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게 봐 보자.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문화의 차이를 우등과 열등으로, 야만과 문명으로 나누고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은 열등한 야만인으로, 그리고 서양과 한국 사람들은 우등한 문명인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행복 지수에서 보는 것처럼 어떤 것이 우등하고 어떤 것이 열등한 것인지에 대한 기준은 애매합니다. 우리가 만원을 받는데 그들은 중남미 국적을 가진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500원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을 한 차원 낮게 보고 업신여기는 분위기입니다. 라틴아메리카에 진출해 있는 한국 기업들의 노사 관계를 통해 우리가 현실에서 많이 접하는 문화 접촉 현상에서 그러한 점들을 관찰해 보았습니다.

문화에서 열등과 우등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동의하시나요?^^ ~~ 야만과 문명을 나누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차별이야말로 가장 야만스럽고 비문명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차등의 역사가 엄연히 존재했고, 지금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우리는 싫든 좋든 그것들을 접하게 되고, 의식 무의식으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차등의 배경에 서양 사람들의 패권주의, 식민지주의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와 배경으로 형성된 이미지를 고정관념으로 갖고 우리와 라틴아메리카와의 만남에서 서양의 가치관을 그대로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큰 벽을 마주하게 됩니다. 두 가지 면에서 큰 손실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 라틴아메리카와의 경제 협력 관계에서 동반자가 아닌 침략자 분위기를 가지고 간다면 우리로서는 백전백패할 것입니다.

두 번째, 인류사적인 측면에서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긍정적인 면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무엇이든 부정적으로 바라봄으로써 그들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어쭙잖은 서양의 식민주의 역사관과 가치관을 답습하는 것은 그야말로 꼴불견일 뿐만 아니라 부당하며 우리에게 이득이 되는 것도 하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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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 자는 나라의 루벤과 로사

중남미에 가면 그 행정의 느려터짐과 불합리함에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낮잠 자는 문화인 시에스따Siesta도 그중 하나입니다. 보통 현지에서 일을 보려면 아침 10시에서 오후 1시까지가 가장 확실한 시간입니다. 왜냐고요? 보통 1시에 시작되는 점심시간이 하늘이 두 쪽 나도 4~5시까지는 이어지니까요. 밥 먹고 한숨 자고……. 그리고 적당히 귀찮으면 하루의 일과 땡!

그런데 한국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들 그러니까 못 살지. 게으른 놈들…….” 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꼭 그럴까요.

필자가 살던 동네에는 길거리에서 자동차를 고치는 루벤Ruben이라는 정비공이 있었어요. 그는 차 안에서 먹고 자며 무허가 정비를 하지만 기술이 좋아 제법 벌이가 짭짤했죠. 근데 마흔이 넘은 이 노총각에게 장미라는 뜻을 가진 로사Rosa라는 이름을 가진 애인이 있었어요. 그 커플은 주말이면 휴양 도시인 아까뿔꼬Acapulco, 꾸에르나바까Cuernavaca로 열심히 놀러 다니며 1주일 동안 번 돈을 남기지 않고 다 쓰고 돌아옵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터라 지방 축제에 초대를 받아 같이 놀러 갔는데, 거기에서 정말 무허가 정비공치곤 너무 돈을 잘 쓰는 거예요. 저야 물론 좋았죠……^^ 아무튼 돌아오는 길에 필자는 친근한 마음으로 루벤에게 진심어린 충고(?)를 잊지 않았어요. 무슨 말을 했는지 한국 사람이라면 대강 짐작하시겠죠?

저축해라, 낭비하지 말아라, 미래를 생각해야지... ” 등등. 필자가 건방지게 우쭐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했다는 건 안 봐도 다들 아시겠죠, ……. 저의 그 근거 없는 자신감과 건방짐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뜨거워집니다. 그런데 제 말을 은근한 미소로 조용히 듣고 있던 루벤은 대뜸 , 넌 무엇을 위해 사니?”, ¿Song para que tu vives? 하고 묻는 거예요. 사실 좀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 정도 반격에 질 수 없지하며 또다시 이것저것 늘어놓는 필자에게 루벤은 현실에 충실하려는 그들의 인생관을 들려주었어요.

너는 뭐가 그렇게 바빠서 토요일 일요일에도 놀러 다니지 못하느냐며 오히려 나무라는 투였어요. 그리고 필자에게 너는 한국에 돌아가서 직장 잡고, 집 사고, 차 사고, 저축 많이 해놓은 다음에 놀 거니?”라고 물었어요. 필자가 왜 지금 놀 수 없는지, 그걸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말이에요. 그는 한국 사람들이 왜 그렇게 안달복달하면서 사는지, 그걸 이해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한국이 쿠바 옆에 있는 나라냐고 물을 정도로 학교 공부와 담쌓은 그가, 그래서 너희 나라는 그렇게 잘살고 있구나, 참 본받을 만한 나라라고 말했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어요.

과연 어떤 것이 잘 사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대답을 알고 계시나요? 그들의 속담 가운데 “Los ricos(부자들) también(역시) lloran(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멕시코의 한 경제학자가 한국의 경제 발전을 다룬 텔레비전 특집 프로그램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만큼만 일한다면 한국보다 열 배는 더 잘 살 텐데……"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국민에게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그런 말을 했지만 어감은 결코 냉소적이지도, 그렇다고 부러워하는 것도 아닌, 그들만의 독특한 여유가 있었습니다.

나이 먹고 즐기는 방법도 모르고 인생을 되돌아볼 여유도 없이 그저 달리고 또 달리는, 그러다 어디를 향해 달리는지도 모르고 사는 과거의 우리들을 생각할 때 그들의 말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도 또다시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뭔가 중요한 일들을 하느라 놀러 다니는 데 인색했던 걸 보면 필자 역시 어쩔 수 없는 한국사람인가 봅니다. 루벤과 로사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그들이 결코 한심한 인간의 전형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필자가 그나마 조금이라도 그들 삶의 철학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자위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어봅니다. 언젠간 나도 열 일 제쳐놓고 라틴아메리카식 낮잠을 즐길 수 있는, 그런 게으른(?)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조금도 부끄럽게 느껴지지 않는 건 좋은 것일까요, 아니면 나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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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소설 읽는 노인

짧은 소설책 하나 추천해 드릴게요. 루이스 쎄뿔베다(Luis Sepulveda)라는 칠레 작가가 쓴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이란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와 있습니다. 그 책에서는 남미의 밀림에 사는 한 노인이 삼류 연애 소설 읽는 것에서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을 느끼며 다른 권력과 재산, 명예 등을 거부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소설을 보통 환경 소설이라고 말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문제와 맞아들어가는 소설입니다. 우리는 돈과 명예, 권력 등을 갖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노인은 연애 소설 읽기라는 아주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것에 인생의 행복을 두고 살아갑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덜 중요해 보이는, 아니 하나도 중요해 보이지 않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며 사는 그를 바보라고 하겠습니까? 게으르고 멍청하다고, 또는 열등해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혹시 그 노인을 통해 또 다른 규격화되지 않은 행복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닌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돈 많이 주는 회사가 가장 좋은 회사였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여가가 많아 자기실현을 할 수 있는 회사가 가장 좋은 회사입니다. 개념이 바뀌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맛있는 음식이 좋은 것이었는데 이제는 건강한 음식이 좋다고들 합니다. 행복의 기준, 즐거움의 기준, 가치의 기준이 바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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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 사람들에게 무슨 훌륭한 것이 있나?

지금까지 침이 마르도록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서구세계가, 우리들이 엉터리로 만든 것이라는 점을 말했습니다. 그럼 그들은 훌륭한 사람들이란 말인가? ...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정말 우스운 일입니다. 도대체 훌륭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돈, 명예, 학식 뭐 그런 건, 따지고 보면 그런 것들이 훌륭한 사람의 기준이 돼서는 안 된다느, 모든 사람은 다 그들만의 가치가 있으며 고귀하다느니. ‘우린 그 자체로 빛나등등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우리는 배워왔지 않습니까.

일단은 이런 이야기는 시시콜콜합니다. 그래서 별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저에게 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돕니다. 그 학생이 그러더군요. 미래가 안 보인다고 울분을 토하거나, 불행해서 죽고 싶다고 술을 퍼먹더라도 명품백 하나 옆에 끼고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죽는 한이 있어도 우아하게 죽고 싶으신가요? 불행하더라도 말끔하고 고상하게, 간지나게 불행하고 싶으신가요? 이 책이 철학책은 아니니 일단은 좀 유보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근원적인 질문은 한켠에 두고 좀 더 현실적인 질문을 좀 해보겠습니다.

도대체 그들은 뭘 잘하나? 잘하는 것이 있기나 한가?’ 그래서 우리가 배울만한 그 잘하는 뭔가가 있기나 한가? 라는 질문을 해보자고요. 물론 그 이전에 우리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좀 더 원천적인 전제가 있기는 합니다. 정말이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답해 보려 노력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 있습니다. “왜 잘해야 하지?” 입니다. 죽어라고 잘해서 좋은 대학 가고 돈 많이 벌어도 불행하다 느끼고, 죽고 싶다면 그 잘하는 게 뭔 의미가 있을까요? 잘하는 게 있어야 꼭 행복한가? 그럼 잘하지 못해도 행복한 그들에게 배울 중요한 것은 없을까?’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좋겠군요. 이러한 것들은 전체 역사를 조망하면서 조금씩 언급하겠지만 이곳에서 먼저 생각의 물꼬를 터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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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원과 10,000

수업 시간에 500원과 10,000원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특정 노동의 댓가로 -예를 들어 식당의 접시닦이- 우리나라 사람이 한 시간에 10,000원을 받는다면 온두라스 사람은 얼마나 받을까? 혹은 얼마를 받는 것이 맞을까? 라는 질문을 했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물가나 환율 등 경제의 복잡한 논의를 해보자는 게 아니라 다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노동의 가치에 대한 일반적인 감성을 이야기하자는 겁니.

어느 보험회사에서 인간의 가치를 나름의 객관성을 가지고 계산해 보았다고 합니다. 직업, 교육, 연령, 경력 등의 기준으로 산출한 자료가 얼마나 객관적이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러한 산출이 가능한, 우리의 의식 구조에 대하여 말하고 싶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인간을 경제 가치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점을 부정하기는 힘들죠. 결국 이 말은 인간 개개인에게 부여되는 가치(점수)가 다르다는 말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만일 특정한 상황이 벌어져서 열 명의 인간 중에 한 명을 살리고 나머지는 죽을 수밖에 없다면 이러한 가치를 산출하여 가장 점수가 높은 사람을 살리겠다는 극단의 가정도 가능해집니다. 잔인한 느낌이 들지만, 사실상 현재 지구에서는 이렇게 잔인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직도 굶어 죽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아프리카와 중남미 국가들이 수두룩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세계 빈곤율이 이렇고 저렇고 혹은 유아 사망률이 이러네 저러네 이야기하는 것조차도 식상합니다. 한편 한 국가 안에서의 차이도 극명합니다. 잘 사는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 고액 과외를 받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소위 빽으로 군대를 면제받아 다른 사람보다 빨리 졸업하여 좋은 직장을 부모 찬스로 얻는 것이 우리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일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반면 그렇지 못한 무지렁이들은 비싼 종합 진단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생활고에 허덕이다가 결국은 말기 암 진단을 받고 손 한번 변변히 써보지 못한 채 죽고 마는 것이 현실입니다. 너무 극단적인가요? 그러나 이것이 꾸밈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이야기를 다시 한 시간에 10,000원을 받는 금수저와 한 시간에 500원을 받는 흙수저의 문제로 바라보겠습니다. 한 학생이 같은 노동에 대한 임금으로 500원과 10,000원의 차이는 물가의 차이가 아니겠느냐고 되물어봅니다. 이 경우 단순히 물가의 차이뿐만 아니라 그 물가를 구성하는 경제력과 경제 가치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의 등급화가 가능하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단순히 경제 측면에서 보면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말을 듣고 매우 당황했습니다. 역시 많은 학생이 현실적이라는 느낌입니다. 요즘 학생들은 인간의 가치의 차이를 전제로 한 임금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가? 쉽게 얘기하면 나는 저놈보다 잘났으니까 내가 월급을 더 많이 받는 것은 당연하단 말입니. 이는 정확히 같은 일을 통해 같은 결과를 만들어낸다고 하더라도 내가 근본적으로 다른 놈보다 더욱 가치 있으니 좀 더 대우받아야 마땅하다는 신분제의 긍정이기도 합니다.

대학 교수는 동네 채소가게 아저씨보다 우월한 존재이다? 서울대학생이 경희대학생보다 생산성이 높다? 의사가 천만 원을 버는 것은 정당하고 당연한 일이고, 단순 근로자가 200만 원밖에 못 버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과연 그럴까요? 니카라과 노동자가 한국 노동자에 비해 열등하니 10%도 안 되는 임금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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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빵을 아시나요?

별의별 사건이 다 일어납니다. 중미의 한국 공장에 근무하는 한국인들의 현지인 부당 대우 및 폭행 사건의 전설적인 일화로 소위 담배 빵 사건이란 것이 있습니다. 담배 빵이 무엇인지 모르는 분을 위해 굳이 친절하게 설명하자면, 담뱃불을 몸에 대서 화상을 입히는 것을 말합니다. 건달들이 자신의 깡을 과시하기 위해 스스로 자해하던 것을 일컫는 말이기도 했는데 이렇게 점잖게 이야기하려니 영 우습군요. 아무튼 중남미 노동자들이 한국인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고 태업을 하자 격분한 한국인 직장 간부가 피우고 있던 담뱃불로 일을 하고 있던 현지인에게 화상을 입힌 사건입니다. 이외에도 현지 텔레비전 방송을 탄 구타 사건, 성희롱 사건 등도 무수히 많습니다. 이런 사건들의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의 구조가 깔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남미 사람들은 바보 같고 나쁘기 때문에 우리 우월한 사람들과는 동등할 수 없다!?
이들을 우리의 방식대로 가르쳐 교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이 이전 장의 말하는 동물이라는 개념과 비슷한 거 느끼시나요? 16세기에 아메리카 대륙에 온 서양사람들이 가진 원주민에 대한 생각, 원주민들은 마치 말하는 동물과 같이 열등하다는 생각 말입니다.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단순히 외국에 나가 있는 한국인과 현지인의 관계에서만 갈등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 내의 외국인 노동자 문제와도 맥락이 비슷합니다. 현 경제 중심의, 돈 중심의 가치 기준 속에서 외국, 외국인과의 관계의 근본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는 현실적으로 세계화 시대의 가장 중요한 가치관이 됩니다. 우리 생각의 문제점을 더욱 확장하여 넓게 이해함으로써 그 실체를 정확히 파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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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의 우월감

다음의 글은 멕시코 한국 기업의 노동 문화 적응이라는 제하의 일종의 보고서의 일부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인 관리자들은 멕시코의 현지 문화를 존중하기보다는 한국식 경영이 낫다는 우월감을 갖는 경향이 관찰된다. 특히 한국인 관리자들이 멕시코 종업원들에게 갖고 있는 인상은, ‘게으르고 근로 의식이 부족하다’, ‘시간을 지키지 않는다’, ‘도덕 의식이 없고 되는 대로 한다’,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하다등으로 요약된다. 따라서 한국 관리자들은 우수한한국식 관리 방법을 적용하게 되고 이러한 시도가 상당한 부작용을 낳은 다음에도 현지에 맞는 경영 기법을 개발하기보다는 한국식 접근 방법을 더욱 강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해외 법인의 경영을 본사의 통제하에 두려는 기업의 전략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제가 여러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직접 내용을 보는 것이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다음은 엘살바도르 진출 기업 노무 관리 안내서로 한국국제노동재단이 발간한 자료입니다. 역시 유사한 분위기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게 우리나라가 지금까지도 적건 많건 가지고 있는 라틴아메리카 사람들과의 비즈니스 만남의 현실입니다.

 

특히 한국 기업주들은 현지 근로자들에 대해 우리나라보다 후진국 국민이고 나의 회사가 먹여 살리는 사람들이라는 무시하는 감정을 갖기 쉬움. 그러나 현지 근로자들이 우리나라 근로자들에 비해 학력 수준이나 생활 수준이 많이 낮은 것은 사실이나 그런 이유로 인격적 무시를 하거나 은연중에라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해야 함”.

 

현실이 이렇다 보니 여러 가지 부정적인 사례들이 계속해서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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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사람들은 글러 먹었어.

한국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중남미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가 워낙 부정적이다 보니 중남미에 진출한 한국 사람들과 현지 사람들과의 조화와 협력에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민이나 장기적인 생활을 위해서 온 경우는 나름대로 그들을 이해하고 동화하려는 노력을 많이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단기로 나온 경우나 이해관계가 직접 얽힐 때는 그들의 방식을 이해하기보다는 우리의 방식을 그들에게 주입, 강요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당연히 많은 문제가 뒤따랐죠. 앞에서 설명한 문화에 대한 이해의 부족, 부정적인 이미지 등은 결국 현실에서는 실질적인 문제로 나타나니까요.

중남미 진출 한국 기업이 격심한 노사 분규를 겪고, 한때 한국 기업은 악덕 기업이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습니다. 한국 경영진이 현지 노동자들을 폭행한 사건에서부터 멕시코 한국인 마피아 사건, 과테말라에서 한국 조직 폭력배가 이권 쟁탈전을 벌인 사건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사건, 사례들이 생겨났습니다.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그릇된 이해, 악의적인 왜곡, 부정적인 이미지들로 인하여 중남미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의 현실적인 만남에서 주옥같은 사례들이 부지기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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