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중요 연대

1535년 멕시코에 누에바 에스빠냐Nueva España 부왕청 건립.

1543년 페루에 페루Perú 부왕청 건립.

1545년 볼리비아 포토시Potosi 광산 개발.

1716년 까를로스 3세의 중상주의 시작.

1739년 콜롬비아에 누에바 그라나다Nueva Granada 부왕청 건립.

1776년 아르헨티나에 리오 데 라 쁠라따Rio de la Plata 부왕청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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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틴아메리카의 시작

이번 장에서는 앞에서 공부한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을 통해서 형성된 식민지시대의 아메리카가 어떻게 30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변화되어 정착되었는지를 이해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이 식민지 기간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리하고 넘어가 보도록 하지요. 이 기간의 굵직한 배경을 설명하는 한 개념을 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시작 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라틴아메리카는- 꼭 라틴아메리카만 말고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두 개의 시기로 나누라고 한다면, 1492년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180도 바뀌었으니 이 시기가 당연히 모든 것의 기점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유럽의 정복 이전의 원주민들은 그들 방식의, 서양과는 완전히 다른 독특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사상 등의 체제로 살다가 1492년으로 인하여 완전히 다른 세상의 것을 폭력적으로 강요받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그때 만들어진 모든 체제가 이후에 굴곡의 과정을 거치기는 하였지만 특별한 구조적, 근본적 변화 없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식민지시대를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시발점을 이해하는 것이고 그 배경과 구조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것은 라틴아메리카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져서 변화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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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훌륭한 인간 vs , 돼지 혹은 바퀴벌레

라틴아메리카 식민지기간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특징은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극단적인 신분의 차이입니다. 정복한 사람들은 좋은 사람, 힘센 사람, 똑똑한 사람, 긍정적인 사람, 돈 많은 사람, 멋지고 예쁜 사람이고 원주민들은 그 반대로 돈 없고, 힘없고, 머리 나쁘고, 고약하고, 고칠 것이 많은 부정적인 인간에 못생기고 흉측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피부색에 따라 사회는 원주민과 유럽 지배계층으로 이분화되었습니다. 이후 흑인 노예들이 들어오면서 이들 역시 사회의 최하층이 됩니다. 의복, 음식, 주거, 언어, 관습 등 모든 면에서 극단의 차이를 보입니다. 사실 이런 정도의 이야기는 현실을 잘 반영하지 못합니다. 무엇을 상상하던 지금 제가 설명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큰 차이가 납니다.

핵심이 되는 개념은 이겁니다: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그럼 뭐로 보았는냐? 인간 취급을 해줄 수 없는, 형태만 인간의 모습을 한 동물로 본 것입니다.



원주민 = 동물 vs 유럽인 =인간

이게 바로 현실이었고 식민지 시대의 사회계층구조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오늘날의 라틴아메리카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배경으로서의 식민지시대를 말한다고 하였으니 당연히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인종차별, 빈부격차의 배경이 바로 이 현실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원래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이 형성된 기간이 바로 식민지 기간이고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어느 정도의 변화와 포장의 과정을 거치고 있기는 하지만 큰 변화 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엄청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이것이 처절한 현실입니다.

흑인과 백인은 같은 화장실을 쓸 수 없다. 극장에서도 같은 입구로 들어갈 수 없다. 백인이 버스에 타면 흑인은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등등의 흑인 인권 관련 이야기가 미국의 20세기 중 후반까지의 현실입니다. 즉 식민지 시기에 만들어진 철저한 신분의 격차가 오늘날까지도 크게 변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 기간의 사회구조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수직적인 신분차이를 들었고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유럽의 훌륭한 인간과 대비되는 개나 돼지와 같은 원주민이라는 이분법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 돼지 보다도 못한 경우도 많았죠. 바퀴벌레 정도 ㅜㅜ. 그리고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차별이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사회구조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원리입니다.

당시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에 대한 생각은 다음의 문장으로 잘 정리됩니다.



원주민은 말하는 동물이다(Animal que habla)

이 말은 제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 16세기에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온 유럽인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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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반이라고 다 같은 양반이 아니지...

식민지시대가 지나면서 수직적인 사회관계는 굳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백인과 원주민 사이에 새로운 중간계층이 생겨납니다. 메스띠소(Mestizo)라고 불리는 이 두 계층의 혼혈이 탄생하여 중간 사회 계층을 형성합니다. 혼혈인들은 원주민에 비해서는 그나마 좀 더 백인적인 정체성이 있다 보, 에스빠냐어를 전혀 못 하거나 잘하지 못하는 대다수 원주민과 비교해 에스빠냐어를 잘했습니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백인과의 접촉이 많은 환경을 가지고 있어서 중간계층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말이 중간계층이지 극소수의 유럽인이나 그 후손들이 모든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사회적인 신분이 그렇게 높아질 수는 없지요. 인종적인 부분을 기본으로 하여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모든 면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던 백인들이 자신들의 피가 조금 섞였다고 하여 동물과 같이 취급하던 원주민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 우월한 지위를 인정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종합해 보면 3개의 신분이 존재합니다.

1.원주민

2.유럽인

그리고 그 둘의 혼혈인 3.메스띠소.



뻬닌술라르(Peninsular) 에스빠냐에서 태어난 에스빠냐사람


끄리올요(Criollo) -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에스빠냐사람

그리고 이제 또 다른 제4의 계층이 탄생합니다. 바로 4.끄리올요(Criollo) 라고 하는 그룹이지요. 이들은 인종적으로는 유럽의 백인입니다. 보통은 원주민의 피가 안 섞였습니다. 그렇지만 출생지가 유럽이 아닙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유럽사람들을 지칭합니다. 즉 아메리카 대륙에서 나서 자란 토착 아메리카 백인을 가리킵.

그런데 이들의 혈통은 비록 유럽인이지만 태어난 곳이 아메리카 대륙이란 점에서 에스빠냐에서 온 사람들이 괄시하는 경향이 생깁니다. 결국 에스빠냐에서 태어나 아메리카에 온 뻬닌술라르(Peninsular)라고 불리는 집단이 최상부의 권력을 독점하고, 아메리카 대륙에 기반을 둔 끄리올요(Criollo)라는 토착 에스빠냐 후손들은 그 아래에 위치합니다. 이건 우리나라의 진골, 성골의 개념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혈통과 더불어 지역적인 정체성이 신분의 차이를 만든다는 점이 재미납니다.

 

 

에스빠냐에서 태어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온 에스빠냐 사람들은 이 대륙이 단순히 부임지라서 곧 본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경우도 있었고, 자신들은 본국인 에스빠냐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에스빠냐와의 밀착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끄리올요의 경우 식민지기간이 삼백여 년지속되다 보니 이곳에서 나고 자라 2세나 3, 4, 5세로 이어지며 기반을 만들게 됩니다. 당연히 에스빠냐와의 정체성의 고리가 점점 약해집니다. 또한 토착적인 그들만의 문화나 이권 등이 생겨납니다. 기에 뻬닌술라르를 더욱 신임하고 중시하는 에스빠냐 본국의 태도 역시 문제가 됩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중요 행정직에서 끄리올요들은 상대적으로 페닌술라르에 비하여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곳에서 뿌리를 내렸고 현지 사정을 더욱 잘 알 뿐만 아니라 인종적으로도 에스빠냐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끄리올료는 자신들이 받는 서자 취급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지요.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끄리올요는 에스빠냐와 뻬닌술라르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갈망하는 세력으로 부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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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신분 차별, 그 끝판왕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기간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교육, 의식주 등 모든 면에서 극단의 양극화 현상이라는 말로 대변할 수 있습니다. 권력을 독차지한 자와 전혀 갖지 못한 자의 양극화 현상, 돈을 버는 자와 그들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자들의 양극화 현상이지요. 물론 권력이 있고 돈을 버는 사람은 유럽 백인의 피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제가 양극화 현상을 강조하다 보면 여러분은 너무 심한 과장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전혀 과장이 아닙니다. 인종차별이나 양극화가 다른 나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적다고 느낄 수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이러한 것들을 아무리 말로 설명해보려 해도 현실을 느끼기에는 뭔가 부족한 면이 항상 느껴집니다.

인종의 양극화 현상은 한 마디로 인간과 동물의 관계였다는 점을 앞에서부터 강조해 오고 있습니다. 하기야 요즈음에는 동물 애호가가 많아 애완견이 인간보다 더 호의호식하는 경우 많으니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좀 애매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아무튼 식민지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상하 신분의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이었습니다.

포토시와 같은 광산에서는 열두세 살의 어린이들에게도 지옥 같은 노동을 강요했습니다. 일단 한 번 지하 갱도에 들어가면 시체가 되기 전에는 지하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없었지요. 캐낸 은을 건네주고 음식과 담배, 코카 잎을 받기 위해 광산 입구의 작은 쪽문이 하루에 한 번씩 열리는 것이 그들이 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고리였습니다. 그들은 열일곱 여덟 살이 되어 진폐병에 걸려 죽기까지 하나님과 에스빠냐 왕의 영광을 위해 노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현실이 라틴아메리카 전 지역에 걸쳐 다반사로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일부 상류층을 위한 절대 다수 민중의 희생이라는 표현을 식민지 시대의 중요한 특징으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강조할 만하지 않습니까.

라틴아메리카 식민지시대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근간이 그 시대에 다 만들었다고 하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즉 식민지시대에 만들어진 사회구조가 오늘날까지 약간의 변천을 거치기는 하였지만 기본적으로는 비슷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야기한 징글징글한 인종차별과 신분차별은 오늘날 라틴아메리카 사회구조의 근간이요 그 이해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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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혼혈, Sincretismo

문화나 종교면에서는, 재미나게도 앞에서 보아온 것과는 조금 다른 현상이 일어납니다. 서로의 삶과 가치가 어우러지는 혼혈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역시 문화는 힘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여기에서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이 에스빠냐화 되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에스빠냐사람들이 원주민의 문화에 동화되어 가는 부분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제3의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가톨릭도 원주민 전통 종교와 어우러져 새로운 라틴아메리카적인 가톨릭을 탄생시킵니다. 원주민들의 종교관과 우주관에서 자주 등장하는 요소들이 식민지시대의 가톨릭전통과 융합하면서 과달루페라고 불리는 원주민의 외모를 한 성녀도 탄생합니다. 성당의 장식을 위해서 그리고 신에 대한 경배와 기도의 한 방법으로 꽃을 바치는 행위도 원주민적인 종교전통에서 유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원주민 전통 종교의 숭배대상에 가톨릭의 신을 대입 혹은 영입하는 양상이 된 것입니다. 애당초 이곳 원주민들은 다양한 신을 숭배하였고 그러한 신 중에 서양사람들이 믿는 신을 그대로 하나 더 받아들인 것이지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에스빠냐의 가톨릭 사제들도 혼란스럽습니다. 이들이 믿고 있는 것이 가톨릭인지 아니면 전통 종교인지, 혹은 이들이 믿고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인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로 개명을 한 퀘잘코아뜰Quetzalcoatl이라는 원주민 신인지 갸우뚱해집니다.

예술의 분야도 예외는 아닙니다. 도자기의 경우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마요리까Mayorica 도자기나 청화백자가 아메리카 대륙에 소개되면서 재현되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딸라베라Talavera라는 원주민의 예술적 느낌이 강조되는 독특한 제3의 라틴아메리카 도자기가 탄생합니다.

종교적인 면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정서와 미적인 취향 등에서 다양한 요소들이 조화 속에서 통합되기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러한 것들 외에 생활과 문화 그리고 정서적인 면의 많은 것들이 만남과 동화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그들이 만든 사회정치 구조는 이곳에서는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일부는 에스빠냐적인 것과 만나 동화되어 새로운 제3의 정체성을 탄생시키는가 하면 또 다른 하나의 맥락 속에서는 원주민의 정서가 끈질기게 남아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라틴아메리카의 독특한 가치의 세계를 이어갑니다. 물론 유럽적인 전통과 주장이 주류사회의 기본 틀을 만들어 간 것은 물론이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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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엘도라도를 찾는 사람들

이번에는 식민지시대의 먹고 사는 이야기, 경제면에 관하여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배경적인 부분으로, 다시 한번 상기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1492년의 사건이 바로 때문에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시작에만 이 중심에 놓인 것이 아니고, 그 과정도 마찬가지고, 그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들도 다 그놈의 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아니 밀접한 관계 정도가 아니고 바로 ’, 즉 내가 얼마나 부자가 될 수 있느냐가 모든 원인이 된다고 봐야 합니. 식민지 시대의 정치적인 면, 행정적인 면, 사회적인 면, 문화적인 면의 큰 주제에서부터 건축, 도시, 음악, 언어, 종교, 예술 등의 다양한 세부 테마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것이 벌기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돈에 미쳐서 새로운 세상을 접하게 된 사람들에게 식민지 초기 항해 시대는 기대만 컸을 뿐 실질적으로 큰 이익을 주지 못합니다. 결국 이러한 이유로 하여 1492년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꼴론Có́lon도 큰돈을 벌어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서 불행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그리고 등장한 것이 엘도라도El Dorado를 찾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대륙에 대한 환상이 유럽 전역에 퍼지면서 일확천금을 꿈꾸고 신대륙에 건너오는 사람들이 많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쿠바는 엘도라도 사냥꾼이 모이는 거점도시가 됩니다. 그곳에서 여러 가지 환상적이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퍼져나가게 됩니다. 아마존이라고 불리는 여전사들이 온통 황금으로 만들어진 도시에서 살고 있다는 소문도 퍼져나갑니다. 실제로 남미 아마존 밀림 일대에서는 오늘날까지도 빠이띠띠(Paititi)라고 부르는 황금 도시를 찾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니 말입니다. 당시의 쿠바는 황금을 찾은 사람들의 무용담이 판을 치는 곳이었습니다. 야심에 찬 인간들의 탐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허리에는 총과 칼이 항상 쩔렁거리고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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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일장춘몽이 되고 ...

볼리비아 남부 고원지방에 뽀또시Potosi라고 불리는 유명한 도시가 있습니다. 소금호수로 잘 알려진 우유니Uyuni에서도 그렇게 멀지 않은 곳입니다. 평균 해발 고도가 4,000미터인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시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1545년 은광이 발견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 이곳에 인구가 집중되고 도시가 세워져서 식민지 기간 동안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 중 하나가 됩니다. 산속에서 나는 덜거덕거리는 소리 때문에 '폭발하다'라는 뜻의 케추아 인디언어인 뽀또흐치Potocsi에서 도시의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알려집니다. 그 소리는 다양한 광물질이 풍부한 이곳 땅의 현상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650년경 한때 인구가 16만 명에 달했을 정도로 식민지시대 폭발적인 개발이 이루어진 곳입니다.

남미 대륙에 포토시가 있었다고 한다면 북미 대륙에는 사까떼까스(Zacatecas)가 있습니다. 멕시코 중북부에 위치한 이곳 역시 해발고도가 2,500여미터에 이르는 고원지역 입니다. 에스빠냐 식민지 초기인 1548년에 도시가 형성되었으나 이후 은이 발견됨과 동시에 1585년경 대단위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광산들이 개발되게 됩니다. 엘도라도를 찾는 사람들의 집요함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아메리카 대륙의 황금에 대한 욕망은 어느 정도 현실이 됩니다. 실제로 엘도라도의 황금 방석에 앉은 셈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에스빠냐에 금이 넘쳐나게 됩니다.

그러나 부귀영화는 일장춘몽에 불과합니다. 식민지 초기 개척과정에서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황금을 약탈했지만 욕심은 끝이 없었고, 포토시나 사까떼까스 같은 곳에서 생산되는 은의 상당량은 대서양을 건너가는 과정에서 해적들에게 약탈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에스빠냐에 무사히 도착한 금과 은조차도 에스빠냐 부자들의 허영과 사치에 탕진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항해와 식민지 건설 등에 필요한 비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결국 다음과 같은 표현이 당시 에스빠냐의 경제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스빠냐의 경제는 이빨 사이에 낀 찌꺼기에 불과하다.

 

입에서 느껴지는 달콤함에 잠시 즐거웠을 뿐 모든 영양분은 뱃속(유럽의 다른 국가)으로 넘어가고 남은 것은 달콤함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결국 이후 무적함대의 굴욕 그리고 에스빠냐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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