들어졌고 이것이 아메리카대륙 정복 이후 유럽으로 건너가 오늘날 사용하는 바람을 넣은 다양한 고무공의 원조가 된다. 이전까지 유럽에서는 가죽을 덧대어 그 속에 깃털과 같은 재료를 넣은 공이나 동물의 내장기관 등을 이용한 공을 사용하다가 이곳 사람들이 신축성이 좋은 고무 재료를 이용한 공을 만드는 것을 보고 오늘날의 공과 유사한 것들을 만들어 쓰게 된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현대 각종 구기의 원조를 마야와 아메리카대륙 원주민문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다음에 자세히 설명하게 될 신성한공놀이와 같은 구기가 이곳에서 행해졌던 것을 보면 이러한 원조를 따지는데 있어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고무공과 신성한공놀이(236쪽 참조)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식생활
마야 사람들의 주식은 옥수수이다. 다양한 작물을 채집과 경작을 통해 식생활에 이용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식량원이 되는 것은 옥수수였다. 따라서 원주민들의 종교에서도 옥수수를 신성시하는 흔적을 쉽게 볼 수 있으며 옥수수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도 이들의 설화에 소개된다.
먼 옛날 옥수수는 바위 속에 숨겨져 있었는데 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는 바로 개미들이었다. 그래서 신들이 동물을 보내는 등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옥수수를 찾으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만다. 결국 번개를 치게 하여 옥수수를 덮고 있는 바위를 부수는데 거기에서 머리가 긴 젊은 옥수수의 신이 나온다는 내용이 이러한 신화가 가지고 있는 대강의 내용이다. 마야 사람들의 기원신화라고 할 수 있는 뽀뽈부에서는 인간을 흙이나 나무 등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만들어 보았지만 다 소용이 없었고 마지막으로 옥수수로 인간을 창조하였을 때 온전한 인간이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그들의 믿음에 의하면 지금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은 옥수수로 만들어진 것이다. 마야 사람들의 주 식량원인 옥수수의 높은 중요성과 이에 어울리는 독특한 종교적 의미를 잘 나타내주는 설화라고 할 수 있겠다.
마야와 메소아메리카문화권을 공유하고 있는 멕시코 고원지역의 사람들도 역시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고 있으며 이들의 구전설화에서도 마야지방에서 볼 수 있는 옥수수와 관련된 전설을 찾아 볼 수 있다. 소치퀘잘(Xochiquetzal)과 삘찐떼꾸뜰리(Piltzintecuhtli)라고 하는 신들 사이에서 태어난 씬떼오뜰(Cinteotl)이라는 신이 죽으면서 그 몸에서 여러 가지 작물이 나왔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옥수수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이렇듯 옥수수는 마야 사람들 정신세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종교관에서도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을 정도로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의미를 주는 그런 작물이다.
마야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식량원인 옥수수를 이용한 요리 또한 풍부하였다. 제일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는 또르띨야(Tortilla)이다. 이것은 옥수수 알을 따서 돌판에 갈아 우리나라의 밀전병과 같이 둥그런 모양으로 만들어 불판에 구운 것을 말한다. 이 속에 각종의 재료를 넣어 쌈을 싸서 먹기도 한다. 옥수수로 만든 요리 중에 따말(Tamal)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물과 섞은 옥수수 반죽 안에 고기, 콩, 차야(Chaya)4)(각주4_ Chaya(차야, Cnidoscolus Chayamanca), 잎사귀가 부드럽고 향이 좋아 마야 유까딴반도에서 음식재료로 다양하게 사용된다. 비타민과 미네랄 성분이 많다. 혈액순환과 소화촉진을 위한 전통약재로도 이용된다.)잎 등을 넣어서 찐 것을 말한다. 또한 옥수수는 그들이 평소에 즐겨 마시는 음료를 만드는 재료로도 이용된다. 뽀솔(Pozol)이라는 음료가 바로 그것으로 마야의 전 지역에서 지금까지도 서민들의 일상적인 음료로 많이 이용된다. 이것은 아주 간단히 만들어지는 것으로써 적당히 익은 옥수수가루를 물에 섞으면 된다. 보통 한 끼 이상을 야외에서 먹을 필요가 있을 때 아직까지도 가난한 마야의 원주민들은 익힌 옥수수가루를 보자기에 쌓아 가지고 다니며 물에 타서 마신다. 한편 뽀솔을 간편히 만드는 일상 음료라고 한다면 아똘레(Atole)는 좀 더 정성을 드린 옥수수차, 혹은 그 농도에 따라서 옥수수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옥수수가루를 물에 섞어서 끓인 것으로 옥수수의 녹말성분으로 인하여 점성이 강한 음료가 된다. 지방에 따라 여러 가지 향료나 기타 다른 첨가물들을 곁들여 끓이기도 한다. 이밖에도 삐놀레(Pinole) 등 상당히 많은 요리와 음료들이 옥수수로 만들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식혜나 약식 등 쌀을 이용한 음식들이 많이 발전한 것과 같이 마야지역에서도 옥수수를 이용한 여러 가지 먹거리들이 많다. 이러한 음식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거의 차이 없이 그대로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16세기 마야 원주민들이 만들어 먹었던 옥수수를 이용한 음료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은 당시의 관습을 전하고 있다.
주식은 옥수수로써 그것을 가지고 여러 종류의 식품과 음료수를 만드는데 그 음료는 [곡기가 있어서] 음료이기는 하지만 음식의 역할을 한다. 인디오들은 [먹기] 하루 전에 [석]회와 물에 옥수수를 집어넣어 [옥수수를] 적셔놓고 그 이튿날에 부드럽게 약간 익어 있을 때 늘 해오던 대로 그렇게 껍질과 자루를 벗긴다. 그리고 돌에 가는데 반 정도 갈아진 상태에서 [그 가루를] 커다란 공처럼 만들어 들일을 나가거나 먼 길을 가는 사람뿐만 아니라 선원들도 가지고 다니면서 풀어 마시는데 [시간이 지나더라도] 누렇게만 될 뿐 몇 개월 동안은 [상하지 않고] 잘 견딘다. 공처럼 된 덩어리에서 작은 부분을 떼어내서 하느님께서 컵으로 사용하게끔 주신 나무 열매의 껍데기로 된 컵에 그것을 녹여 마시고 따로 떼어 먹기도 하는데 그것은 맛도 좋을 뿐만 아니라 곡기를 하는데도 좋다. 더 곱게 간 것은 즙을 내 불에 응결시켜서 아침에 따뜻하게 데워 묽은 수프를 만들어 먹는다. 아침에 먹고 남은 것은 남겨두었다가 일과 중에 물에 타서 마시는데 왜냐하면 이들은 그냥 맹물은 마시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옥수수를 구운 다음에 갈아서 물에 녹이는데 그것은 시원한 음료가 되고 거기에 인디오의 후추와 카카오를 조금 넣는다. 옥수수와 카카오를 갈아서 거품을 내어 만드는 맛있는 음식이 있는데 이것은 축제에 사용한다. 카카오에서 버터 같은 기름기를 뽑아서 이것과 옥수수를 가지고 다른 음료를 만드는데 맛이 있어 사람들이 좋아한다. 날옥수수 간 것을 가지고 다른 음료를 만드는데 상당히 시원하고 맛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빵을 만드는데 좋고 청결하지만 차가워지면 먹기에 나쁘다. 그래서 여자들은 매일 두 번씩 빵을 만든다. 밀가루 빵처럼 만들어 보았지만 밀가루처럼 반죽이 되지 않아 밀가루 빵처럼 되지 않았다(Landa).
이 밖에도 다음과 같은 다양한 먹거리들이 존재하였다.
쪹 채소 - 콩, 호박, 차요떼, 까모떼스, 차야, 토마토, 유까, 히까마, 마깔 등
쪹 과일 - 마메이, 치꼬사뽀떼, 흰사뽀떼, 아구아까떼, 구아야바, 구아야, 난세, 삐따하야, 시리꼬떼, 마라뇬, 아노나, 살구, 야생포도 등
쪹 육식5) - 개, 칠면조, 꿩, 새 등을 식용으로 사육
쪹 해물 - 바다, 강, 호수에서 채집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물고기와 해산물들을 식용으로 이용하였다.
쪹 주류(酒類) - 발체(Balch?라고 하는 나무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만든 술과 구운 옥수수로 만든 술이 종교적인 행사에 사용하는 술로 만들어졌다.
쪹 인육(人肉) - 일상음식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종교행사의 일환으로 제물로 바쳐진 사람의 고기를 일부 제사장들이 먹었다.
영양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현대를 살고 있는 마야 원주민들은 아주 적은 양의 단백질을 섭취하는데 하루에 평균적으로 80그램 정도를 소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섭취하는 음식의 80% 가량은 탄수화물인데 그 대부분을 옥수수가 차지한다. 위에서 설명한 여러 가지 형태의 옥수수로 된 음식물들이 아직까지도 그들 식생활의 주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이들은 평균적으로 2,565kcal를 섭취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러한 수치는 미국의 3,500kcal에 비하여 적지만 한국의 2,000kcal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많은 양이라고 할 수 있다(1998년 통계, mo-hw.go.kr).
주거생활
앞의 정치제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반평민과 상류층 주거지의 차이가 현격 하였다는 이제까지의 주장이 상당부분 오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신분의 차이에 따라 사람들이 사는 주거지의 질에 커다란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각 사람들이 하는 역할에 따른 주거지의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즉 제사장은 도심지의 중심에 위치한 신전부근에 살았으며 각 도심의 지역마다 독특한 기능을 가지고 있어, 도자기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사람은 도방을 중심으로, 민예품 등을 만드는 사람은 공방밀집지역에, 천문관측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관측소 부근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분에 따른 주거지역의 차이가 아닌 각 사람들의 역할에 따른 주거지의 차이가 있었다는 말이 그래서 가능하다.
일반적인 주거지는 통나무기둥으로 받쳐진 터 주변으로 나무막대기를 엮어 벽을 만들고 - 석회로 그 위를 입히기도 한다 - 지붕은 보통 종려나무 잎이나 짚으로 엮어서 얹는다. 바닥은 잘다져진 흙바닥이거나 그 위에 회반죽을 입히기도 한다. 주거지의 바닥은 사각형이거나 타원형이 일반적이다. 특히 유까딴 지역은 타원형이 많다. 사료에 나와 있는 16세기 마야 원주민들의 집에 대한 묘사를 보면:
인디오들은 풍부한 양질의 짚이나 종려나무 잎으로 씌운 집을 만드는데 이러한 재료들은 갈래가 잘 나있어 비가 새지 않아 지붕을 얹는데 적당하다. 집을 다 짓고 난 다음에 집들 사이로 길게 담을 쌓아 그것으로 집과 집 사이의 경계를 삼는다. 이 담의 중간부분에 몇 개의 문을 만드는데 이러한 집과 담이 모여 한 마을을 이룬다. [집안에는] 침대가 있고 침대가 없는 바닥면은 양질의 석회로 희게 입혀져 있다(Landa).
마야의 커다란 도시에서 볼 수 있는 돌로 만들어진 장엄한 건축물들은 일반적인 주거지가 아니라 특수한 기능을 가진 건축물이다. 보통 이를 피라미드라고 부르는데 이는 행정이나 종교적인 용도로 주로 쓰였다. 이러한 피라미드들은 각 도시에 따라 다른 구조와 특색을 가지고 있지만 용도 면에서 보면 제단과 신전, 정치종교 관련자들의 주거지, 공놀이 경기장, 증기목욕탕, 도자기나 깃털 등을 이용한 고급 수공예품을 만드는 작업장, 제사에 사용되는 각종 물건을 보관해 두는 창고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제 26장 마야의 도시들」 참조). 이러한 건축물들의 기능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부분의 건축물은 마을의 공동행사를 위하여 쓰였다. 따라서 도시 중심의 주거지들은 거주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고 할 수 없고 사람들이 살기에는 거주성도 떨어진다. 실제로 지금도 마야의 피라미드 안에 들어가 보면 습도가 다른 곳보다 높다는 점 등으로 하여 사람들이 살기에는 그렇게 적합하지 않다.
이제까지 일부 특권층들이 도시의 중심에 위치한 고급 건축물들에서 살았을 것이라는 추측은 특별한 근거를 찾기 힘들다. 이와 같은 생각은 이들의 사회구조가 상하의 엄격한 구분으로 이루어져서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하층민과 비교되는 주거 환경을 가졌을 것이라는 극히 동서양의 사회신분제도의 개념에 기초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상류계급이 사는 집은 많은 노동력을 들여 잘 지어진 집이고 이러한 곳에 사는 것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신분을 나타내는 실질적, 혹은 상징적 특권중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시중앙의 피라미드들이 살기에 더욱 좋은 환경을 제공해 주는 것도 아니며 짚으로 만들어진 일반 거주지들이 마야 사람들에 의하여 상대적으로 나쁜 것으로 천대되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예를 들어 유까딴반도에 있는 랍나(Labna)유적지를 보면 중앙신전지역의 가장 중심이 되는 건축물 중의 하나인 속칭 개선문이라 불리는 중심건물의 중앙에 짚으로 만든 집의 모형이 만들어져 있다. 이곳뿐만 아니라 다른 유적지의 건축물에도 이러한 모형이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짚으로 만든 집이 마야 사람들에게 상징적으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중앙신전지역의 건물들에 그 건물의 기능에 따라 상당수의 사람들이 살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앙의 피라미드와 그 부속건물들에 일부 특권 계급이 살았으며 일반 평민들은 고작 도시외곽의 초가집에서 살았다는 단순한 생각은 피해야 하겠다.
대부분의 피라미드들은 행정과 종교, 그 중에서도 특히 종교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증기목욕탕의 경우도 전적으로 종교적인 정화(淨化)의식을 행하는 곳으로 일부 특권계급의 호화로운 개인생활을 위해 만들어졌거나 사용되었던 것이 아니다. 이렇듯 도시중심의 중요 피라미드들이 종교적인 목적달성을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하는 설명은 도시의 건축 구조를 연구하는 건축학 분야에서도 잘 밝혀지고 있다. 도시의 설계와 구성을 볼 때 모든 마야의 도시는 광장을 중심으로 하여 만들어졌다. 모든 주민들이 모여서 제례의식을 행할 수 있는 광장이 당시 마야의 도시들을 계획하고 건설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려 대상으로써 이러한 광장을 중심으로 건물들을 배치하고 난 후 동선(動線)과 조화 등은 그 다음으로 고려되었다는 것이다. 즉 도시전체가 많은 마을 주민들이 모여서 제사를 잘 올릴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다시 말해 전체 마을 사람들의 공동행사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행할 수 있는가에 가장 큰 주안을 두어 도시가 계획되었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다. 당연히 건물들의 용도 또한 이러한 필요에 의해 설계되었다. 제사에 사용되는 물건들을 만드는 곳, 제사용품들을 보관하는 곳,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제사를 준비하기 위하여 지내는 곳, 직접 제사를 모시는 곳,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정화의식을 행하는 증기목욕탕 등 대부분의 건축물들이 이러한 종교적인 성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물론 행정적인 기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단 대부분 행정의 중요한 일들이 이들의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과 마야사회는 종교의 지도자들이 역시 행정의 지도자 역할을 같이 수행하는 제정일치 사회였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곳들이 종교와 행정의 필요를 동시에 수행하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종교적인 기능이 행정과 완전히 일치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도시의 한 곳에서는 국제적인 규모의 시장이 서기도 하는 등 다른 활동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마야의 도시와 그 역할, 활동, 성격 등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마야의 도심들이 일부 지도층의 특권적인 삶을 위하여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과 종교적인 성격을 가장 많이 띠고 있었다는 점을 먼저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겠다.
대다수 관광객들이 마야 원주민들의 생활환경을 피상적으로 관찰해 보고 더럽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된다. 그러나 이는 현대적이지 않은 삶을 산다는 것에 대한 선입견에서 시작된 오해와 편견이라고 말하고 싶다. 관광객들이 쉽게 볼 수 있는 마야의 촌락들은 상대적으로 도회지나 유명 관광지에 가깝게 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가장 큰 골칫거리 중의 하나인 각종 도시 문제가 이곳에도 많이 발생한다. 특히 그들의 의식주는 기본적으로 산업혁명 이전의 형태, 즉 자연적인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도시에 가깝게 사는 사람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간에 오염문제의 여파를 받게 된다. 생활용품의 포장지에서부터 화장실 사용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완전히 자연적인 삶도 아니고 도시화된 모습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 즉 현대화의 혜택은 누리지 못하면서 현대화의 단점만을 싸안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생활환경이 오염에 어쩔 수 없이 노출되게 되고 그러한 것들을 방문객들이 주로 접하게 되는 것이다. 경제적인 빈곤이 이러한 관광지, 혹은 대도시 주변 원주민 촌락의 환경파괴와 오염을 해결하지 못하는 원인의 중심에 있다. 그러나 보다 깊숙이 현대화의 영향이 적은 원주민 마을에 들어가 보면 비록 작고 초라하게 보일지라도 깨끗한 환경 친화적인 촌락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산업혁명 이전의 삶의 방식을 유지하였던 정복 이전의 마야사회가 자연친화적이고 위생적인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다양한 고고학적 연구의 결과를 통해 입증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복장과 장식
전 세계에 존재하는 각 민족의 특징을 시각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각 국가의 민속의상이 아닐까한다. 국경을 뛰어넘는 미디어와 교통의 발달로 점점 다양한 문화의 특징들이 우리들의 생활에도 친숙하게 다가오고 있다. 마야 사람들의 전통의상은 각 지역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기후와 지형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입는 옷이나 장식들도 다를 수 밖에 없다. 일년 내내 평균기온이 30도를 웃도는 유까딴반도 여자들의 전통의상은 우이삘(Uipil) 혹은 우이뿔(Uipul) 이라고 불리는 얇은 면직의 흰색 원피스인 반면, 눈이 내리기도 하는 고원지역의 전통복장은 두꺼운 면으로 된 짙은 색의 우이삘에 덧옷이나 레보소(Rebozo)라고 부르는 넓은 천을 두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먼저 이러한 다양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 의상과 장식의 일반적인 특징들에 여러 가지 공통점을 만나게 된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으로 여성 의상의 화려한 자수를 들 수 있는데 사실적으로 표현된 커다란 꽃문양들이 많다. 1992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마야 원주민 출신의 리고베르따 멘추(Rigoberta Mench?6(각주6_ 199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과테말라의 여성 인권운동가이다. 1959년 과테말라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어릴 때부터 농장 노동자로 일하였다. 지하 조직인 농민연합위원회 일원으로 인권운동을 펴다 피살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1979년 캄페시노 단결위원회에 가입하여 인권 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농민들을 조직화하는 일에 착수하다가 어머니가 처형되자 1981년 멕시코로 탈출하였다. 전세계에 중남미 인디오들의 참상을 알리는 일에 힘을 썼으며 동시에 과테말라의 전위 조직과 농민연합위원회를 후원하였다. 유엔 원주민문제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을 펼쳤으며 유네스코 평화교육상, 프랑스 자유인권옹호위원회상 등을 수상하였다. 1992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한 노벨위원회는 사회적 정의와 인종·문화간의 화합을 위한 노력을 인정해 그녀에게 상을 수여한다고 밝혔다(출처: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여사가 공식석상에서 입던 전통의상에서 이러한 화려한 자수무늬를 볼 수 있다. 고대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의상도 지금의 원주민들의 의상과 그렇게 큰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식민지시대 전후의 사료에서 당시에 제작된 조각이나 그림 등을 통하여 복식문화와 치장을 엿볼 수 있다.
쪹기본복장 - 남자인 경우 저지대에서는 엑스(Ex) 또는 따빠라보(Taparabo) 라고 불리는 면직의 기다란 천으로 만든 옷을 사용하였다. 이 천을 가랑이 사이로 넣어서 허리에 묶는다. 여자들은 면, 또는 모로 된 우이삘을 사용하였다.
쪹장식 - 직책이나 직위에 따라 장식이 많아져서 머리, 상체, 허리, 무릎, 발목, 발 등에 화려한 치장을 한 다양한 종류의 장식이나 장신구들을 볼 수 있다.
쪹문신(文身), 화장(化粧) - 화장과 문신을 하였으며, 여자들은 일종의 자연향수도 썼다.
쪹머리카락 - 범죄를 저질렀거나 하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쪹신체변형 - 두개골변형, 귓구멍 뚫기, 코에 구멍 뚫기, 혀에 구멍 뚫기, 치아변형, 사팔뜨기 만들기 등 각 지방의 특색적인 신체변형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신체변형은 메소아메리카의 전통적인 특색으로, 또한 나아가 아메리카대륙 원주민들의 문화적인 현상으로 일반화시킬 수 있다. 이 중에서도 마야를 비롯한 메소아메리카 사람들은 난장이, 사팔, 앉은뱅이 등을 비정상적이고 열등한 장애로 이해하기 보다는 보통 사람과 다른 특징, 혹은 신의 선택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러한 특이한 형태를 모방하는 것을 종교적인 차원에서 즐겼다. 이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두개골변형에 대하여 알아보자.
요즘 들어 피어싱이 유행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추세인 것 같다. 고리타분한 사람들까지도 ‘젊은 사람들이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생각으로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보며 놀라기까지 해 본다. 그런데 1500년대의 아메리카대륙에서는 이러한 관용이 전혀 적용되지 못하였다. 마야 원주민들의 이런 “피어싱”전통은 당시 가톨릭의 사제들로부터 사탄적인 행동으로 취급을 받아 금지되었다. 원주민들의 야만성을 이야기할 때 이런 구멍 뚫기와 같은 행위가 항상 도마 위에 올랐다. 심지어는 이런 “피어싱”의 전통을 행한 원주민을 이단으로 여겨 처형하기도 하였다. 현재 젊은이들의 새로운 변화를 이해해가고 있는 우리사회의 풍속도와 1500년대의 사탄적 행동으로서 금지되었던 이 피어싱이 묘하게 대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두개골변형(편두)
일반적으로 모든 메소아메리카 사람들은 일종의 두개골변형(편두)을 하였다. 또한 인간의 두개골에 대해 특별한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야지역과 메시까지역에 많이 나타나는 쏨빵뜰리(Tzompantli)7)(각주7_ 해골을 열을 맞춰 장식해 놓거나 해골의 형태를 건물벽면에 바둑판처럼 빼곡히 장식한 것을 말한다. 이는 마야지역뿐만 아니라 전체 메소아메리카 지역에 자주 등장하는 건축 장식문양의 하나이다. )라고 하는 두개골 벽면장식은 이러한 두개골에 대한 특별한 종교적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갓 태어난 어린아이의 머리에 송판을 대고 그것을 천으로 단단히 눌러둠으로써 원하는 모양을 만든다. 그러나 이렇게 어린아이에게 나무를 묶어 놓는 것이 한두 달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의도하는 변형을 얻기 위해서는 몇 년간에 걸쳐 변형작업이 이루어졌다.
두개골변형(편두)의 전통은 마야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편두라는 말로 많이 사용되는데 동양의 훈족도 편두의 풍습이 있었다. 더욱 재미난 것은 한국에서도 이러한 두개골변형의 전통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경남 김해의 예안리유적지에서 발견된 가야사람의 것으로 추정되는 두개골에서 편두의 전통이 나타나는데 한반도의 편두풍습은 기원후 4세기 이후부터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사료에도 기록이 남아있어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어린아이가 출생하면 돌로 머리를 눌렀다고 적혀있다. 마야 사람들이 나무판자를 사용하는 것과 방법이 조금 다를 뿐 특색 있는 풍습의 공유가 매우 흥미롭다.
두개골을 변형하는 정확한 이유에 대하여는 알려진 것이 없다. 로마노 빠체꼬(Romano)는 이러한 두개골변형이 단순히 미(美)적인 목적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종교 장치와 관련된 사회계층을 나타낸다고 주장하였다. 즉 두개골변형을 통해서 각 사회계층, 혹은 정치권력의 정도를 나타내는 외적인 징표로 이용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Romano, 25~41쪽). 크게 나누어 머리를 직각으로 만드는 수직형이 있고, 눈위를 경사지게 만드는 경사형이 있는데 일반 평민들은 수직형만을 할 수 있었고 높은 계층의 사람들만이 경사형을 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최근 들어 까르멘 발베르데(Carmen Valverde)는 이것을 재규어의 모방이라고 해석하고 있다(Valverde, 212쪽). 재규어는 일찍부터 메소아메리카의 정치와 종교의 중요한 소재로 많이 나타나는 동물이다. 이 동물은 다른 먹이를 사냥하기에 편하도록 눈썹 위에서부터 윗부분이 기울어져 숨어서 적을 노릴 때 머리부분이 잘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 많은 마야의 두개골변형이 이와 상당히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어 이것이 마야 사람들이 숭상하는 재규어 두개골의 모방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의견을 종합해 보면 재규어의 머리모양에서 모티브를 얻어 두개골변형을 했고, 이것은 정치적 권력의 외형적인 상징으로 이용되어졌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는 많은 문제점들이 제기 될 수 있다. 이와 반대되는 연구의 결과도 상대적으로 최근에 등장하였다. 티슬러(Tiesler)의 연구는 두개골변형이 씨족적인 동질성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두개골변형은 각 지방과 시기에 따라서 그 형태와 각도 등이 상당히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는 두개골변형이 각 씨족, 혹은 촌락적 전통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사회계급적인 차이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 예로서 상위 계층의 것으로 추정되는 부장품이 많은 무덤에서 발견되는 두개골의 변형 형태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녀의 분류는 사실상 위에서 언급한 로마노 빠체꼬(Romano Pacheco)의 지도 하에 이루어진 박사 논문에서 발표되었던 것으로 봐서 어느 정도 이 분야연구의 발전된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점에 있어서 필자도 1998년 발표한 “고대 마야사회의 역동성”이라는 논문에서 사회 계층간의 외견적인 차이는 뚜렷하게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송영복, 1998).
이러한 전통은 전고전기부터 후고전기에 이르기까지 전체 마야지역에서 꾸준히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고전기 때가 절정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당시의 두개골이 더욱 높은 비율로 그 변형의 정도를 보여주고 있다.
마야 사람들은 두개골변형뿐만 아니라 치아변형 등 오늘날의 우리와는 다른, 미적 혹은 종교적 형태의 변형을 행하였다.
개인위생
고대에서부터 현대의 마야 원주민에 이르기까지 신체의 청결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거의 놀라울 정도로 철저했던 마야 사람들의 생활습관이 그대로 이어진다. 란다도 16세기 마야 사람들이 목욕을 자주하였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Landa).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마야 원주민들 촌락에는 상하수도시설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하루에 한 번 이상 이들은 목욕을 한다. 밖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남편에게 아내가 항상 목욕물을 준비해 주는 것이 일반화되어있다. 식민지시대에는 그것을 지키지 않는 아내를 때릴 수 있는 권한이 법으로 주어지기까지 하였다. 마을 근처에 있는 샘이나 우물, 쎄노떼 - 자연 혹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물웅덩이 - 같은 곳까지 가서 바가지나 두레박을 이용하여 물을 길어서 물동이에 이어 운반을 해야 했던-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다 -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이들의 신체 청결에 대한 집착은 가히 놀라울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제 16 장
출산에서 장례까지
이번 장에서는 출산에서 유소년기, 청장년기와 노년기에 이르는 마야 사람들의 삶의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 대한 마야인들의 해석에는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이 담겨있으며 성년식은 그 사회 역동성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보여 준다. 또한 장례식은 한 인간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문제로 그들 삶의 철학이 잘 나타난다. 따라서 여기서 관찰하려고 하는 각각의 주제들은 마야인들의 생활과 이에 따른 우주관,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된다.
출산
한국의 전통신앙에는 생활의 요소요소에 초자연적인 힘과 이러한 것을 주관하는 신이 존재한다. 작게는 부뚜막 귀신, 뒷간 귀신에서부터 산신령이나 바다 속의 용왕과 같은 것이 이러한 것들이다. 출산과 관련하여 우리들의 민간신앙 속에 나오는 삼신할머니의 역할을 해주는 신이 마야에도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자식을 점지해 주고 잘 낳게 해주는 신이 삼신할머니라고 한다면 마야에서는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신이 바로 익스첼(Ixchel)이다. 달의 신이기도 한 이 여신은 마야여인들의 믿음 속에 그들의 임신과 출산을 지켜주는 영적인 존재로서 아직까지도 살아있다.
아이를 낳는데 도움을 주는 산파를 가리켜 마야 쎌딸(Tzeltal)족은 땀 아랄(Tam Alal), 혹은 몰 아랄(Mol Alal)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것들의 어원을 살펴보면 “땀(Tam)”은 “집다”이고 “몰(Mol)”은 “줍다”이며 “아랄(Alal)”은 “땅(地)”을 가리킨다(Ruz, 1985, 160쪽). 이를 풀이해보면 이 두 단어는 땅에서 줍거나 집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즉 익스첼이 점지해 주신 어린아이가 땅이라는 자연을 상징하는 곳에서 오는 것이고 산파는 이를 받는 역할을 한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면 먼저 아이를 잘 씻긴 다음 아기침대에 누이고 며칠이 지나서 판자를 머리의 앞과 뒤에 대고 천으로 고정 시킨다. 앞장에서 말한 두개골변형을 하기 위한 풍습이다. 지금은 이러한 풍습이 행해지고 있지 않지만 많은 수의 고대 마야인들의 유골에 이러한 두개골변형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대에는 일반적으로 널리 행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어린아이의 눈을 사팔로 만들기 위하여 이마에 끈을 묶고 거기에 구슬을 달아 양쪽 눈의 가운데에 위치하게 만든다. 어린아이가 이 구슬에 집중함으로써 사팔뜨기가 된다. 이러한 풍습은 20세기까지도 특정지역에서 전해져 내려 왔던 것을 볼 수 있고 현재에도 일부 마을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이러한 풍습과 아울러 새로 태어난 모든 생명은 그들의 제사장에 의하여 미래를 점치는 종교적인 관례를 가진다.
유소년기
마야가 대가족 사회를 유지하였던 만큼 다른 인류와 마찬가지로 마야의 어린이들은 주변 친인척들의 많은 사랑 속에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며 성장하게 된다. 마을과 마을 근처의 자연이 놀이터가 되고 어른들은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한 아이들에 대한 구속을 별로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에 대한 관심을 적게 보인 것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아이들에게는 장난감 활, 인형 등을 만들어 주는 등 다양한 배려를 하였다.
일반적으로 교육과 교육기관에 대하여는 알려진 점이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러나 일정한 형태와 역할을 가진 일종의 학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학교에서는 여러 가지 사회인으로서 필요한 종교, 정치적인 교양을 습득하게 된다. 특히, 신성한공놀이(Juego de Pelota)도 이러한 학교를 통하여 마을의 구성원들에게 전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정교육은 교육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집안의 어른들이 하는 일을 어깨너머로 보고 배우다가 어느 정도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부모님을 따라 본격적으로 전문적인 일을 배우기도 한다. 농민의 아이들은 농사일을 돕게 되고 전문석공의 아이들은 부모의 작업현장을 따라 다니게 되는 등 어려서부터 자연스러운 직업 교육이 가족단위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직업은 단순 세습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마야달력을 보면 우리나라의 사주(四柱)와 같이 태어난 날에 따라 각자가 가지고 있는 운명이 있다. 따라서 제사장과 같은 직업은 태어난 날의 운명에 의하여 계승되기도 한다. 어떤 직업이 세습되고 어떤 직업들이 세습이 아닌 다른 과정을 통해 결정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이들의 직업이 완전한 세습에 의해 결정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년식
유년기의 어린아이들이 자라나서 본격적으로 마을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시기가 되면 일종의 성년식이 치러진다. 이곳을 침략해왔던 에스빠냐 사람들이 보기에는 일종의 세례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적 행사였다. 그래서 정복 당시의 사료에 보면 이러한 의례를 세례(Bautismo)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많은 관심을 가지고 꼼꼼히 기록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 행사는 동네어른인 할아버지들이 주관하는데 여러 명의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이 같은 날 모여 행사를 가진다. 마을의 모든 어린이들이 이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만일 이러한 의례를 거치지 않는다면 결혼을 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있다. 정복 당시인 16세기 초, 란다 신부가 적은 내용을 통해 당시 마야 사람들이 행하였던 성년식의 광경을 상상해 볼 수 있는데 원문의 내용을 그대로 보도록 하자.
축제가 있기 3일 전 전체 아이들의 부모와 행정관들은 부부관계를 삼가고 단식한다. 세례식 당일 날 세례를 받을 모든 아이들은 축제가 열리는 집으로 모여서 줄을 서는데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이 따로 줄을 선다. 그 집의 정원이나 광장은 깨끗이 청소가 되어 있고 준비해 놓은 신선한 나뭇잎을 그곳에 깔아 놓는다. 할머니 한 분이 여자아이들의 대모(代母) 역할을 하고 할아버지 한 분이 사내아이들의 대부(代父) 역할을 한다. 제사장은 잡귀들을 이 집에서 쫓아내는 정화의식을 한다. 잡귀를 쫓아내기 위해 광장의 네 모퉁이에 의자 네 개를 놓고 그곳에 착(Chac)이라고 불리는 네 명의 사람들이 얇은 줄을 서로 붙잡고 있는데 아이들이 그 줄 가운데에 서고 이미 단식을 한 아이들의 부모 역시 그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난 다음에 또는 그 전에 가운데에 다른 의자를 놓고 거기에 약간의 갈은 옥수수와 향로, 향을 들고 제사장이 앉는다. 그 쪽으로 사내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이 차례대로 오면 제사장은 손에 있던 옥수수가루와 향을 그들에게 뿌린다. 아이들도 그것들을 향로에 조금씩 뿌린다. 이러한 향 피우기가 끝나고 나서 사용하였던 향로와 주변에 쳐 놓았던 얇은 끈을 모아서 술8)(각주8_ 원문에는 “Vino(포도주)”로 되어있다. 당시 에스빠냐 사람들에게는 포도주가 모든 술의 대명사처럼 여겨졌기 때문에 여기에 포도주라고 적고 있지만 실제 원주민들이 만들었던 술은 옥수수나 용설란으로 제조한 것이다.)이 조금 있는 잔에 넣고 그것을 한 사람에게 주어서 마을 바깥으로 가지고 가게 하는데 나가면서 절대 그 술을 마셔서도, 뒤를 돌아봐서도 안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잡귀들을 밖으로 쫓아냈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가고 나서 준비했던 씨홈(Cihom)이라 불리는 나무의 잎으로 광장을 청소하고 꼬뽀(Cop?라고 불리는 것을 뿌리고 멍석 같은 것들을 깔고 그 위에서 제사장이 옷을 입는다. [기본]옷을 입고 난 뒤 외투 같은 것을 걸치는데 그것은 형형색색의 깃털로 만들어져서 색깔이 화려하다. 이 외투의 끝에는 다른 종류의 기다란 깃털이 꼽혀져 있다. 그리고 머리에는 같은 깃털로 되어있는 고깔 같은 것을 쓰고 외투 밑에는 꼬리처럼 땅에 까지 닿아 치렁치렁한 면으로 된 여러 개의 가는 털이 있다. 손에는 정교하게 세공된 짧은 막대기를 하나 드는데 그것의 끝 부분은 방울뱀의 꼬리로 되어 있어 마치 방울같이 보인다. 그래서 [이런 모든 것으로 인하여 느껴지는] 그 장엄함은 더도 덜도 말고 황제에게 관을 씌우는 교황 같아 보이는데 [이러한 분위기는] 독특하게 만들어진 준비품[의상]으로 하여 생겨나는 엄숙함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착(Chac)들은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위해서 준비한 하얀천을 각각의 머리에다 올려놓는다. 그 아이들에게 나쁜짓이나 죄를 범한 적이 있냐고 물어보고 만일 그러한 것을 저지른 적이 있으면 그것을 고백하게 하고 [이런 아이는] 대열에서 분리시킨다. 제사장은 모두 조용하게 앉아 있으라고 지시를 하고 아이들에게 기도문으로 축복을 내리기 시작하며 엄숙하게 봉으로, 모든 아이들을 가볍게 두드린다. 그의 축복이 끝나고 나서 앉으면 이 축제를 위해서 아이들의 아버지가 선출한 어르신이 가지고 있던 뼈를 들고 일어나서, 모든 아이들의 이마를 9번 두드리는 시늉을 하며 손에 가지고 있던 잔의 물로 그것을 적시고 조용히 이마, 얼굴, 발가락 사이와 손을 문지른다. 이 물은 젖은 카카오와 특정한 꽃으로 정결한 물(Agua virgen)에 녹여서 만드는데 그것들은 나무의 패인 곳이나 산에 있는 바위에서 가지고 온다고 말한다. 이런 문지르는 일이 끝나고 나서 제사장이 일어나서 머리에 있는 하얀 천과 함께 모두의 등에 묶여있던 아름다운 새들의 깃털과 카카오를 치우면 그 모든 것을 착들 중의 한사람이 모으고 제사장은 돌로 된 칼로 머리에 붙여 놓았던 구슬들을 아이들에게서 떼어낸다. 그 뒤를 따라서 제사장의 다른 조수들이 꽃다발과 인디오들이 사용하는 짙은 연기를 내는 도구9)(각주9_ 일종의 향로로 일반적으로 꼬빨(Copal)이라는 나무를 태워 연기를 낸다. 이 향로는 모든 종류의 의식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도구로서 정화의식을 행하는데 사용된다. 우리가 제사를 지낼 때 향 피우는 것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를 가지고 다니면서 각 사내아이들에게 9차례에 걸쳐 두드리는 동작을 하고 나서 꽃의 향기와 연기내는 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마시게 한다. 그러고 나서 참석자들은 어머니들이 준비해가지고 온 음식을 각각의 아이들에게 좋은 술과 함께 조금씩 먹게 하고 나머지 참석자들은 경건한 기원과 함께 그것들을 신에게 바치는데 참석한 아이들 역시 그것들을 신에게 바친다. 아이들은 지혜를 받기를 간청한다. 그들을 도와주던 까욘(Cayon)이라 불리는 다른 관리를 불러 그에게 마실 술을 주는데 그것을 단번에 마신다. 그것은 죄라고 말할 수 있다.10)(각주10_ 단번에 마심으로써 죄를 모두 없애 버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데 죄를 상징하는 음료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마심으로써 죄를 없앤다는 개념이 특이하다.) 그리고 난 다음에 먼저 부모님들과 같이 있던 여자아이들이 해산을 하는데 허리 밑에 묶어 놓았던 줄과 음부근처에 있던 소패각을 치운다. 이렇게 치우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부모들이 원한다면 언제라도 결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자아이들이 해산하고 난 후 부모들이 와서 가지고 왔던 많은 천들을 직접 참석자들과 관리들에게 나누어준다. 이후 한참동안의 식사와 음료를 동반한 축제를 마지막으로 행사가 끝을 맺는다. 이 축제는 “신들의 내림”이라는 뜻을 가진 엠꾸(Emku)라고 불린다. 기본적으로 3일간의 단식과 금욕 후에 행사를 진행하고 의식이 끝나고 난 후에도 9일간의 금욕생활이 더 있는데 약간의 유동성이 있을 수 있다(Landa).
이처럼 성년식은 복잡하고 특별한 행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오늘날의 원주민들도 이와 유사한 행사들을 많이 치르는데 역시 다양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 내용들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외국인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추석 때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전통적이고 의례적인 상징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행사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들에게는 생활의 일부가 되었던 자연스러운 행사들이 다른 문화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원시적인 혹은 의미 없는 행동일 수 있겠지만 그 문화적인 근간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한다면 사회적인 이유와 과정을 통해 만들어져 특정한 기능을 담당하는 행사라는 점을 곧 알게 된다. 즉 우리나라의 제사의식이 가지는 의미가 단순히 유교적인 종교행위라고 보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마야 사람들 역시 이러한 성년식을 통해서 그들 사회에 성인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될 소년소녀들을 받아들이고 축하해 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그들의 독특한 사회문화적인 상징적 요소들과 어우러져 이러한 의식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청장년기
마야의 성인들은 사회를 이끌어 가는 주된 원동력이 된다. 대부분의 정치, 사회적인 결정은 씨족의 어른들이 모여서 회의를 통해 결정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수행하고 실천하는 중심적인 원동력은 청장년이다. 식량생산을 위한 노동에서부터 피라미드를 건축하고 비석을 만들며 천문 관측을 하고 과학에 종사하고 어업, 상업, 제사장의 일까지 일상적인 일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의미의 전쟁 수행 등 모든 마야사회 활동의 중심이 되는 때가 청장년기다.
노년기
앞에서 보아왔던 것처럼 마야사회에서 노인이 가지는 정치·사회적 역할은 실질적, 상징적인 면에서 모두 중요하다. 마야달력에서 260일달력과 365일달력이 모든 경우의 수를 거쳐서 완전히 처음의 날로 돌아오는 데는 260과 365의 최소 공배수에 해당하는 18,980일이 걸리고 이것은 52년에 해당하는 날수가 된다. 즉 우리의 전통달력에서 사용하는 간지(干支)의 경우의 수는 모두 60개이기 때문에 60년 만에 자신이 태어난 날의 간지를 다시 맞는데 이와 같은 개념을 마야에서는 52년 만에 맞게 되는 것이다.11) 즉 마야인은 52살에 마야환갑을 맞는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마야환갑을 지낸 노인은 이미 이 세상의 모든 경우의 수를 경험하였으므로 52년 이후의 삶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런 노인들은 종교적으로 존중을 받는 것은 물론이요, 한 가족의 우두머리로서 정치, 사회적인 중요성 또한 높다. 대부분의 고위 행정이나 마을지도자들은 예외 없이 노인이고 종교사제들도 대부분 노인이다. 비록 행정직을 가지고 있지 않은 노인이라 할지라도 씨족의 우두머리로서 마을위원회에 참여하여 마을의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는데 있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장례
장례절차는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각 사회집단의 독특한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고인(故人)이 저승세계에서 쓸 물건들을 무덤에 같이 묻는 한국의 풍습을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후 세계를 어떠한 형태로든 믿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고 이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신앙심의 특징들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야 사람들의 장례와 관련하여 이들은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고고학적 발굴작업의 결과와 역사 사료들을 종합해 보면 이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후세계를 믿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었을 경우 죽은자의 입에 곡식을 채우고 평소에 사용하던 물건을 함께 그 사람이 살았던 집터에 묻고 자손들이 그곳에 그대로 사는 것이 이들의 관습이었다. 우리나라의 장례 풍습도 내세의 믿음에 따라 죽은 사람의 입에 쌀을 넣는다. 마야 사람들은 옥수수를 비롯한 음식류, 그릇, 생활용구에서부터 저승에 가기 위한 동반자로서 개(犬)를 같이 장사 지내는 경우도 있었다. 개를 죽여 같이 묻는 것은 개가 죽은 사람을 저승세계로 인도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마을의 중요한 일을 하던 사람이나 제사장, 촌장 등은 피라미드와 같은 종교 건축물에 묻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마야의 피라미드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무덤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며 대부분의 무덤은 주거지에 함께 만들어진다.
마야를 정복한 에스빠냐 사람들이 만나게 된 마야 사람들의 죽음과 장례의식에 관련된 풍습은 자신들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현상을 관찰하고 쓴 에스빠냐 사람들의 글에는 마야인들의 풍습을 그들의 문화적 시각으로 이해한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다. 다음의 글은 란다 신부가 쓴 것이다. 여기에서 란다는 마야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과도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가톨릭 사제로서 마야 사람들의 종교적인 민속신앙과 일상생활을 구분하지 못해 모든 행동과 의례 등을 종교적인 연관선상에서 보았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일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지방에 앉지 말라든가 하는 식의 터부와 같은 것들까지도 어떤 면에서 보면 종교적인 행위일 수 있고 이러한 류의 마야 사람들의 행위나 의식 등을 구복(求福)적인 종교행위로 생각한데에서 란다는 자신의 관찰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그 원문을 보기로 하자.
이 사람들은 죽음에 대하여 과도한 공포를 가지고 있어 신에게 봉사하는 모든 것의 목적이 다른 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에게 건강과 생(生)과 양식을 줄 것을 기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맞게 되면 슬픔을 못 이겨 눈물로 지새며 장사를 치른다. 낮에는 조용히 울고 밤에는 소리 높여 우는데 괴로움의 고통소리를 듣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커다란 슬픔으로 여러 날을 보낸다. 장례기간 동안에는 금욕을 하는데 특별히 부부관계를 금한다. 사람들은 죽는 것을 가리켜 악마가 그를 데리고 갔다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나쁜 것들이 다가온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시신의 입에 꼬옘(Koyem)이라 불리는 갈은 옥수수를 채워서 수의를 입히는데 그것은 그의 사후음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돈으로 사용되는 돌을 같이 넣는데 모든 이런 행위는 죽은 자가 저승에서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Landa).
마야 사람들의 보수성
마야의 원주민들이 보수적이라는 점은 누구나 공히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 아닌가 한다. 500여년 전에 시작된 식민지의 역사가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그들의 언어를 고집하고 있는 점이라든가, 생활도구로서 당시의 옷감, 도자기 등을 그대로 만들어 사용하는 것, 심지어는 옷에 붙이는 자수의 형태와 위치까지도 당시의 풍습을 그대로 고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단순히 외형적인 면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종교, 사회, 경제, 정치의 다양한 면에서 이들의 보수적인 양상은 두드러진다. 그리고 이러한 점들은 고대 마야의 생활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너무나도 귀중한 산 자료가 되고 있다. 500여 년 이전의 마야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오늘을 사는 마야 사람들을 통해서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문명의 영향은 이들의 보수적인 성향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작은 마야마을의 유일한 구멍가게에서 가장 잘 팔리는 것이 뭐니해도 콜라인 것을 보면 말이다. 그야말로 콜라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현대 경제사회체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현대화의 파급효과는 시간과 경제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나라가 여유가 있어 각 마을에 전기가 들어가고 각 가정에 돈이 있다면 콜라와 마찬가지로 텔레비전과 냉장고의 보급은 시간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이들이 이제까지 전통을 고집하였던 것도 이러한 경제적인 면에 기인한 부분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통을 지키려는 성향 또한 강해서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로 이들이 수백년전의 생활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 설명하기는 힘들다는 점을 이미 앞에서 이야기 하였다. 다시 말해 기본적으로 그들의 심리적인 환경 속에 나타나는 보수적인 양상은 그렇게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시대에 맞추어 변화해 나갈 것이다. 우리나라가 유교적인 농촌중심의 사회를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많은 유교적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는 도시생활을 하는 혹은, 현대화된 원주민 마을에 사는 마야인들의 생활 모습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현대화된 생활환경 속에서도 전통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 우리처럼 현대화의 물결이 강한 도시에 사는 마야 원주민들도 도시화에 따른 변화는 물론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의 전통을 유지하는 성향이 강하고 우리는 이를 가리켜 마야인들은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다 혹은 전통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는 식의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향과 그 성향이 만들어내는 삶의 모습들이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마야인들 개개의 생애와 그들의 사회적 요소들 전반에 걸쳐 조화롭게 공유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