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마치며... 총정리

 

벌써 글의 마지막 장이 되었군요. 이 책 전체의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라고 하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다양한 대답이 가능하겠죠. 그런데 여기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자문자답을 할 수밖에 없네요.

1492년의 사건에 대해 참 많이 말했습니다.

왜 그랬지요?

1492년의 사건이 출발점이라고 했습니다.

뭐의 출발점이죠?

당연히 오늘날 라틴아메리카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모순, 갈등, 해결책이 이 사건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1492년이란 말 자체가 상징적인 것이지만요. 그렇다면 무엇을 상징하나요? 불평등을, 그리고 그러한 불평등에 따른 사회의 수직 구조, 경제적인 착취, 정치적인 부당함, 문화적인 이질성. 이러한 것들이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이고, 해결하지 못하는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러한 것의 출발점이 1492년입니다.

유럽인들이 들어오면서 좋고, 똑똑하고, 멋있고, 바르고, 합리적이고, 긍정적인 서양인과 나쁘고, 우둔하고, 못생기고, 그릇되고, 부정적인 원주민이라는 수직적인 관계가 맺어졌습니다. 그리고 그사이의 갈등이 바로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림 그려 넣기: 똑똑하고, 멋있고, 바르고, 합리적이고, 긍정적인 서양인과 나쁘고, 우둔하고, 못생기고, 그릇되고, 부정적인 원주민

라틴아메리카의 경우, 사람 위에 사람이 있어 왔고, 사람 밑에 사람이 있어 왔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나 서양이나 다 비슷했지요. 라틴아메리카의 500여 년의 역사는 형태가 조금 바뀌기는 했지만 인종에 따른 인간 가치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밑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지만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살다 보니 착취로 인해 굶어 죽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

우리가 가끔 이국적으로 접하는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에 대한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들은 전통을 사랑하여 고수하며 오늘날까지 그 맥락을 이어온다 생각합니다. 원시적인 도구로 물건을 만들고 사냥을 하는 아마존의 원주민이나 마야의 원주민들을 소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원주민들이 말이지요.

돈이 있으면 그렇게 살 사람 정말 몇 명 없습니다.

돈이 없으니까 옛날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차 타면 10분이면 갈 곳을 전통이 좋다면서 짚신 신고 두세 시간씩 걸어 다닐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믹서기가 있으면 1분이면 할 일을 절구에다 놓고 한 시간씩 빻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물론 요즈음 웰빙이니 자연주의니 뭐니 해서 이러한 개념에 혼란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굳이 여기에서 부연할 필요는 없겠지요. 이들은 500년 전의 생활 모습과 거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디지털 시대니 메타버스가 어떻니 하며 떠들고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를 이야기 하지만 라틴아메리카 30~40% 이상의 인구는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달라진 것이 없는 생활을, 그야말로 돈이 없어서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사실 500년 전보다 상태가 훨씬 나빠졌습니다. 그때는 그래도 굶어 죽는 일도 지금보다 적었고, 상대적인 극빈 상태도 적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라틴아메리카는 500년 전과 비교하여 발전은 고사하고 생존권마저 위협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총 들고 칼 들고 혁명을 안 하겠다고 하는 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혁명이니 게릴라니 하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거부감부터 느낍니다. 그런데 가서 한번 보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멕시코시티에서 구걸을 하다 길바닥에서 자는 원주민들이 수도 없습니다. 이상 기온으로 날씨가 추워지면 죽는 사람들도 속출합니다. 그런 노숙자 중에 백인이 하나라도 있는 줄 아십니까. 모두 원주민이거나 혼혈입니다.

1492년은 지독히도 라틴아메리카의 운명을 따라다녔습니다. 500년 동안 그렇게 살았습니다. 참으로 모순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여기에 라틴아메리카의 한이 있고, 깊이가 있고, 문학이 있고, 그들의 다른 세상이 존재합니다.

 

1492년의 사건이 식민지 시대라는 공고화 과정을 거칩니다. 1800년대 초에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지역이 독립하게 되지만 그 과정은 민중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위에 계신 지체 높으신 어른들의 내분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에스빠냐에 사는 에스빠냐사람과 아메리카 대륙에 뿌리를 둔 에스빠냐사람의 갈등에 불과합니다. 이게 독립입니다. 별게 없습니다.

더욱더 부정적인 변화는 독립 이후에 찾아왔습니다. 19세기 혼란의 과정에서 서양식 모델을 쫓았던 상류 계층이 원주민에 대한 혐오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민중들의 삶은 더욱 악화되었고, 서양의 가치 앞에 라틴아메리카의 가치라고 할 수 있는 혼혈의 문화나 원주민의 독특함은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굶어 죽는 현실은 더욱 참혹해 집니다. 이러한 결과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다양한 방식의 민중 저항으로 나타납니다.

멕시코 혁명, 에비따, 쿠바 혁명, 니카라과 혁명, 칠레의 사회주의 실험, 파나마의 저항 등을 통해서 천형과도 같은 그들의 모순을 극복하고 인간답게 살아보자고 꿈틀대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실패하였습니다. 이때 미국이 바로 옆에 있습니다. 너무나도 가까워서 깊은 이해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그들이 마수를 뻗칩니다. 양키의 막대한 군사, 경제력 앞에 힘없는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너무나도 왜소했습니다.

이도 저도 안 되니 신자유주의라도 받아들여 봤습니다. 1980년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나라가 잘 살면, 부자들이 더 잘 살면 떡고물이라고 좀 더 떨어지겠지 하는 생각이 신자유주의 환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참혹한 결과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구 선진국의 자본은 자신들의 뱃속을 불리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어도 내 입에 초콜릿 단맛을 느끼는 것이 훨씬 큰 기쁨이지요. 그게 자본의, 신자유주의의 속성입니다. 또 다른 희생이 따랐습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휘몰이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1492년의 사건이 만든 모순이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속에서 굳건히 유지되었는지를 보았습니다. 잘 사는 백인과 못 사는 민중의 관계가 굳어져 왔는가를 보았지요. 이것이 라틴아메리카 역사의 부정할 수 없는 중심입니다.

 

오늘날의 첨예한 현안들을 좀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면 이러한 역사의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 대한민국의 문제점을 일제 식민지 시대의 문제와 그 이후 친일파의 재집권 과정으로 바라보는 것과 유사한 것입니다.

무엇을 역사의 가장 중요한 맥락으로 볼 것인가, 어떤 시각으로 역사를 이해할 것인가, 오늘날의 문제점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것이 하나의 세트이고, 따지고 보면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역사 인식의 차이로 나타나는 것이고, 역사 인식의 차이가 오늘날의 문제점을 치료하는 방법의 차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의 시각대로라면 오늘날 라틴아메리카 발전의 전제는 국민 통합이고, 이는 불평등하고 부당한 민중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삶의 질을 끌어올려 바르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사회주의식의 해법이라서 편협하고 일방적이라는 지적을 받습니다. 그러나 성장보다 분배라는 것은 이미 당연한 얘기가 된 지 오래고, 분배는 부당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당한 간섭을 극복해야 합니다. 기득권의 권력, 경제력 집중의 관성을 극복해야 합니다. 미국 극복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1492년을 극복하는 것 아닙니까. 그 당시의 부당함을 바로잡는 것이지요. 이러한 맥락으로 라틴아메리카를 설명해 보았습니다.

 

라틴아메리카에 대해 좀 더 공부하고 싶은 분을 위해 말씀드립니다. 발달한 인터넷을 통해 중남미 뉴스들을 따로 볼 수도 있습니다. 현지 미디어 매체들도 번역 서비스를 이용하면 그럭저럭 이해할 만합니다. 한 사건에 대한 발단과 전개 그리고 그 사후 처리 과정 등을 지금 공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살펴보면 필자의 생각에 동의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 하는 나름의 시각이 생기면서 흐름에 관한 판단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지요. 볼리비아에서 천연가스 수출과 관련하여 정국이 혼란한 적이 있습니다. 민중들은 천연가스 수출을 반대했습니다. 수출하더라도 외국 세력의 독점과 착취라는 단물 빨아먹기식은 안 된다, 그러니 원재료 값이나 지분 등을 올려 자국의 경제를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이죠. 반면 우파는 하루라도 빨리 국가의 경제 개발을 위해 외국 자본을 유치하여 수익을 올리자는 것입니다. 민중들은 외국 기업의 약속을 믿지 않습니다. 몇백 년간 그런 식으로 외국 자본이 들어왔어도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 없, 그러니 이제 다시 속지 않겠다고 외치는 겁니. 우파는 우파대로 불만이 있습니다. 민중이 소외된 상태에서 국가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중남미 협력 모색의 발판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원을 적극적으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 이번에는 그런 것이 아니니 좀 믿어 달라, 그거 외에는 달리 경제를 발전시킬 길이 없다는 것을 당신들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 …. 그렇지만 민중들은 막무가내죠. 거짓말 마라, 그렇게 속아온 것이 500년이다. 전에 포토시Potosi광산(볼리비아에 있는 식민지 시대 세계 최대의 은광) 개발할 때도 그랬고 항상 그래왔다. 독립 이후에도 외국 자본 들여와서 지금과 똑같은 말 하고 우리 자원 다 바닥냈다. 그리고 우리는 요 모양 요 꼴로 못살고 있다. 우리는 더는 속지 않을 거다. 그런 행위를 이제는 더 묵고 할 수 없다.... 그래서 21세기를 시작하며 볼리비아는 좌파를 선택했습니다. 과연 그들은 외국 매판 자본 없이 국가 발전을 이룰 수 있을까요? 국민은 어디까지를 만족할 정도의 발전이라고 생각할까요? 이러한 식으로 중남미의 현안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그야말로 역사의 흐름과 분위기가 들어오기 시작할 겁니다. 꾸준한 관심과 흥미를 가져주시기 바랍니.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꼭 한 번 따지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반미에 관한 것입니다. 용어 자체가 좀 과격하지요.^^ 제 글의 스타일이 좀 그렇기도 하지만 다른 점잖은 표현보다 가장 현실감 있는 단어가 아닐까 합니다. ‘반미’. 20세기의 라틴아메리카를 말아먹은 것이 미국이다, 그러니까 반미를 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많은 부분 공감하지만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아니, 이제 와서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요? 여태까지 미국 놈은 다 죽일 놈들이라고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만 갑자기 반미가 마음에 안 든다니, 비겁해도 이만저만 비겁한 게 아니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가 미국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힘이 있었다면 그들과 똑같이 안 했겠습니까? 우리 스스로 솔직히 질문해봅시다. 자신 있습니까. 혹시 우리의 죄와 욕심을 가리기 위한 대리 희생양 삼기로 반미를 하는 건 아닌지 신중하고 겸허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종 차별은 한국 내에서 일하는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리고 중남미와의 관계에서는 현지 주재 한국 기업체의 경영 사례를 통해 많이 지적되었습니다. 미국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었다고 말하면 많은 분들이 저에게 항의하실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도 미국의 입장이었다면 만만치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힘듭니다. 최소한 라틴아메리카에 진출해 있는 한국 기업체의 사례를 보면 그렇습니다. 우리나라도 제국주의적인 매판 자본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미국만을 나쁘다고 하기가 영 찜찜합니다. 미국의 행위는 분명히 잘못되고 그런 일이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만약 그러한 결과가 우리의 잇속을 챙기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을 수수방관하거나 나서서 한몫 거들지는 않을까요? 앞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을까요?

반미, 좋습니다. 그러나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필자는 대놓고 반미 하는 것이 찜찜합니다.

충분한 비판과 이해를 한 후의 반미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반미의 문제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모든 미국인을 다 나무랄 것인가? 미국에서도 흑인과 같이 기득권의 그림자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사회 바닥층을 형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쟁의 총알받이로 이용되는 등 미국이 행한 제국주의 침략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들까지 싸잡아 욕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미국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 모두의 책임인가? 앞에서 말한 대로 우리 스스로에 대한 반성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합니다. 미국으로 대표되는 세계 질서가 만들어 놓은 문제에 우리도 큰 몫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지면을 통해서 세계 평화를 논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럴 목적으로 쓴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결론에 대신하여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원칙적이고 긍정적인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해보라고 한다면, “라틴아메리카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없어질 때 진정한 평화가 올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백인이나 혼혈이나 원주민이나 서로 더 편하고 안전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이는 기득권의 양보나 파괴를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1492년이 만들어 놓은 짐을 벗어 던져야 라틴아메리카에 진정한 평화가 올 것이요, 그래야만 경제도 발전하고 정치도 안정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는 비단 라틴아메리카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고 세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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