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하나: 중요 연대

1902년 쿠바 독립

1901 ~ 1934년 실질적인 미국의 보호령

1934 ~ 1959년 바띠스따 정권

1956년 쿠바 혁명 시작

195911일 쿠바 혁명군 승리

1961년 사회주의 선언

1979년 경제 붕괴, 쿠바 난민 미국에 상륙

1995년 외국인 직접 투자 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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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쿠바는 어떤 나라?

쿠바라고 하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가장 독특한 나라라고 감히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재미있는 나라입니다. 쿠바는 그렇게 큰 나라도 아닙니다. 전체 국토 면적 110,922평방로 한반도(99,500)에 비해 약간 큰 섬나라입니다. 인구는 11,210,000명 정도로 우리나라 오천만과 비교1/5 수준이니 인구밀도는 낮습니다. 그런데 이 쿠바섬은 1492년 이전까지만 해도 별 독특한 것 없이 원주민들이 평화롭게 살던 곳이었는, 유럽사람들이 침략을 한 1492년부터 그야말로 천지개벽을 합니다. 식민지 이후 지금까지 이어오는 역사를 통해 애당초 이 섬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죽임을 당해 지금은 원주민들이 단 한 명도 살아남아 있지 않아요. 이게 천지개벽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다른 것들의 변화도 엄청나겠지요.

쿠바는 식민지 시대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에스빠냐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 전초기지로 1511년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부왕청이 만들어져 통치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곳인 만큼 시련도 많이 겪습니다. 1500년대 중반부터 해적들이 출몰하기 시작해서 급기야는 프랑스의 해적들이 부왕청이 있는 아바나를 봉쇄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에스빠냐 사람들에게 있어서 쿠바는 끝까지 지켜내야 할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 아메리카 대륙 대부분 지역이 독립하거나 다른 나라의 손에 넘어가더라도 끝까지 쿠바만은 놓지 않고 지켜냅니다.

1700년대가 시작되면서 새로운 작물인 담배가 들어와 중요한 생산품이 되고 이에 따른 농업의 발달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하여 노예들이 대거 유입되게 됩니다. 국제 교역 중심지로 발달하면서 전 세계 설탕의 3분의 1이 쿠바에서 생산될 정도로 사탕수수 농업이 발달합니다. 이때부터 미국과의 무역도 중요하게 됩니다. 지리적으로 가깝게 있으며 경제가 발전한데다 인구도 늘어나고 있는 나라인 미국과의 관계가 부상합니다. 한편 1800년대를 넘어서면서 아메리카 대륙의 대부분 나라는 독립을 하는데 쿠바만큼은 에스빠냐가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곳이었고, 그렇게 쿠바는 에스빠냐 지배를 이어갑니다.

1853년 미국이 쿠바를 매입하겠다고 제안을 해오기도 하였지만 에스빠냐는 버팁니다. 그렇다고 해서 독립의 열망을 완전히 틀어막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미국은 쿠바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야욕을 키워갑니다. 급기야 1868년 소위 야라선언Grito de Yara을 시발점으로 독립 투쟁이 시작되고, 1881년에는 쿠바 독립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호세 마르띠José Martí가 뉴욕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아갑니다.

여기에서 뉴욕이라고 하는 장소에서 쿠바의 독립운동이 펼쳐졌다고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에스빠냐가 지배하는 쿠바보다 독립된 쿠바 그렇지만 미국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쿠바가 훨씬 더 매력적이었을 테니 쿠바의 독립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준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미국의 속내는 미국과 에스빠냐의 다툼으로 발전합니다. 1898쿠바 앞바다에 정박해있던 미국 선박 메인호의 원인 모를 화재를 발단으로 미국과 에스빠냐가 전쟁을 하게 되는데, 이게 말이 좋아 원인 모를 화재이지 실질적으로 미국의 자작극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입니다. 미국의 역사를 보면 배에 스스로 불을 질러 전쟁의 구실을 만들었던 스토리가 상당히 많습니다. 미국 독립의 역사에서 등장한 보스턴 차 사건이 그렇고 상대적으로 최근에는 베트남과의 전쟁을 불러일으킨 통킹만 사건도 이와 유사하다는 주장이 많습니다.

하여간 미국은 이렇게 시작한 전쟁에서 에스빠냐를 묵사발로 만들었고 패전국 에스빠냐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참혹했습니다. 에스빠냐는 필리핀, 쿠바, , 푸에르토리코를 미국에 빼앗기게 됩니다. 그야말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 화려했던 에스빠냐의 영광이 모두 잿더미가 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에스빠냐에서는 이 전쟁이 시작된 1898년을 상징해 소위 ‘98세대라고 하는 염세적이고 패배적인 문화적 성찰이 있습니다. 이때의 좌절이 얼마나 컸으면 문학 사조가 됐을 정도인지 상상이 가시나요. 세계를 호령하던 한 나라가 철저히 몰락한 것입니다.

에스빠냐는 그렇다 치고 쿠바는 미국과 에스빠냐 전쟁의 결과로 독립을 하게 되는데 이후 1898-1902년 기간 동안 미국이 쿠바에서 군정을 실시합니다. 이후 1902년부터 미군이 철수하기는 하였지만 그 영향력이 사라진 것은 전혀 아닙니다. 쿠바섬의 일부인 관따나모Guantánamo 지역을 미국에 넘겨주고 쿠바의 독자적인 국제 협약을 금지하는 플래트 수정안이 쿠바 헌법에 명시되는 등 미국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1933년에는 바띠스따(Fulgencio Batista)가 구테타를 통해 정권을 잡아 친미 독재를 실시합니다.

바띠스따는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 바나나 농장 노동자, 식당 종업원, 이발사를 거친 무학의 군인 출신으로 정권을 잡은 이후 미국의 비호하에 지식인 탄압, 부정부패, 보수 유산자 계급 옹호, 대학 폐쇄, 반대 세력 추방 등을 통해 정권을 공고히 해 나아가며 25년 넘게 장기 집권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 빈부격차, 부의 독점, 부정부패가 심화하면서 혁명이 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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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혁명이전, 미국과 쿠바

쿠바 하면 가장 먼저 뭐가 떠오르나요? 일반적으로 쿠바를 상징하는 여러 가지 이미지가 있죠. 시거(Cigar)나 야구, 복싱 같은 스포츠도 떠오르고 피델 까스뜨로, 체 게바라 같은 인물들도 있습니다. 살사도 많이 알려진 것 같아요. 춤이나 음악 등도 쿠바에 대한 대중적인 이미지가 아닐까 하는데, 어떻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쿠바 하면 정열적인 리듬과 춤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쿠바 출신의 가수들도 많지요. 좀 지난 시절의 사람으로는 닐 세다카(Neil Sedaka)를 비롯해 글로리아 에스테판(Gloria Estefan) 같은 가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쿠바가 춤이나 음악으로 알려지게 된 데에는 그 역사적 이유가 제법 깊습니다. 쿠바가 음악과 향락의 메카가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의 일입니다. 1900년대 초부터 쿠바 혁명 이전인 1958년까지, 이른바 미국에서 좀 논다, 돈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쿠바의 수도 아바나Habana였습니다. 쿠바는 다른 라틴아메리카에 비해 늦은 시기인 1898년에 독립했습니다. 그나마도 미국이 에스빠냐와의 전쟁에서 이긴 결과로 겨우 독립에 성공하게 된 거. 그러다 보니 당연히 미국에 대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의존이 엄청났습니다. 아바나에 각종 카지노가 생기고, 미국인들이 북적거리는 거의 미국의 작은 주처럼 되었습니다. 음악이나 춤도 이때 많이 개발, 보급되었죠. 카지노와 해변이 있고 술과 돈이 넘쳐나는데 춤과 음악이 빠질 수 없잖아요. 아무튼 우리가 알고 있는 쿠바의 춤과 음악은 독립과 더불어 1900년대 초부터 상업적으로 발전합니다.

이 점이 1959년 쿠바 혁명 이전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될겁니다. 쿠바 관광의 주 상대국, 아니 절대 고객인 미국에서 쿠바까지는 겨우 200킬로미터도 되지 않습니다. 쿠바 역시 미국과는 너무도 가까운 그러나 하느님과는 너무도 먼 나라가 되어갔지요. 한편 다른 산업도 절대적으로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쿠바에서는 전 세계 생산량의 30%가 넘는 사탕수수가 생산되었고, 생산량 대부분이 미국으로 수출되었습니다. 이런 전후좌우의 역사적인 배경과 현실적인 문제나 기타 다양한 관계로 볼 때 친미 성격의 정부 이외에는 존재할 수가 없었습니다.

미국 외교 정책의 기조가 언제나 그렇듯이 친미 성격이면 그 정부가 아무리 독재나 부정을 해도 이에 상관하지 않았죠. 오히려 미국의 비호하에 정권을 인정받아야 독재나 부정 축재가 가능했습니다. 그것을 재빨리 알아챈 독재 정권들은 미국에게 충성했고, 대가로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부패 정권을 인정받았습니다. 그 전형적인 예가 바로 쿠바 혁명 이전의 바띠스따Fulgencio Batista 정권입니다. 부패하고 무능했지만 미국에게 절대 충성함으로써 정권을 유지해 가던 바띠스따 정권이 유지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권을 민주와 민중의 이름으로 타도한 사건이 우리가 이번 장에서 관찰하려는 바로 쿠바 혁명입니다.

국가는 향락 산업으로 멍들어가고 농민들은 점점 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관광과 서비스 산업의 이익은 고스란히 미국 자본가의 손에 넘어가고 쿠바를 위한 국가 산업으로서의 원동력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였습니다. 민중은 의존적인 경제의 한계로 인한 희망 없는 미래를 감내해야 했고 간신히 연명이라도 하기 위해 사탕수수 농장에서 동물처럼 일했습니다. 정부는 부패했으며, 사회 전반에 걸친 부정의 고리는 민중의 삶을 파괴해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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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혁명이 들불처럼

쿠바 혁명의 원인은,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독립 이후 쿠바의 부정부패와 대내외적인 종속, 엘리트 그룹에 집중된 부, 그리고 이에 반하는 일반 민중들의 극한의 빈곤입니다. 한마디로 쿠바라고 하는 나라에는 두 개의 완전히 다른 세상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대다수 민중의 끔찍한 가난과 그에 반하는 엘리트 세력의 지독한 부의 독점과 향락이 함께 공존했던 것이지요. 이것은 혁명 시작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또한 혁명 성공의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혁명은 몽까다Moncada병영습격이라는 사건으로 구체화 되기 시작합니다. 1953726일은 쿠바 독립의 영웅이자 민족주의의 상징인 호세 마르띠José Martí의 탄생 100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이 상징적인 날을 디데이로 삼아 피델 까스뜨로Fidel Castro는 친미 바띠스따 정권을 무너뜨리려 몽까다 병영을 습격합니다. 그러나 별 힘도 못 써보고 이내 잡혀 구금됩니다. 그리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멕시코로 망명을 가게 됩니다. 그렇지만 멕시코에서도 쿠바 혁명의 꿈을 버리지 않습니다. 동지들을 규합하고 군사 훈련을 합니다. 그때 만난 동지 중에 쿠바 혁명의 상징이요 영웅인 체 게바라도 있습니다. 그렇게 멕시코에서 와신상담 혁명을 준비한 까스뜨로의 조촐한 군대는 19561125일 그란마Granma라고 하는 허름한 배로 멕시코 베라끄루스에서 출항해서 쿠바를 향합니다. 이 당시의 배 이름을 딴 신문이 지금 현재 쿠바의 가장 중요한 신문사의 이름이 됩니다: Granma

근데 이 배가 원래는 12인승으로 만들어졌는데 여기게 80여 명의 사람이 탔습니까? 당시 혁명군의 열악한 상황이 짐작됩니. 없는 돈에 간신히 사들인 낡고 작은 배에 형편없는 장비를 싣고, 그렇지만 용기와 의욕으로 넘쳐난 군대는, 결국 처음에 계획했던 곳이 아닌 엉뚱한 곳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나마도 바띠스따 군대에 발각되어 상륙과 더불어 대부분이 사살당하게 됩니다. 죽은 사람과 붙잡힌 사람을 제외하고 나니 처음에 82명으로 시작한 혁명군 중에 12명만 남게 됩니다.

겨우 전열을 정비해서 씨에라 마에스뜨라Sierra Maestra라는 꾸바섬의 동쪽 끝에 있는 산속으로 피해 들어갑니다. 그러나 희망도 없어 보이는 투쟁에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그들은 굴복하지 않았죠. 산속에서 게릴라전을 준비합니다. 이듬해인 1957116일을 기해 정부군의 요새를 기습하는 첫 군사작전을 펼칩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뉴욕타임즈에 혁명군 대장인 피델 까스뜨로의 인터뷰 기사가 실립니다. “우리들이 여기 살아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생각을 하는 자 우리를 따르라.”는 메시지가 울려 퍼진 것이지요. 그렇게 쿠바혁명은 급속도로 퍼지게 됩니다. 우리의 동학도 그렇게 퍼지고 이어져 대동세상이 만들어졌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봅니다. 우금치가 시에라 마드레가 되었더라면. 동학혁명과 비교할 만한 점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여기서 굳이 다 언급하지 않더라도 여러분들이 그러한 관점으로 생각을 연결시켜 이어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200~300명 정도의 소규모였지만 근처 주민들의 도움으로 세력을 키워갑니다. 사탕수수밭에서 온종일 일하는, 인생의 그 어떤 희망도 느껴 볼 수 없었던 무지렁이 농민들의 동참과 희생에 힘입어 혁명은 조금씩 나아갑니다. 미국의 그 많은 지원과 협조에도 바띠스따 정권은 혁명의 열기를 꺾지 못합니.

원래 혁명이란 민중에서 시작되고, 민중 그 자체이며, 민중의 도움 없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특히 장기간에 걸친 게릴라전이 이어진다면 게릴라의 처지에서는 일반 민중의 지지와 지원은 생존의 절대 관건이자 전투 성공의 결정적 요인이 됩니다. 앞에서 말한 혁명이전의 사회, 정치, 경제 분위기는 쿠바 혁명에 대한 민중들의 지지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기존의 부패한 친미 엘리트가 이끄는 바띠스따 정부군은 군사적으로 모든 유리한 조건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민심이 돌아선 상태에서의 싸움은 결과가 뻔했습니다. 세게 던진 공의 반동이 더욱 강력한 것처럼 바띠스따 정권이 부패한 만큼, 그리고 민중이 고통받은 만큼 쿠바 혁명에 대한 민중들의 지원은 더욱 열렬했습니다. 적은 인원으로 보잘것없이 무모하게 시작한 혁명은 활활 타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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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다섯: 혁명을 완수하라

195911일을 기해 드디어 쿠바 혁명군이 아바나를 빼앗음으로써 혁명은 성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점차 안정을 찾아 가지요. 외국 소유 농장들은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분배되고, 그렇게 혁명의 정신을 구현해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1960년에는 언론과 은행, 산업체를 국유화하고 주택을 징발하여 모든 국민의 기본적인 주거권을 보장합니다. 한편 교육의 국유화를 통해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의 차별 없이 모든 국민이 언제나 교육받을 권리를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무지렁이 백성들은 환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좋아한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겠죠. 기존 바띠스따 정권의 엘리트 그룹은 황당합니다. 그들은 돈이나 땅을 빼앗기거나 그냥 놔두고 미국의 마이애미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국은 바에 더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니 불만입니다. 미국의 자본가와 미국 정부의 이익이 상당 부분 훼손되는 상황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으로서는 충격이요 아픔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잘 먹고 잘살던 기존의 쿠바 기득권층도 정말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습니다.

미국이나 쿠바의 기득권 세력은 쿠바를 자신들의 반대 세력에게 고스란히 넘겨줄 수 없었습니다. 미국 마이애미로 도망 나온 쿠바 엘리트들과 보수 세력이 선봉에 서서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쿠바에 쳐들어갑니다. 물론 미국은 자신들이 직접 개입한 것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고 있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증거들로 볼 때 미국 정부는 직간접적으로 쿠바 공격을 시도합니다. 이것이 피그만 공격Invasión de bahía de Cochinos 혹은 히론 전투La Batalla de Girón라고 알려진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3일이 가지 못해 끝이 납니. 대부분의 반혁명 침입자들은 죽거나 붙잡히게 됩니다. 쿠바 민중의 의연한 저항 앞에 미국과 쿠바 보수주의자들의 야욕은 허사가 되고 맙니다.

쿠바 혁명정부는 사회주의 개혁을 이어나갑니다. 1972년 구 소련의 지원으로 사회주의 국가 경제 협력체인 COMECON에 가입하는 한편 사회주의적 성격을 가진 혁명을 지향하였던 앙골라에 1976년에서부터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기에 이릅니다. 즉 세계 사회주의의 수호자로서 전 세계에 자신들의 가치를 구현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합니다. 내부적으로는 개인 평균 수명이 선진국수준으로 올라가고,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무료 교육의 질이 담보되는 한편, 국가 스포츠는 활성화 되는 등 새로운 사회가 열리게 됩니다. 출생자 1,000명에 대한 생후 1년 미만의 사망자 수를 나타내는, 국가의 발전 정도를 가늠하는 영유아사망률에 있어서 쿠바가 라틴아메리카 국가 중 가장 낮은 수치를 보입니다. 볼리비아의 경우 60, 페루는 40명인데 반해 쿠바의 경우는 7명이 됩니다. 수치에서만 보더라도 가히 기적과 같은 이상국가가 탄생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결국 몇 차례에 걸친 우여곡절과 과도기를 거치면서 쿠바는 구소련과 손을 잡고 안정된 사회주의 정권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킵니다. 민중이 주도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최초로 성공을 거둔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쿠바라는 국가의 모든 것을 뒤바꾼 그야말로 혁명이었습니다. 이제까지 몇백 년간을, 특히 쿠바의 경우 노예로 팔려 온 흑인들은 바꿀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이 사회적인 신분과 경제적인 바닥 생활을 당연한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혁명의 성공과 더불어 영원히 변할 것 같지 않던 수직적인 착취 구조가 사라졌습니다. 그야말로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이죠.

그러나 이후 19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구소련의 몰락과 더불어 쿠바의 경제도 어려움에 부닥치게 됩니다. 미국의 지속적인 경제압박은 사회주의 경제블록의 쇠퇴와 더불어 쿠바의 국가 경제뿐만 아니라 개인 경제마저도 추락시킵니다. 그들이 내세웠던 모든 국민이 풍요롭고 행복한 나라는 이렇게 붕괴하는 것인가 하는 우려마저 생겨납니다. 1979~1980년에는 쿠바에서 출발한 125,000명의 보트피플이 미국에 상륙하는가 하면 같은 해인 1980년에만도 1만 명의 쿠바인이 페루로 망명하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혼란을 거듭하며 금방이라도 붕괴할 것 같던 쿠바지만 그들의 이상을, 혁명정신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모두 다 같이 먹고, 모두 다 같이 교육받으며 건강할 권리가 있는 세상을 유지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씁니다. 식량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도시생태 농업을 실시하는 한편 외국인의 투자를 받아들이는 것을 골자로 자본주의적인 요소를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즉 국가의 기본적인 틀은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고립된 사회주의 경제에 활력을 주기 위해 자본주의적 요소를 과감하게 받아들이는 실험을 단행하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제한적인 시도가 과연 어떤 결론으로 이어질지는 아직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21세기를 맞으며 외국인 투자가 늘고 관광이 활성화되는 한편 자본주의 경제가 큰 무리가 없이 이식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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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여섯: 혁명이 세상을 바꾸다

쿠바 혁명의 의의와 가치는 독재 정부의 붕괴와 쿠바 민중의 승리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국내외에서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내부에서는 빈부격차가 극심하던 사회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드는, 모든 것을 다 바꾸는 개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외부의 변화도 큰 의의가 있습니다. 쿠바 혁명을 지켜본 주변 나라들은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요? 멕시코, 아르헨티나, 니카라과의 사람들이 쿠바 혁명의 성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잘 사는 사람들은 아이고, 무서워라. 우리나라도 저 무식한 노동자, 농민들이 저런 식으로 혁명하면 어쩌나하고 겁을 먹었을 테고, 민중들은 ! 대단하다! 저들이 해냈구나! 저렇게 하면 우리도 차별받지 않고 살 수 있겠구나. 신분의 귀천에 따라, 피부 색깔에 따라, 엄청난 기득권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눈 역사의 굴레를 깰 수 있겠구나하고 생각했겠죠. 안 그렇겠습니까! 지금까지 500년 동안 노예나 하인처럼 살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세상의 주인이 되는 모습을 보았는데요.

우리나라의 동학이나 천주교의 전파, 활빈당이나 정여립의 대동계 등도 이와 같은 맥락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은 귀천이 없다. 우리는 왜 항상 굶어 죽고, 저 사람들은 항상 배터지게 먹고 방귀만 뀌냐. 이건 잘못된 거다.” 이런 생각으로 시작한 혁명이 성공해서 이제까지 머슴 살던 사람이 양반과 똑같이 먹고 똑같은 대우를 받는 사회가 이웃 나라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얼마나 빨리 퍼졌겠습니까. 라틴아메리카는 서로 같은 말을 쓰지요, 게다가 원래 국경의 개념도 다른 곳에 비하여 약합니다. 서로 문화면에서도 같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러한 소식과 분위기가 얼마나 급속도로 전파되었겠습니까. 전체 라틴아메리카 사회에 말입니다. 쿠바 혁명은 결과적으로 라틴아메리카 게릴라 운동의 시발점이 됩니다.

앞에서 멕시코 혁명이 보수적으로 끝났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혁명의 정신이 여러 면에서 헌법에도 반영되고, 국가 통치 이념에도 반영되었다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사회 전체를 바꾸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실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사회주의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멕시코 혁명을 중단된 혁명Revolución interrumpida, 계속 진행되고 있는 혁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실패라는 거지요.

에비따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정치적으로 제도권 내에서 라틴아메리카 500여 년의 불평등과 착취의 관계를 해결해 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실패로 그치고 맙니다. 다른 나라들이라고 왜 이러한 노력과 저항을 안 했겠습니까. 많은 시도가 있었습니다. 교육을 통한, 정치를 통한, 경제를 통한 혁명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곳에서도 이제까지의 그 지긋지긋한 모순을 타파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쿠바에서 훌륭하게 모든 기득권을 무너트리고 민중이 승리한 것입니다. 게다가 그에 그치지 않고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대졸자의 수가 가장 많고, 문맹자의 수가 가장 적고, 국민 의료 보험 제도가 가장 잘 되어 있고, 국민 스포츠가 발전하는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한 것입니다. 바로 혁명을 통해서 말입니다. 까스뜨로와 체 게바라가 홍길동이 되어 부패한 양반을 때려잡아 모든 사람이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든 것입니다. 물론 새로운 소련에 대한 종속과 같은 내면의 문제점과 한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모든 국민이 높은 생활의 질을 가진 이상적인 국가가 기존의 라틴아메리카적인 모순을 극복하고 처음으로 탄생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쿠바 혁명의 가장 중요한 의미이고, 이러한 점이 주변 라틴아메리카에 미친 파장은 엄청났으리라는 점을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필자는 쿠바 혁명을 얘기할 때면 가슴이 벅찹니다. 필자가 좀 무늬만 빨갱이 기질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참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필자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체 게바라 관련 책이 팔리는 거 아니겠어요? 영화로 치면 이 부분이 극적인 클라이맥스에 해당합니다. 학교는커녕 굶어 죽는 자식들을 속수무책으로 봐오던 깜둥이 쿠바 아저씨의 아들이 대학을 나와 자랑스럽게 정부의 관리가 되는 사회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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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일곱: 피델까스뜨로는 누구인가?

피델 까스뜨로(1926~ 2016)는 쿠바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극대화되던 시기인 1920년대에 태어났습니다. 전형적인 중산층 집안으로 그의 아버지는 에스빠냐 갈리시아 지방에서 이주해 와서 쿠바의 독립을 위해 투쟁도 하였고, 이후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을 하며 많은 자식을 낳았는데 그 중에 한명이 피델까스뜨로 였습니다. 어린시절부터 종교를 거부한다던가 기숙학교에서 퇴학을 당하는 등의 저항적인 기질을 보여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운동하기 좋아하고 공부는 뒷전인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법률에 대한 열정을 발견하게 되어 법학 공부를 하겠다고 아바나 대학에 입학하게 됩니다. 결국 1945년 아바나 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됩니다. 그런데 그의 저항적이고 사회비판적인 기질이 대학을 다닐 때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학생 신분으로 여러 가지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독재자 트루히요가 이웃 국가인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민중들을 탄압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를 타도하겠다고 직접 참여한 일도 있을 정도입니다. 1947년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48콜롬비아 보고타에서 발생한 도시 폭동 사건에도 개입합니다.

이렇게 청년 피델은 핍박받는 민중을 위해 그리고 사회정의 구현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키워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자기가 살고 있는 쿠바의 현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결국 그는 거사를 계획합니다. 그게 그 유명한 몽까다 병영Cuartel Moncada 습격사건입니다. 쿠바 혁명의 상징적인 시작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19537월 뜻을 같이 하는 동지 156명과 함께 쿠바의 산티아고에 있는 군사 시설인 몬카다 병영을 습격합니다. 그러나 혈기 왕성함 만으로 무장한 그들의 계획은 좌절하게 됩니다. 결국 피델은 실패하고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그러나 대내외적인 민주화 분위기에 힘입어 1955년 특사로 풀려나게 됩니다.

그렇지만 쿠바의 당시 정치적인 분위기나 치안 상황으로 볼 때 언제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옆 나라인 멕시코로 망명을 갑니다. 그리고 그것에서 사람들을 모아 다시 쿠바에 들어가 무장투쟁을 할 준비를 합니다. 그렇게 혁명 준비과정을 거쳐 그란마라는 배를 타고 쿠바에 상륙하고, 수년간의 게릴라 활동을 거쳐 혁명을 완수한 것입니다. 1959년 바티스따 정권을 무너뜨리고 총리가 되었고 피델 스타일의 정치, 사회, 경제 개혁을 단행하며 죽기 전까지 쿠바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생전 그는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이기도 했으며 역시 가장 비판받는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서방국가들은 그를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나 사회주의적 신념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는 존경받는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암살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으며 실제로 여러 차례 위기를 모면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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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여덟: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Seamos realistas, soñemos lo imposible.

체 게바라(1928~1967) 라고 하는 인물은 21세기 들어 소위 포스트모던적인 정치와 사회 문화 대안과 담론이 주목받으면서 우리들에게 더욱 친숙하게 다가선 인물입니다. 농담 반 진담 반이기는 하지만, 일단 잘 생겨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잘생겼더라도 어디 그거 하나 가지고 그렇게 유명해질 수 있는 건 아니겠지요. 하여간 잘생긴 것은 덤이고 그의 생각과 그 생각을 가지고 했던 행동이 많은 사람을 감동하게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체게바라’, 혹은 중남미 사람들은 간단하게 애칭으로 라고도 부르는 그의 본명은 에르네스또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Guevara de La Serna, 1928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에스빠냐-아일랜드 혈통의 중류 가정에서 5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는데 뭐 그렇게 건강하고 특출난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병치레가 잦아 천식을 앓았으나 운동을 좋아했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1953년에 아르헨티나의 의과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공식적으로 의사가 된 셈이지요. 그리고는 젊은 시절 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많은 체험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경험이 바탕이 되어 민중들의 고난한 삶을 인식하게 되었고 그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그는 모순된 세상의 문제를 행동으로 바로잡아 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중미의 작은 나라 과테말라에 가서 첫 현실 참여를 시작합니다. 당시의 과테말라는 하코보 아르벤스Jacobo Árbenz라는 대통령에 의하여 가난하고 핍박받는 민중을 위한 정치운동이 시도되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는 농지개혁과 같은 사회주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미국 소유의 대농장을 국유화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정권이 미국의 국익에 저해된다고 생각해 갖은 압박을 가해 결국은 아르벤스를 하야시킵니다. 과테말라의 민중들은 절망합니다. 이들과 같이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동참하고 싶었던 체 게바라도 설 자리를 잃습니다. 그리고는 멕시코로 가게 됩니다.

가난한 이들의 해방을 위해서는 더 구체적이고 계획적으로 투쟁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핍박받는 사람들이 해방되는데 미국이라는 나라는 그리고 기득권 세력은 결국 양보하거나 타협하기 힘든 장애물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 계기도 됩니다. 즉 과테말라의 정의로운 정부가 무력에 의하여, 기득권의 탐욕에 의하여 무참하게 짓밟히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보면서 청년 체 게바라는 무장 혁명은 필연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일 테지.

그리고 멕시코에서 쿠바를 등지고 망명해 온 피델 까스뜨로와 그의 동생 라울 까스뜨로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그들과 함께 쿠바 혁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초기 전투에서 부상을 입는 등 많은 역경이 있었지만, 그는 까스뜨로가 가장 신뢰하는 동료 중 한 명이 되어 혁명의 성공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원래 아르헨티나 국적이었던 그가 혁명 성공 이후 쿠바 시민이 되었고 쿠바 국립은행 총재와 산업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안정된 쿠바 생활은 그의 가슴속에 불타고 있던 열정을 완전히 끄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핍박받는 이들을 위해 무엇인가 좀 더 구체적인 것을 하고 싶다는 그의 열망은 또 다른 세계에 눈을 돌리게 만듭니다. 그렇게 그는 안정되고 행복할 수 있는 쿠바의 생활을 박차고 1965년 다른 혁명가들과 함께 아프리카 콩고로갑니다. 민중의 해방을 원하는 혁명 세력을 도와 콩고 내전에 참여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핍박받는 사람들이 단 한 명도 없을 그 날까지 투쟁하겠다는 그의 생각은 어처구니없는 극단적 이상이지만 그러한 일을 실현하고자 스스로 편안함과 명예를 모두 뒤로하고 목숨을 바쳐가며 투쟁한다는 것이 가히 인간으로서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지요. 그러나 그는 그렇게 그의 행보를 이어갑니다.

1966년 가을에는 콩고에서 반란군 교육을 하고 이후에는 다시 남미의 볼리비아로 갑니다. 그곳에서 게릴라 부대를 조직하여 지휘합니다. 그의 쿠바 혁명에서의 경험을 살려 민중 게릴라들을 교육하고 지휘한 것입니다. 그러나 볼리비아의 상황은 아직 혁명이 충분히 열매 맺기시기상조였던 것 같습니다. 결국 1967108일 미국이 특별히 신경을 써서 지원하는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하여 체 게바라의 부대는 괴멸당하게 됩니다. 그는 부상을 입고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때 그가 한 말이 다음과 같이 남아있습니다.

너가 나를 죽이려고 온 것을 난 알고 있어. 어서 쏴! 겁쟁이야! 너는 오늘 그저 한 사람을 죽일 뿐이야 ... 다른 누군가가 내 총을 들고 계속해서 혁명을 이어간다면, 나는 이렇게 죽어도 그만이야.”

그렇게 그는 40세의 나이에 가난하고 핍박받는 민초가 단 한 명도 없는 세상을 꿈꾸며 숨을 거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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