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하기 싫어하는 당신이 위대하다.

 

송영복

 

우리나라는 광풍의 나라다. 한번 막걸리가 유행하면 마치 막걸리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술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광풍이 분다. 포도주도 그렇게 지나갔고, 위스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커피도 그럴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마실 것, 먹을 것, 입을 것 등에 그치지 않고 삶의 모든 분야에서 나타난다. 오래전에 테니스가 유행했던 시절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 모든 사람이 골프 이야기를 하더니 요즘은 달리기 열풍인가 한다. 언젠가 제주도 올레길이 엄청났다. 그리고 지금은 산티아고 둘레길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이런 현상이, 그야말로 지나가는 유행에 불과하니 다 의미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나름의 이유와 내용을 보면 사람들이 좋아할 만하다. 그러나 뭐든 절대적인 것은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는 그런 신기루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건 마치 연애와 같다. 콩까풀이 씌면 아무것도 안 보이고 임의 눈망울만 반짝 반짝 작은 별이 되는 것과 같다. 아무리 그것이 잠시라 한들 그 반짝이표 눈망울을 어찌 덧없다 하리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마치 노래 가사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고 다른 현실이 보이기 마련이다.

한편, 크게 보면 민주주의같은 것도 유행일 수 있다. 수렵 채집이 유행하다 정착 농경 생활이 대세가 된다. 그러다가 왕이 다스리는 세상이 생겨나고, 공화정이 광풍이 된다. 때론 사회주의가 유행하다가 삼권분립의 정치 제도가 오늘날 득세를 한다. 노예가 없는 혹은 양반이 없는 세상을 상상도 못 하다가 어느새 보편 평등국가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사랑 이야기를 거쳐 장황한 역사 이야기까지 늘어놓는 이유는 하나다. 생각보다 그 유행이라는 것이 광범위하고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내가 절대적이라고 믿는 그것도 상당히 시대적인 산물에 불과하고 언젠가는 시들고 지나갈 수 있다는 점을 좀 더 명확하게 인식하고 생각해 보자.

자 그러면 독서 이야기를 좀 해볼까나. 이 정도 밑자락을 깔아야 워낙 모든 사람이 당연하고 절대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독서의 신격화에 대한 의심의 씨알이라도 좀 먹힐까 한다. 독서의 좋은 점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으니 여기서 별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그러니 독서가 어떻게 유행에 불과한지 그리고 그런 유행이 어떻게 없어질 수 있을지를 상상해 보자. 다시 강조하지만, 독서가 가진 장점을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독서도 좋지만, 그 너머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워낙 오래전부터 최소한 나는 -태어나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독서 광풍이 꺼져본 적이 없으니, 책을 읽어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고, 마음의 양식을 가질 수 있으며,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정말이지 수도 없이 들으며 살아왔다. 책을 읽겠다고 하면 아빠 엄마도 텔레비전을 끄고 모두 조용히 해주는 분위기였다. 과부 달러 빛을 내서라도 책은 사준다. 이런 전설적 분위기는 오늘날에도 전혀 식지 않았다. 다양한 종류의 책방이 생기고, 독서 관련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며 유행의 정점을 새롭게 갱신하고 있다. 그렇게 독서 열풍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부는 이때 독서가 사실은 별거 아니라는 말을 하려니 계속 서설이 길어진다.

일단 독서는 우리가 마음의 양식을 쌓는데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말을 직접 듣고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책 한 줄 안 읽어도 요즘 유행하는 유튜브로 모든 지식을 섭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도 충분히 훌륭한 사람일 수 있다. 공자님 맹자님에서부터 예수님 부처님도 형편없는 독서인이었을 것이다. 당시에 변변한 책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그런 현인들의 독서량은 어려서부터 위인전, 과학 도서를 끼고 살아 쥐라기 시대 공룡의 이름을 줄줄이 꾀는 우리나라 유치원 아이들과 비교해도 형편없을 것이다. 공자시대에는 헤겔도 없었고, 이순신 장군도 태어나지 않았으며, 김동인의 감자는커녕 소설이라는 말조차 없었다. 그렇게 권장도서 한 권 읽어 보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인류 최고의 훌륭한 사람으로 불린다.

사실 독서가 인류의 역사에서 대중화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말이 좋아서 인쇄술이 발달이 어떻고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직지심체요절이 있었다지만 사실 대중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기껏해야 100여 년도 안 된 전통이다.

또한 방법적인 면에서도 독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시골 농부는 곡식이 익어가는 것을 보며, 개미들이 줄을 지어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자연의 이치를 깨닫게 되고 인간을 이해하였다. 자연을 바라보며 우주의 본질에 더욱 명징하게 간파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잉까(Inca) 사람들은 우아까(Huaca)라고 부르는 경이로운 자연으로부터 지혜와 아름다움을 구한다. 부처님은 보리수나무 명상을 통해, 예수님은 골고다의 고행을 통해 그 어떤 책에도 쓰여 있지 않은 진리와 교감한다.

이렇듯 그것이 진리가 되었건 아니면 절대 선이 되었건 독서만을 통해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독서는 아주 좋은 것일 수 있지만 항상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자.

죽어도 독서가 안 맞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독서하기 힘든 사람, 독서가 잘 맞지 않는 사람, 독서를 해 봐야 별로 즐겁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건 전혀 문제가 아니다. 당신은 아주 잘 살고 있다. 마치 커피가 유행하지만 커피를 안 마셔도 문제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도 귀에 못이 박히게 독서하라는 소리를 듣다 보니 독서를 안 하면 뭔가 부족한 사람, 교양이 없는 사람 혹은 뒤처진 사람으로 느끼게 될 수도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당신은 무슨 무슨 책들의 제목을 줄줄이 꿰고 있는 사람에게 주눅이 들었는가? 말끝마다 누구의 말에 의하면”, “누구의 작품에 의하면등등의 말이 마냥 멋있게만 느껴졌는가? 독서를 하자거나, 독서는 어쩌고저쩌고 등의 잔소리에 스트레스를 받아 보았는가? 그러지 않아도 된다. 그럴 필요도 없다. 연초가 되면 올해는 몇 권의 책을 읽겠다고 결심하고 또다시 좌절도 해보았는가? 그런 당신은 훌륭한 독서인 보다도 훨씬 더 멋진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라. 엄청난 독서를 뽐내는 사람들은 멋지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 자체로 멋지고 훌륭하거나 행복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책 없이 더 깊은 진리에 이를 수도 있음을 발견하시라.

반응형

'사랑방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틴아메리카 정치가 뭐가 어때서?  (0) 2025.02.08
위인전은 아동학대다.  (4) 2024.08.28
책 좀 그만 읽자  (0) 2024.08.22

 

 

요즘 한국의 정치 상황과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 있으려면 하도 기가 막혀서 표현할 말이 마땅치 않다. 대통령이 말도 안 되는 계엄을 하고 그걸 옹호하는 인간들이 법원에 침입하여 부수고 난동을 부린다. 이 와중에도 이익을 취하려는 정치인들이 대통령을 옹호하고 나서는가 하면, 정의는 개에게나 준 지 오래된 사법기관은 계산기를 튕기며 자신의 부귀와 영화를 위해 잔머리를 굴리는 상황이 너무 날것 그대로다.

뭐 이런 이야기야 많은 기자, 평론가들이 다 하고 있으니 내가 말을 보탤 필요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굳이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가끔 중남미가 도매금으로 넘어간다. “정치적인 후진국인 라틴아메리카의 경우. 어쩌고저쩌고”, “대통령이 탄핵당하는 현실이 남미의 어디에나 있을 법한. 어쩌고저쩌고”.

나는 나름 중남미에서 잔뼈까지는 아니더라도 젊은 시절을 보냈다. 멕시코가 제2의 고향이라고 약을 팔며, 밥맛이 없을 때면 께사딜야(Quesadilla) 먹고 싶어 껄떡대기도 한다. 그렇게 라틴아메리카 이야기로 대학에서 밥 벌어 먹고사는 나로서는 중남미 정치가 후진 정치의 대명사로 인용되는 것을 듣다 보면 영 심사가 틀어진다.

아니 중남미가 뭐가 어때서? 뭐 안 좋은 이야기만 나왔다 하면 항상 중남미 타령이야~~” . .

일단 거두절미하고 묻자. 정치와 사회에서 어떤 것은 좋은 것이고 어떤 것은 나쁜 것이라는 진화론적인 관점에 입각한 긍정과 부정의 구별 자체에 별로 동의가 안 된다. 정치라고 하는 것도 발전된다고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 즉 모든 사물과 이치가 후진 것에서 더 좋은 것으로, 그리고 적은 것에서 더 많은 풍요로운 것으로 발전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과거보다 현재는 더욱 좋은 것이고 그러다 보니 더 긍정적인 정치 체제를 가진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틀린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과연 그게 정말 꼭 그런 것인가?

정치가 발전하는 것이라면 분명 우리의 현실은 과거보다 좋아져야 할 텐데 과연 작금의 현실이 친일파가 득실거리던 때와 비교해 그렇게 좋아졌는가? 물론 이런 이야기는 한국적 분위기에서 보면 불편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서울대는 지방대보다 좋고, 대학 나온 사람이 고졸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싼 게 비지떡이며, 비싼 게 뭐가 좋아도 좋다는 생각도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정치 역시 발전하여 더 좋은 정치가 만들어 진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수직적인 세상 바라보기에 좀 더 깊은 통찰을 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이니 다른 기회를 생각하고 일단 접어 두자. 그렇지만 해볼 만한 의미가 있는 논의라는 점을 언급한다. 그리고 보다 현실적인 문제를 톺아보자.

가난한 쿠바는 정치적인 후진국인가? 우리에게 마약쟁이들의 천국이라는 이미지로 대표되는 멕시코는 정치적으로 한국보다 나쁜가? 등의 질문들에 우리는 너무 일방적 잣대를 들이대고 산술적인 대답만을 하고 있지 않은지 묻고 싶다.

멕시코 정부는 현 트럼프 정부에 맞서 미국에 대한 강온 전략을 피고 있다. 미국이 쿠바를 제재할 때 팔 걷어붙이고 쿠바를 도운 나라가 멕시코다. 미국과의 무역이 멕시코 경제에 가장 중요한 변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미국에 할 말은 하고 살아왔다. 한편으로 보면 멕시코는 외교적으로 우리보다 선진적이다. 주한미군 철수 이야기 한번 온전히 하지 못하는 우리나라에 비하면 멕시코의 외교와 정치는 발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자.

수십 년간의 경제 봉쇄에도 불구하고, 쿠바는 아무리 가난해도 어떤 국민도 굶어 죽거나 병원비 없어 죽어서는 안 된다는 정책을 유지했다. 모든 국민이 평생 무상으로 교육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굽히지 않았다. 평균수명이 전혀 낮지 않으며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이다. 쿠바에서 독거노인이니 고독사는 잊혀진 단어다. 아무리 이런 이야기를 해도 역시 가난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베네수엘라는 미씨온 밀라그로(Misión Milagro)를 통해 가난해서 백내장 수술을 받지 못하고 평생을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안과수술을 무상으로 해주었다. 잘 살지는 못해도 인간 최소한의 존엄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다 보니 경제 지표가 나빠져도 국민은 여전히 이런 정부를 지지한다. 이런 베네수엘라 정부를 후진 정부라고 이야기한다면 그 나라 국민은 뭐라 하겠는가?

중남미 몇몇 특수한 나라의 극단적인 예라고 하기도 힘들다. 그들은 정치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혹은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현실과 연결해 고민한다. 이번에 우리나라 대통령 탄핵 사건과 관련하여, 비슷한 사례가 있어 가끔 등장하는 에콰도르나 페루 같은 나라들도 우리나라처럼 자살을 많이 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적은 월급을 받더라도 편안하게 사는 것이 돈 많이 주는 대기업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소수다. 물론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기는 하지만 최소한 지금까지는 그런 것 같다. 그런 한국적인 현실의 한가운데 있다 보니 멕시코가 긍정적으로 보일 리 없다. 최신형 스마트폰을 쓰기 힘든 쿠바가 한심해 보인다. 멋진 자동차는 없어도, 건강하고 즐겁게 사는 중남미의 사회는 후진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즉 우리에게는 좋은 것과 나쁜 것, 발전한 정치와 후진 정치를 구분하는 기준이 결국에는 누가 더 돈이 많고 적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아무리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도 우리의 생각은 의식 무의식적으로 이런 기준을 벗어나기 힘들다.

이뿐만이 아니다. 어떤 정치가 좋은 것이냐의 문제에서도 우리는 서양적 신념 속에 있다. 성소수자들에게 라틴아메리카는 더욱 선진적인 나라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우리처럼 왕따를 당하는 현실이 적다. 돈이 없다고, 뚱뚱하다고, 키가 작다고, 영어를 못한다고 결혼조차 하기 힘든 현실은 라틴아메리카와 거리가 있다.

과연 어떤 나라가 훌륭한 나라인가? 혹은 발전한 나라인가?

우리는 너무 우리의 기준에 절대적이다. 아니 그마저도 우리 기준이 아니다. 서양의 기준이거나, 좌우간 누군가 멋있어 보이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을 가져다 근본 없이 되뇌고 있다.

사람에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나라에 좋은 나라 나쁜 나라가 있다고 생각하듯, 절대적인 가치 기준을 들이대며 발전한 정치와 발전하지 않은 후진 정치가 있다는 생각을 되풀이하고 있다.

한편, 오늘날 한국의 문제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나름 꾸준하게 발전시켜 왔고 앞으로 더 좋아지리라 생각하였으나 순식간에 우리는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터무니없는 인간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을 기점으로 잠복해 있던 병의 증상이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안 보였어도 우리의 정치는 결코 훌륭한 방향으로 개선되어 갔던 것이 아니었다. 친일파들이 단죄된 적 없이 이어졌고 오히려 더욱 견고해졌지 않은가. 4.3의 살인자들이 단죄되었나? 반공청년단은 없어졌나? 박정희, 전두환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고 반성하였는가? 등의 질문을 해보면 정치적인 발전이 과연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을 연장하는 소재로 라틴아메리카는 좋은 연습문제가 될 수 있다. 넓은 생각이 결국 나를 바라보는 힘이 되니 말이다. 그렇게 보다 보면 중남미의 좌파 독재라는 말도 다르게 보일 수 있다. 포풀리즘이라는 말의 의미도 되새겨 볼 가치가 있다.

그나저나 윤석열은 거짓말 주둥이를 언제나 멈추게 되려나? 그리고 그 사모님은 도둑질한 돈 토해내고 서방님 따라 들어가려나? 희망을 품어본다. 국힘당과 그 오래된 떨거지들이 극소수 정당으로 명맥만 유지하게 되는 꿈을 꿔본다. 아무리 정치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들 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이룰 수 없는 꿈을 꾸자.”(체 게바라)라는 생각이 요즘에는 더욱 간절하다.

 

반응형

'사랑방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서하기 싫어하는 당신이 위대하다.  (0) 2025.02.10
위인전은 아동학대다.  (4) 2024.08.28
책 좀 그만 읽자  (0) 2024.08.22

20, 400, 8000마리

‘0’의 개념을 일찍부터 알고 사용하였다는 점 이외에도 마야 수학의 가장 큰 특징이자 우리의 산술 체계와 다른 점으로 이들은 20진법을 사용하였다는 점을 꼽을 수 있어요. 우리는 10진법을 사용하지만, 마야20진법을 사용합니다. 이건 아주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기도 하지만 엄청난 차이이기도 합니다. 그럼 그 차이가 실제로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 건지 볼까요.

20진법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이들의 숫자 기록 체계에 대해서 살펴보면 1에 해당하는 것은 점 하나 이고, 5에 해당하는 것은 선 입니다. 선과 점이 같이 쓰일 때는 점이 위에, 선이 아래 놓이게 됩니다. 실제 예를 보면 도표와 같습니다. 이렇게 점과 섬으로 모든 숫자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더 복잡한 방법들이 많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기초적인 것만을 소개할께요.

도표의 20에 보이는 이 마야 숫자 체계에서 볼 수 있는 ‘0’입니다. 사실 이 20도 다양하게 쓰고 있습니다만 그냥 여기서는 이것 하나만 소개하는 겁니다. 하여간 이들은 20진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10이 채워지면 한 자리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20이 채워져야 한 자리가 올라가는 겁니다.

51이라는 숫자를 이용해 10진법과 20진법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아라비아 숫자, 10진법의 51이라는 수는 십 단위가 5개 있고 1단위에 하나가 있다는 뜻으로 십 단위 5개는 50이 되고 일 단위 11이니까 합이 51이 된 것입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우리가 생활에서 익숙해져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이지요. 마야 사람들 역시 20진법이 그들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느낍니다.

그렇다면 마야 숫자에서 말하는 ‘51’, ’, ‘은 어떤 것일까요? 아라비아 식으로 읽으면 51이 됩니다. 그러나 그 최종값은 101이 됩니다. 앞의 단위는 20진법이기 때문에 20이 되면 하나씩 올라가서 결국 앞의 단위가 5라는 것은 20씩 채워진 것이 5개가 된다는 말입니다. 20×5100이고 거기에 1이 더해져서 마야 숫자의 ’, ‘은 우리식 10진법으로 표기하면 101이 됩니다. 이렇게 아라비아 숫자와 마찬가지로 20진법이라는 점만 다르고 무한대까지 숫자의 표기가 가능합니다. 이 무슨 빵꾸똥구 같은 이해 될 듯 이해 안 될듯한 소리를 하느냐고요. 걱정 마세, 도표의 예들을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 (1×20) + 0 = 20
= (2×20) + 1 = 41
‥ ‥ = (2×20) + 2 = 42
= (3×20) + 1 = 61
… − = (3×20) + 5 = 65
‥‥ − = (4×20) + 5 = 85
‥‥ = (4×20) + 6 = 86
‥‥ = (4×20) + 19 = 99
= (5×20) + 0 = 100
= (19×20) + 19 = 399
= (1×400) + (0×20) + 0 = 400
= (19×400) + (19×20) + 19 = 7999
= (1×8000) + (0×400) + (0×20) + 0 = 8000

 

 

반응형

과학: ‘0’의 개념

이번 파트에서는 마야 사람들의 과학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이요 대표적인 예로 수학과 0의 개념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마야 사람들은 수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고 그것이 지식으로 전수되었다는 점은 의심할 나위가 없는 것 같습니다. ‘0’의 개념을 다른 어떤 동양이나 서양 세계보다도 먼저 알았다고 하는 점은 마야의 과학 수준을 이야기할 때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0’의 개념을 알았다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이며 또한 그 차이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결론적으로 예를 들어 말하자면 ‘0’의 개념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는 마치 컴퓨터를 사용하고 안 사용하고의 차이 정도일 수 있습니다. 컴퓨터가 있다면 수학 문제를 푸는 데에 있어서 속도와 양 그리고 정확도의 면에서 그냥 암산하는 것보다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수학뿐만 아니라 천문, 건축, 토목 등의 모든 과학 분야에서 마찬가지겠지요.

‘0’의 개념을 알았다고 하는 것을 정의하자면 각 단위 자리의 숫자가 채워졌음을 의미한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빵꾸 똥꾸 같은 말이냐 하면 사실은 간단합니다. 1에서부터 9까지, 다음이 10인데 그 10이라는 것은 일 단위가 ‘0’ 그러니까 첫 번째 단위에 하나도 없고 두 번째 단위인 십 단위에 하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십 단위에는 ‘1’을 쓰고 영 단위에는 ‘0’을 써서 결과적으로 ‘10’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0’의 개념을 마야 사람들은 기원전부터 사용하였고 이로 인해 무한대의 숫자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0’의 개념을 알고 있는 집단과 모르고 있는 집단의 차이는 엄청나다고 말씀드렸지요. 이게 극명하게 들어나는 것이 ‘0’의 개념을 몰랐던 로마 숫자와 ‘0’의 개념을 가진 아라비아 숫자입니다. 우리가 아직까지도 사용하고 있는 로마 숫자를 아시지요? 복잡해서 아예 도표로 그려봤습니다. 그놈의 ‘0’의 개념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숫자를 복잡하게 하는지 확인해 보시지요.

아라비아숫자 로마숫자
1 I
2 II
3 III
5 V
10 X
50 L
100 C
500 D
1000 M
1984 MCMLXXXIV
8888 VIII DCCCLXXXVIII
88888 LXXXVIII DCCCLXXXVIII
888888 DCCCLXXXVIII DCCCLXXXVIII

 

이 복잡한 로마 숫자를 보여드린 이유야 간단하죠. ‘0’의 개념이 없는 로마 숫자가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어려운지, 그에 반해서 마야 사람들은 ‘0’의 개념을 이용하여 수학과 천문학 등을 발전시킨 고도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점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반응형

무역: 시장 아닌 시장

농업이나 과학 기술이 융성하여 다양한 생산물들이 생겨나고 이러한 것들이 왕성한 교역을 통해 전 아메리카 지역에까지 퍼져나갔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역 혹은 상업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영리추구의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닙니다. 단순히 ()를 추구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물물교환이나 무역, 뭐 그런 것이 돈 벌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것 만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가장 중요한 장거리 교역품은 식량이 아니라 대부분 종교적인 물건이었으며 종교 행사 자체가 마을 전체의 일이기 때문에 무역 역시 각 마을의 행정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을 담당하는 것 역시 행정을 담당한 마을 지도층의 일이었지요. 일부 최고지도자와 그의 가족들이 이러한 교역에 참여했습니다. 실제로 식민지 시대 초기의 사료에는 마야빤(Mayapan)의 최고지도자인 꼬꼼(Cocom)의 아들이 교역에 참여하였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개인의 부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우리가 가진 일반적 개념의 상인이라고 못 박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중세 유럽과 동양의 교역만큼이나 많고 복잡한 무역 체계가 아메리카 대륙의 북쪽 끝 알래스카에서부터 남쪽 끝 파타고니아까지, 마치 실크로드와 같이 이어져 있었고 각 지역은 지역대로 현지 교환시스템과 시장 등이 발전했습니다.

반응형

농업: 원산지가 아메리카

아메리카 대륙은 현재 인류가 먹고 있는 중요 작물의 원산지로 유명합니다. 옥수수, 감자, 토마토, 호박, 고추, 땅콩, 파인애플, 카카오 등과 같은 작물이 모두 다 아메리카에서 온 것입니다. 한국 김치에 들어가는 고추, 강원도 감자, 옥수수도 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을 통해 여차 저차의 과정을 거쳐 우리나라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농작물이 발달한 것은 단순히 기후나 지리적인 조건 때문만이 아닙니다. 이들이 자연의 산물들을 과학적으로 잘 발전시킨 덕분이지요. 즉 그만큼 아메리카 대륙의 고대문명들은 농업을 아주 훌륭하게 발달시켰다는 것입니다. 마야의 경우에는 옥수수 농사가 가장 중요한 농업이었고, 이 밖에 콩, 호박, 고추, 토마토, , 담배, 바닐라, 차요떼, 코코아, 베후꼬, 에네껭을 길렀습니다. 열대 지역에서는 고구마, 유까, 히까마 등 많은 작물을 이용하였습니다.

열대우림의 무성한 숲을 잘라낸 후 불을 질러서 지력을 높이는 화전(火田) 농법도 발달했습니다. 마야 고원 지방 농지는 대략 10년 경작에 15년의 휴경 기간이 필요하고, 저지 지방의 농지는 15년 경작에 5년의 휴경 기간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주기를 잘 계산하고 계획하여 화전을 기반으로 한 농사를 지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화전은 여건이 허락하는 곳에서 행해진 것이었습니다. 즉 다른 자연환경을 가진 곳에서는 각 장소와 기후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농사 방법들이 발달하였습니다. 경사진 경작지 개간을 위해 벽을 쌓아 밭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인공 수로를 이용한 관개 시설을 확충하는 등 다양한 농사 기술들이 현지 사정에 맞게 개발되었습니다. 물이 풍부한 곳에서는 수경(水經)재배((hydroponics)이루어졌습니다.

발달한 농사기술 덕택에 생산성도 높았습니다. 실바누스 몰리(Sylvanus G. Morley)와 같은 학자는 집안의 가장 한 사람이 단지 48일 동안만 열심히 일해도 5인 가족 전체에게 필요한 충분한 양의 식량 생산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알베르또 루스(Alberto Ruz Lhuillier)는 여러 가지 부수적인 노동 행위까지 다 합친다면 족히 240일의 노동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주장이 현실에 더욱더 가까운지는 논쟁의 대상이겠지만 적어도 가장 한 사람이 1년에 7~8개월 정도는 농업 생산 이외의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즉 마야의 농업기술의 발전은 마야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는 유휴 노동력을 제공할 정도로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는 것입니다.

 

반응형

우리가 어려서부터 위인전을 읽고 또 그것을 권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에 훌륭한 사람이 많이 있는데, 그들이 왜 그렇게 훌륭하게 되었는지 위인전 읽고 배워서 우리도 그런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하자!

 

세상에 훌륭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는 바꾸어 말하면 훌륭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일단 거두절미하고 이러한 생각 자체가 차별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역사적으로도 이러한 생각의 배경은 근대적 발상에서 비롯된다. 서양의 관점에서, 식민지를 가지고 있는 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에는 훌륭한 선진국이 있고 뒤떨어진 후진국이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선진국에 사는 일등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이등 혹은 삼등이나 사등 인간이 존재한다는 관점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은 다 훌륭하다. 인간 각 개인의 삶이 하나의 우주라고 하지 않던가. 모든 사람이 각자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돈이 많건 적 건에 상관없이,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거나, 혹은 유명한 사람이거나 아니거나 각자의 가치가 있다고 배웠다.

그런데 위인전은 이런 근본적 인간 가치를 부정한다. 대통령이 아니라 말단 공무원 생활을 평생 한 아빠는 실패한 인생이 된다. 위인전에 등장하는 스티브 잡스와 비교해 보면 겨우 입에 풀칠하는 치킨집 사장님은 루져가 아닐 수 없다. 그분이 아무리 독거노인들을 위한 급식 봉사와 기부를 해도 그건 그냥 착하지만 찌질한 사장님의 미담에 불과하다. 위인전에 실리기는 힘들다. 위대한 인물의 발뒤꿈치 이야기 정도나 되려나. 그래도 그나마 이건 조금 낳다. 평생 자식 뒷바라지한 옆집 맹구 할머니는 더더욱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된다. 위인전의 관점에서 보면 평생 뭐 하나 그럴듯한 것을 이룬 게 없으니 말이다. 우리가 읽은 위인전은 평범한 사람을 은근히 돌려 까고 있다.

물론 모든 위인전이 다 그런 건 아니다. 그리고 위인전에 나오는 사람들이 훌륭하고 멋진 것도 사실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사회적인 강요로 위인전을 읽어본 나도 거기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멋지다고 느낀다. 본받을 것도 많고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주옥같은 이야기들도 있다. 그러나 맹구 할머니는 왜 아닌가? 그분도 멋질 수 있다. 식민지적인 관점이 아닌 인간적 관점으로 보면 아름다울 수 있다. 아니 아름답다. 누가 그분의 자서전을 써주거나 혹은 애절한 삶을 영화로 만들어주면 어떨지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어디 세상에 가만히 들여다보면 애절하고 기구하지 않은 삶이 있으랴. 평범한 사람의 인생에서 아름다운 우주를 발견해서 보여준다면, 그 삶 자체에 우리 모두 감동할 대목이 있다.

그런데 위인전이 우리에게 해롭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더 심각한 데 있다. 위인전을 읽다 보면 나도 그들처럼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항전의 의지(?)를 다지게 된다. 그러나 승리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이다. 현실적으로 위인전 읽고 최고의 위인이 될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알고 가꾸어 그렇게 고유성을 잘 지켜 나갈 때 가장 아름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누구의 모델을 따라가거나 흉내 내봐야 별 볼 일 없는 짝퉁에 불과하다. 비슷하게 되는 것도 힘들지만 그렇게 해봐야 항상 넘버투 이상 되기 어렵다. 결국 루져가 된 우리에게 위인전 읽기의 결과로 남는 것은 마음의 상처뿐이다. 평생을 안고 살아가게 되는 트라우마 말이다.

물론 위인전을 읽고 내가 가는 길을 만드는 기초를 닦거나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발견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도 있다. 모든 세상의 이치가 그러하듯 위인전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위인전의 핵심은 위대한 사람과 위대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가치 판단에서 시작한다. 그런 상대적인 인간 가치 평가에 따른 줄 세우기를 비판하는 것이고 그 결과의 악영향을 우려하는 것이다. 그러니 논지를 흐리지 말자. 본질을 보자.

그래서 말한다. 위인전 좀 그만 읽자. 더욱이 아이들에게 위인전을 더 이상 권하지 말자. 감히 필자는 아이들에게 위인전 읽히는 것을 아동학대라고 말하고 싶다. 너도 크게 자라서 저 사람처럼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압력이기도, 나아가 위협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위인전을 읽으며 그렇게 되는 우리를 상정하고 선망하지만 결국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실패한 인생이라는 것을 강요받게 되는 것이다. 위인이 되지 못하는 건 온전히 너의 나태함과 무능함의 결과라고 비난한다. 그렇게 결국은 마음의 상처가 되고 성인이 되어서도 큰 강박으로 남는다. 내가 가진 상처의 근원조차 모르고 어리둥절한 사람들이 다시 위인전을 찍어내고 권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그렇게 우리 주변에는 위인전을 읽고서도 위대한 사람이 못된 절대 다수의 찌질한 사람들이 살아간다. 혹은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고 평가되는 사람들조차 또 위인전을 읽으며 더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렇게 이 세상은 온통 전쟁터가 된다. 개인의 피 터지는 경쟁과 국가 간의 전쟁이 이런 근본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과연 논리의 비약이기만 할까?

나는 그런 위인이 안 돼도 좋다고 스스로 믿고, 가르치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런 위인전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되지 않아도 너의 부모님은 맹구 할머니는 그리고 너는 이미 훌륭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위인전 좀 그만 일자! 대통령, 워런 버핏, 이재용 회장만 위대한게 아니다. 그러니 이제 아이들에게 잔인한 위인전 읽히기는 그만하자. 그건 아동학대다. 서방 제국주의가 만들어 놓은 쌍팔년 시대의 아동학대이다.

반응형

책 좀 그만 읽자 -----송영복 

 

책읽기, 지식쌓기는 한국의 정규교육과정의 폐해를 그대로 답습한다. 우리는 공자를 단 몇분만에 배우고 돈키호테를 또 몇 시간 만에 이해하고 만다. 그렇게 그 작가와 작품의 이름을 오늘날까지 잘 외우고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어떤 것도 내재화될 수 없는 시간 안에서 그냥 지식도 아닌 Memory를 머리 한구석에 처넣은 꼴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지긋지긋한 학창시절이 끝났다고 야자(야간자율학습)의 서글픈 그림자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너무 많은 책읽기를 강요받는다. 책을 쓴 사람이 그렇게 간단히, 그 생각을 단 며칠 혹은 단 몇 주 만에 한 것이 아닐 텐데... 그러니 그것을 느끼고, 생각해서 다시 내 속에서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거쳐야 되는데...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그런 시간이 없다. 항상 책을 끼고 살아야지나 훌륭한 사람, 지성인이란 말을 듣는다. "**** 작품 읽어 보셨어요?""**** 에 대하여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보다 훨씬 뭔가 있어 보인다. 독서 토론회도 유행이다. "인문학 거시기 뭐시기가 어쩌고 저쩌고" 라는 포스터를 접하기도 쉽다. 우리의 독서에서 사색이 빠지고 현학이 대신한 성인판 야자의 스멜이 슬슬 올라온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책 좀 그만 읽어라" 정말 완전히 책을 끊으라는 말을 하는 건 아니다. 우리 스스로의 느낌과 생각이 독서의 양과 스피드보다 중요하고 그것들은 사색의 과정이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생각을 온전히 되새김질할 각자의 시간과 느낌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시간은 책을 덮고 있어야 가능한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근데 현실적 상황이 이러고 보면 책을 읽기보다 책을 아예 끊는 것이 훨씬 아름다울 것 같다. 그 아름다운 시간에 책이 아닌 다른 것으로 우리의 생각을 채우는 것도 좋을 거다. 자연에 대한 관찰이 그것일 수 있고, 사람들과의 길게 이어지는 의미없어 보이는 대화가 더 많은 것을 깨닫게 할 수도 있다. 면벽을 하며 접하게 되는 담벼락에서도 책 보다 더 귀한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아 보는 것은 어떤가. 뛰는 심장의 고동을 느껴라. 인간을 다룬 어떤 책도 설명할 수 없는 책 이상을 경험하게 된다. 이 정도 되고 보면 책이 주는 감동은 인스탄트 식품이요 5분 만에 만들어져 나오는 체인점 음식이다.

책 좀 그만 읽고 우리의 영혼을 온전히 우리 스스로의 오감과 이성으로 쌓아보자. 그게 21세기에 우리가 해야 할 죽지 않고 살기 위한 길이고, 경쟁력이고 또한 행복이 될 것이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