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하나: 중요 연대

1838년 니카라과 독립

1912~ 1933년 니카라과에 미국 해병대 주둔

1926년 산디노Augusto César Sandino의 반미 투쟁

1934년 친미 소모사Anastasio Somoza García가 산디노 암살

1937년 소모사 대통령 집권

1957년 소모사의 첫째 아들 루이스 소모사Luis Somoza Debayle 집권

1962년 반 소모사 혁명 단체인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FSLN 결성

1967년 소모사의 둘째 아들 아나스따시오 소모사Anastasio Somoza Debayle 집권

1978년 민중 총 봉기로 소모사 정권 몰락

1981년 미국이 본격적인 반 니카라과 경제 및 군사 조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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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빨갱이도 아닌데 ... 억울해요

이번 장에서는 니카라과의 식민지 모순 극복의 과정과 좌절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라틴아메리카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답답한 것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사실 어디 라틴아메리카뿐이겠습니까, 우리나라의 역사만 봐도 절절하고 안타까운 대목이 끝이 없습니다. 현실의 모순과 부정의를 극복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는데도 그 결과가 참으로 억울하게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로봇 태권브이에 나오는 정의로운 세상을 현실에서 발견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는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유럽인들의 침략에서 시작된 불평등과 이에 따른 끊임없는 착취의 악순환 구조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쿠바 이외에,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보겠다는 여러 노력과 투쟁이 모두 수포로 돌아갑니다. 쿠바 혁명처럼 시원하고 속이 확 트이는 그런 이야기가 별로 많지 않군요. 이번 장에서 살펴보게 될 니카라과에서도 역시 이러한 역사가 다른 형태로 거듭됩니다.

그런데 왜 이런 똑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거냐고요? 그때그때 다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메시지와 다른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즉 실패한 나라가 다양하고, 원인이 다양하니 그 교훈도 다양한 것이지요. 앞 장에서 살펴본 칠레의 경우는 공산당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공산당과 관계가 먼 데도 미국이 또 자기 마음대로 정권을 세우고 무너뜨립니다. 즉 미국의 개입은 이데올로기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점을 이곳 니카라과의 예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안들면, 자기 이익에 부합되지 않으면 그게 공산당이건 아니 건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일단, 공산당 하면 무조건 거부감이 들지 않나요? 새빨간 얼굴에 꼬리 두어 개 달리고, 뿔도 몇 개 솟은 괴물 같은 존재가 빨갱이 아닌가요? 필자가 반공, 승공, 멸공 뭐 그런 단어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듣던 세대이다 보니 공산주의에 대한 본능에 가까운 기막힌 이미지가 존재합니다. 물론 북한이 60년대 70년대, 그러니까 필자가 반공 포스터 그리던 시대에는 우리보다 잘살았었다는 사실을 안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학교에서는 북한 어린이들이 모두 굶어 죽어가고 있다고 가르쳤지요. 그런 거짓말을 필자와 같이 순진한(?) 어린이에게 가르친 것이 부끄럽지도 않나 봅니다. 안 그렇습니까? 필자처럼 빨갱이 기질이 있는 사람이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공산주의가 그렇게 나쁜 건가요?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온전히 알기나 하고, 이해나 하고 비판하는 건가요? 사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다른 것인데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다 똑같은 것으로 치부하고 빨갱이로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북유럽 쪽에 빨갱이 아닌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야기가 엉뚱한 데로 흘렀네요. 우리나라 얘기는 이 정도로 하고, 중남미 문제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보지요. 우리만 공산당 하면 얼굴이 빨간 돌연변이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빨갱이라고 하면 미국도 거품 물고 경기를 합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반공 이데올로기는 미국의 답습이나 아류인 면이 많습니다. 유명한 메카시즘McCarthyism 같은 것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니 남미의 빨갱이 대통령인 아옌데를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칠레의 경우는 빨갱이니까 미국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 보자구요. 빨갱이는 일단 다 나쁜 놈들이니까요(?). 그런데 니카라과의 경우는 빨갱이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훨씬 중립적이고 보수적인 성격을 지향했습니다. 그런데도 미국은 니카라과 민주 정부를 무너뜨리려는 반정부군인 꼰뜨라Contra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죠. 무슨 이야기인지 어리둥절하시죠? ! 하나하나 차분히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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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아메리카 교통의 중심지 니카라과

니카라과의 역사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는 이야기가 결코 과장이 아닐 정도로 흥미진진한 우여곡절로 이어집니다. 미국과의 그 질긴 악연…… 내란의 연속…… 경제 쇠퇴……. 뭐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민중들의 자생적 민주화 열기가 국가를 이끌어 가는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고 있지만 결국은 독재와 외세라는 두 가지 한계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중남미 국가의 현실이 니카라과의 역사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니카라과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교통 중심지이자 중미에서 가장 넓은 나라입니다. 다른 나라가 들으면 기분 나쁠지 모르지만, 주변 지역에서는 가장 크고 중요한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미의 다른 작은 고만고만한 나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정치, 경제 문화적인 면 등에서 의미가 큰 나라입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뭐니 뭐니해도 아메리카 대륙의 교통 중심지였다는 점에서 시작됩니다. 미국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서부 개척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말 두 마리가 끄는 커다란 왜건Wagon이라고 불리는 마차를 타고 미국의 동부에서 서부로 미국 개척자들이 이동하는 장면이 떠오르시나요? 중간에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나타나 화살을 쏘거나 하면서 선량한(?) 사람들을 죽이는 장면도 있고, 그러다가 곧 미국의 기병대가 출동해서 그런 나쁜 짓을 하는 인디언들을 처단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말 나온 김에 잠깐 언급을 하고 지나가자면 사실상 인디언들이 잔인한게 아니고 미국인들이 더 잔인했습니다. 그것도 몇십 배 몇백 배 더. 미국 백인들이 죽인 인디언들의 숫자나 그 잔혹함이 인디언의 그것과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유럽에서 온 사람들은 원주민들을 그들이 원래 사는 땅에서 내쫓고 집단학살을 하거나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집단이주를 시키는 등의 만행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19세기 초에 걸쳐 300만 명의 인디언들을 학살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인디언들의 머리 가죽을 벗겨 팔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의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했습니다. 인디언들의 모습은 잔인하고 미국 사람들의 모습은 멋있게 그려지는 승자의 역사가 만든 이미지가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하여간 모든 개척자들이 말을 타고 서부로 간 것이 아니라는 말을 먼저 하겠습니다. 실질적으로 서부 개척에 참여한 미국인들의 상당수는 미국의 뉴욕이나 뉴올리언스 같은 곳에서 배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 교통의 중심지인 니카라과를 거쳐 서부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니카라과는 중요한 교통과 상업의 요충지로 성장하게 됩니다. 당연히 문화와 예술 등도 발전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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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미국의 뒷마당

이렇게 니카라과는 교통의 요지로써 활발하게 개방적인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와 문화를 외부로부터 받아들이게 됩니다. 중요한 장소라는 특수성, 외부 문화에 대한 개방성 이 외세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요소가 됩니다. 미국의 영향력도 증가하게 됩니다. 1856년에는 워커라는 미국인이 군대를 끌고 가 니카라과를 점령하고 스스로 대통령을 할 정도입니다. 즉 처음부터 니카라과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좌지우지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니카라과가 그렇게 참담한 정치 수준을 가지고 있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나름 민주적 전통이 빛나는 곳입니다. 멕시코와 중미 국가들이 에스빠냐로부터 독립을 하면서 니카라과는 중미연합 국가에 잠시 참여했다가 독자적으로 독립을 선언하게 되는데, 그렇게 최초의 국가 정체성 성립과정에서 그라나다Granada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 세력과 레온León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 세력이 갈등을 겪습니다. 이 두 도시는 지금까지도 니카라과에서 가장 중요한 전통을 가진 두 개의 도시로 남아있을 정도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1858년에는 결국 이 두 도시의 중간인 마나구아Managua에 수도를 건설하게 되는데 이렇게 오늘날까지 니카라과의 수도가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민주적인 합의 가 결실은 거둔 것이지요. 일찍부터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한 니카라과는 다양한 외부 문물에 대한 유입이 빨라 개방적이고 발전된 정치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하나의 통합된 마나구아라는 도시를 건설할 정도로 성숙한 정치적 합의의 전통을 만든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성숙한 전통을 바탕으로 미국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보수와 진보의 정치가 어느 정도 조화를 이뤄갑니다.

그러나 역시 관건은 미국입니다. 1900년을 즈음하여 반미주의가 득세하게 되자 미국은 반정부 세력을 지원하게 됩니다. 반정부 시위에 참가한 미국인의 체포를 계기로 미국이 군사 개입을 하여 니카라과 정부의 친미 반란군 진압을 가로막게 됩니다. 이때부터 이미 미국은 힘 있는 나라로 성장하여 아메리카 대륙의 구석구석을 자신의 입맛대로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니카라과라고 하는 중요한 곳을 반미 세력에게 그냥 넘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지요. 결국 이러한 미국의 정치적인 압력과 군사적인 개입은 국내 정치를 바꿔놓게 됩니다. 1912년 친미 보수파인 아돌포 디아스Adolfo Díaz Recinos가 대통령이 되면서 미군이 니카라과에 아예 상주하게 되는데 이것이 이후 20여 년간 유지됩니다.

미국은 그렇게 미군을 상주시키면서 확실하게 친미 정권을 닦아놓게 됩니다. 미군은 1933년에 가서야 니카라과 땅에서 철수합니다. 중간에 약간의 공백 기간이 있었습니다. 1925년에 미국 해병대가 잠시 철수한 적이 있는데 이때 니카라과의 친미 보수파는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런 상황을 놔두고 볼 수 없었던 미국은 1927년 다시 2천 명의 해병대를 파견함으로써 아예 반미 정권이 못 들어서도록 전통을 공고히 합니다.

이렇게 미국이 확고하게 니카라과의 정치와 사회를 자기 입맛대로 쥐락펴락하다 보니 불만이 터져 나옵니다. “우리가 무슨 미국의 식민지냐!”, “Yankee Go Home!” 선봉ㅇ 서서 이렇게 외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니카라과 역사의 최대 영웅 산디노Augusto César Sandino입니다.

그는 주권을 가진 국가로서 친미 세력이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대다수 사람들이 굶주리다 죽어 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비판하며 미국으로부터의 진정한 독립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반대 세력을 용납하지 않는 당시의 상황에 게릴라 운동으로 맞선 산디노는 1933년 정부 측과 협상 도중 미국의 지원을 받는 당시 국경 경비대장인 아나스따시오 소모사Anastasio Somoza García에게 암살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니카라과는 암흑의 시대를 맞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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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다섯: 독재자 소모사의 시대.

니카라과의 근현대사를 살펴보면 역사상 한 시대로 묶는 1937년부터 1979년의 42년의 긴 세월이 한 가지 색깔로 칠해져 있습니다. 바로 소모사 정권이라는 독재 정권 기간입니다. 원래 소모사는 산디노라는 니카라과의 영웅을 암살한 흉악한 인간이었습니다. 산디노는 미국의 해병대가 지배하던 니카라과를 미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투쟁한 사람이지요. 그러니까 민족의 영웅을 암살한 산디노가 정권을 잡은 것이 1937년의 일이고, 이후 그에 이어서 그의 두 아들에 걸친 2대 동안의 군사 독재가 1979년까지 40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민주 세력을 암살하고 군사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아버지가 대통령의 기반을 닦고 이어서 그의 맏아들인 루이스 소모사 데바일레Luis Somoza Debayle, 그리고 이어서 둘째 아들인 아나스따시오 소모사Anastasio Somoza Debayle가 대통령을 하였으니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대단한 집안의 대단한 정치가 그리고 대단한 니카라과가 탄생한 것입니다. 갑자기 우리나라의 박 뭐시기라는 사람과 그 딸과 친인척이 42년간 우리나라를 통치하고 있다면 어떨까 하는 끔찍한 상상이 듭니다. 하여간 니카라과가 이런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중남미가 고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식민지의 정치, 경제, 사회 전통의 배경에 더하여 한 가족이 40여 년간 미국의 비호를 받으며 정권을 잡았으니 어땠겠습니까? 권력 집중, 억압, 부패, 경제 편중 현상 등 그야말로 독재의 전형적인 폐단이 여실히 드러났겠죠. 정권 주변의 기득권 세력은 공고해지고 민중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졌습니다.

에피소드가 참 많았습니다. 니카라과 사람 1만 명 이상이 죽는 지진이 났을 때 소모사의 권력 유지를 담당하던 군인과 경찰들이 직접 나서서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도시의 재건에도 소모사 일족이 경영하는 회사가 재건을 담당하는 등 권력에 빌붙어 있는 세력들을 위한 권력 집중과 이에 따르는 피해는 날로 심해졌습니다. 이를 보다 못해 들고 일어난 것이 이른바 산디니즘Sandinismo이라고 부르는 니카라과 혁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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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여섯: “소모사는 우리 개새끼(... our son of a bitch.)”

소모사와 관련된 어록을 몇 개 소개합니다. 한나라를 한 집안이, 중세시대도 아니고, 그것도 20세기에, 42년간 통치를 하다 보니 에피소드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내용을 보면 서글프고 기가 막힌 것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Plata para los amigos, palo para los indiferentes, plomo para los enemigos.

친구에게는 돈(Plata), 무관심한 놈에게는 몽둥이(Palo), 적에게는 총알(Plomo).

 

에스빠냐어의 P로 시작하는 단어의 라임으로 만든 아주 멋진(?) 말이군요. 소모사의 공포 정치를 잘 보여줍니다.

 

Darle democracia a Nicaragua es como darle chile a un niño

니카라과에 민주주의를 주는 것은 어린아이에게 고추를 주는 것과 같다.

 

아레의 문구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고 떠도는 이야기입니다만 충분히 그럴 만하여 세상에 돌아다니는 것이라 여겨져 여기에 옮깁니다. 소모사가 집권하던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가 한 말이랍니다.:

 

Somoza may be a son of a bitch, but he's our son of a bitch.

소모사는 개새끼일 수도 있지. 하지만 그는 우리의 개새끼야.

 

이런 이야기 들을 통해서 당시 니카라과라고 하는 나라에 혁명이 안 일어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의 상황이었다는 것을 느껴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음 꼭지는 이제 혁명 이야기를 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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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일곱: 투쟁의 깃발이 오르다.

니카라과 국민들의 반소모사, 반독재 투쟁은 소모사가 산디노를 죽이고 독재를 하는 순간 이미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산디노주의라는 뜻의 산디니스모Sandinismo 혹은 산디니즘Sandinism란 단어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것이지요. 이들은 FSLN(Frente Sandinista de Liberación Nacional)이라는 이름으로 뭉쳐서 투쟁을 전개합니다. 중간에 그리고 이러한 투쟁의 흐름을 바꿀 중요한 전환점이 1978110일 발생합니다.

뻬드로 호아낀 차모로Pedro Joaquín Chamorro라는 사람은 자신이 경영하는 라 쁘렌사La Prensa라는 신문에 소모사 정권이 달가워하지 않을 만한 기사들을 써대기 시작합니다. 반소모사 운동을 주동하는 대학생들의 인터뷰 기사도 라 쁘렌사의 지면에 실립니다. 소모사와 그의 패거리들은 이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었겠죠.

전날 어머니의 생일파티를 하고 돌아온 차모로는 110일 아침 8, 불과 보름 전에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새로 산 자동차를 몰고 자신의 직장인 신문사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수도 마나구아의 변두리를 지나가고 있었지요. 뒤따르던 자동차에 자신을 노리는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815분 그의 차 옆에 멈춰선 괴한의 차에서 총격이 가해집니다. 그의 자동차는 전신주를 들이받고 멈춰 섰고, 그날 오후 그가 일하던 라 쁘렌사 신문의 일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립니다.

 

그가 암살되다! 니카라과 전 국토에 그의 피가 튀겼다!

¡Mandaron a asesinarlo! y Su sangre salpica a toda Nicaragua!

 

이 사건을 계기로 니카라과는 반소모사 투쟁의 깃발 아래 결집합니다. 이때를 계기로 다양한 반 소모사 투쟁이 FSLN이라는 이름으로 뭉치게 되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는 이러한 이념을 산디니스모Sandinsmo 혹은 산디노주의자 라는 뜻의 산디니스타Sandinista 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각 지역에서 연대 혹은 개별적으로 게릴라 활동을 하며 수도를 향해 압박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차모로가 죽고 일 년 반이 지난 1979720일 소모사 타도를 외치던 산니니스모 병사들이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구아에 입성합니다.

제가 처음 니카라과에 갔을 때, 그러니까 1993년으로 기억합니다. 아직도 전후 복구가 충분치 못해 온통 폐허에, 경제 사정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버스도 변변치 않고, 또 필자가 히치하이킹으로 여행을 다니기 때문에 픽업 화물차의 짐 칸에서 니카라과 사람들과 같이 가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국에서 왔다는 신기한 외국인이 니카라과 혁명에 대하여 꼬치꼬치 묻는 것이 신기했는지 혁명의 분위기를 알고 싶어 하는 필자를 뚫어질 듯 쳐다보던 한 사람이 자신의 다리를 허벅지까지 걷어 붙이고는 깊은 흉터를 보여주었습니다. 당시에 자신이 입은 총상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던 아저씨가 생각나는군요. 그렇게 니카라과는 민주주의와 국민들의 생존권을 위해 총인구 4백만 중 3만 명이 사망하고 50만 호의 가옥이 파괴되는 희생을 거치며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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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여덟: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가히 자랑스러울 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독립 투쟁을 떠올리면 될 것 같습니다. 독재에 대항하여 정의의 투쟁을 한 니카라과 국민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혁명과는 달리 니카라과 국민은 혁명 이후의 처리를 가장 현실적으로 해나갔습니다. 혁명에 성공하고도 보수 세력에까지 화해의 손을 내밀어 그들을 끌어안습니다. 좌와 우를 어우르는 중립 내각을 구성하였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서도 화합 정책을 폈습니다. 한마디로 빨갱이를 안 했단 말입니다.

국민 통합을 끌어내며 출범한 1980년의 정권이 내세운 국가의 기본 원칙이 이러한 점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치 다원주의, 혼합 경제 질서, 비동맹 외교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정책 표방은 혁명 이후 니카라과 정부의 성격과 방향, 즉 국가의 모델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쿠바나 칠레처럼 빨갱이 정권 안 만들겠으며(정치 다원주의), 외국 자본도 관대하게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혼합 경제 질서) 미국을 비롯한 어떤 나라와도 친하게 지내겠다는(비동맹 외교) 의사 표시입니다. 혁명 지도자로 대통령이 된 오르떼가가 나중에 미국 포드Ford사의 무스탕Mustang 오픈카를 타고 선거 유세를 다니기도 합니다. 자본의 상징, 미국 멋쟁이의 상징으로, 미국에서 만든 미국의 자본의 표상인 스포츠카를 타고 연호하는 국민들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우리가 만들 정부는 반미도 아니고 반자본도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혁명이라는 고달픈 과정을 거쳐 탄생한 정부는 그들이 벌였던 투쟁의 목표를 하나씩 실천해 나갑니다. 1979년 당시 50%에 달하던 문맹률이 2년 만에 13%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뿐만 아니라 보건 복지 기반을 확충하여 어린이들의 백신 접종을 시행하고 보건교육을 실시하여 유아사망률을 극적으로 낮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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