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부 역사의 빨레오그라피아

마야사료는 왜곡된 마야역사의 시작점이요, 새로운 마야문명 이해의 가능성이다. (빨레오그라피아 : 고문서 판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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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연구를 위한 사료의 종류

 

마야의 책과 사료는 마야사회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된다. 학문적인 차원에서 연구의 시작 역시 사료에 대한 접근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한국 역사에서 삼국시대를 공부하기 위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을 필수적으로 공부해야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제까지 유럽적인 역사시각으로 조명되어지던 중남미 고대사가 한국인에게 온전히 이해되어지기 위해서는 역사 연구의 가장 근간이 되는 사료들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에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 따라서 마야에 대한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시각으로 기본 사료를 이해해야 한다. 마야사 연구의 역사에서도 사료연구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여 왔다. 따라서 이번 장에서는 마야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사료에는 어떠한 것이 있으며 그 내용과 특징들은 무엇인가를 알아보도록 하자. 이해를 돕기 위하여 에스빠냐인 사료와 원주민 사료로 나누고, 에스빠냐인 사료는 그 사료를 쓴 사람들에 따라 시각이 다르다는 특징에 따라 연대기 학자들의 사료, 정복자들의 사료, 가톨릭 선교사들의 사료, 그리고 기타로 분류하였다. 원주민 사료는 정복 이전시기에 만들어진 사료와 이후에 만들어진 사료로 나누어보겠는데, 정복 이후 사료들은 기록자체가 에스빠냐어의 알파벳을 빌어 사용하였다는 점과 그 내용이 필연적으로 많건 적건 유럽적인 영향이 있었다는 점에서 정복 이전 사료와는 차이를 둘 수 있겠다.

 

에스빠냐인 사료

1. 연대기 학자들의 사료

뻬드로 마르띨 데 앙글레리아 (Pedro Mtir de Angler, 1455 혹은 1459~1526)

대표작: Dadas del Nuevo Mundo

생애: 귀족집안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전형적인 엘리트 교육을 받았으며 로마를 방문하는 등 많은 여행 경험을 통해 해박한 지식을 축적하였다. 까를로스 황제 시절인 1518년 인디아스 자문 위원회(Consejo de las Indias)의 위원장직을 맡게 되면서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고 저작활동을 하게 된다. 당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인디아스 자문 위원회의 위원장직으로 있으면서 그는 끄리스또발 꼴론(Cristobal Col)이나 아메리고 베스뿌치(Amerigo Vespucio) 등 많은 탐험가 등과 개인적인 친분을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대륙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적으로 수집, 정리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가지게 되었다.

내용 및 작품특징: 인디아스 자문위원회 위원장의 경험을 통해 축적한 많은 지식과 자료를 이용하여 아메리카대륙 발견과 침략에서부터 아메리카대륙의 원주민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적고 있는데 이중 마야에 관한 내용도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대표작인 Dadas del Nuevo Mundo는 라틴어로 쓰여진 최초의 아메리카대륙 원주민들의 종합적인 역사와 문화를 다룬 저작물이라 할 수 있다. 라틴어로 된 원본이 식민지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아메리카 원주민문화와 식민지배의 역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서 이용되어 에스빠냐어, 불어, 이태리어, 독어, 홀랜드어 등으로 번역 소개되었다.

 

바르똘로메 데 라스 까사스 (Bartolom?de Las Casas, 1474~1566)

대표작: Apologica Historia Sumaria,

Historia de las Indias,

Brevisima relacide la destruccide las Indias

생애: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에스빠냐에서 군인생활을 했다. 1502, 아메리카대륙으로 건너가 원주민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선교하다가 결국은 사제가 된다. 항상 원주민들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여 많은 아메리카대륙의 원주민들로부터 인디오의 아버지로 칭송받았다. 그는 대다수의 정복자들이 원주민들을 마치 동물과 같이 취급하는 현실을 고발하여 시정하려 하였다. 이러한 현실을 에스빠냐의 황제에게 여러 차례 진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의견을 달리하는 사제들과도 많은 논쟁을 벌였다. 그 중에서도 쎄뿔베다(Juan Ginde Sepulveda)라는 신부와의 논쟁은 유명하다. 한때 현재의 베네수엘라에서 에스빠냐 사람과 원주민들이 함께 사는 사회를 건설하려는 이상을 실현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게 된다.

내용 및 작품특징: 그의 생애와 마찬가지로 그의 저술 역시 원주민들의 가치를 인정하고 보호해 주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원주민들의 가치 중에서 종교적인 부분만은 수용할 수 없었으나 다른 부분은 훌륭한 인간으로서의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한 유럽 사람들은 이곳의 원주민들을 인간으로 간주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부터 갈등을 하였다. 비록 공식적으로 교황청에 의하여 이들이 유럽 사람들과 같은 인간임이 인증되었지만 당시의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을 유럽인에 비해 하등한 인간으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라스 까사스의 Brevisima relacide la destruccide las Indias와 같은 작품에서는 첫 부분부터 이들이 정상적이고 착한 인간이란 점을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Casas, 1989, 33~34). 전반적으로 라스 까사스의 글에는 이러한 경향이 깊게 흐르고 있다. 그러나 원주민들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하여 과장된 부분이 많았으며 이상주의적 시각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주장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Historia de las Indias는 끄리스또발 꼴론(Cristobal Col)의 아메리카대륙 탐험에서부터 시작해서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에 대하여 많이 다루고 있다. Apologica Historia Sumaria는 원주민들을 변호하기 위한 저작으로서 광범위하게 원주민들의 전통과 풍습, 특성 등을 보여주어 이들도 유럽인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리려는 의도로 제작되었다. 따라서 일반 원주민들의 전반적인 생활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Brevisima relacide la destruccide las Indias는 에스빠냐 사람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얼마나 잔인하게, 신의 뜻에 어긋나게 원주민들을 혹사시켰는가를 고발하는 글이다.

 

프란시스꼬 로뻬스 데 고마라 (Francisco Lez de Gara, 1511?~1566 혹은 1562?)

대표작: Historia General de las Indias

생애: 멕시코를 정복한 꼬르떼스(HernCort) 장군의 전속 사제를 지냈다. 아르헬(Argel)에서 에르난 꼬르떼스를 만나게 되고 이것을 계기로 그의 전속 사제직을 맡게 된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아메리카대륙에 건너가 본적이 없다. 세고비아 대학의 교수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내용 및 작품특징: 정복자들과 선원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와 이들의 기록, 보고서 등을 토대로 저술하였다. 그는 한번도 아메리카대륙에 가본 적 없이 그곳의 정복과정, 역사와 문화 등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종합적으로 남긴 사람으로 아메리카대륙 최초의 인류학자라는 평을 듣고 있다. 그러나 많은 부분 꼬르떼스의 저술을 그대로 베낀 흔적이 보인다. 게다가 그의 작품은 세상에 빛을 본지 얼마 되지 않아 공식적으로 금서가 된다(1533). 이에 대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시의 정황으로 봤을 때 그가 쎄뿔베다와 같이 원주민들을 수탈하는 것에 대한 필요성을 합리화한 점에서 라스 까사스와의 분쟁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닌가 하는 예상을 해볼 수 있다(Esteve, 111). 1527년 이후 꼬르떼스의 편지가 금지를 당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말년에 Anales de Carlos V라는 에스빠냐 왕가를 다룬 작품을 쓰기도 하였다. Historia General de las Indias는 꼴론의 항해, 페루의 침공, 아메리카 각 지역 원주민들의 문화에 대해 적고 있는 1부와 에르난 꼬르떼스 장군이 메시까를 정복한 과정을 다루고 있는 2부로 나누어져 있다. 1522년에 이 2권의 책이 통권으로 출판되어 오늘날 한권의 책으로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내용면으로 보거나 본인 스스로가 쪽수를 붙인 것으로 보아 1부와 2부를 별개의 책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의 문체는 상대적으로 라스 까사스의 것과 비교하여 평이하고 이해하기 쉽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호세 데 아꼬스따 (Jos?de Acosta, 1539~1600)

대표작: Historia Natural y Moral de las Indias

생애: 신부가 되기 위한 교육을 어려서부터 받아 수도승의 일생을 산다. 가톨릭에서 총망을 받던 학생으로 유럽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많은 경험을 하게 되고, 19세기 경에 이르러 아메리카대륙으로 건너가게 되는데 젊은 아꼬스따는 그곳에 커다란 매력을 느끼게 된다. 페루의 아레끼빠(Arequipa)와 라 빠스(La Paz)1)(각주1_ “라 빠스(La Paz)”는 당시에 페루 부왕청 관할이었지만 지금은 볼리비아에 속해 있다. ) 지역에서 원주민들의 선교활동에 힘쓰게 되는데, 이때 그들의 문화와 전통종교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하게 되었다.

내용 및 작품특징: 아메리카대륙에서의 풍부한 경험이 바탕이 된 그의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큰 의미를 가진다. 그의 주요활동무대가 페루였기 때문에 마야지역과 직접 관련된 내용은 상대적으로 적다. 그러나 원주민에 대한 당시의 신학적인 접근이 어떠하였는가를 그의 저술을 통해 잘 이해할 수 있으며 에스빠냐에 돌아가기 위해 들른 적이 있는 멕시코 지역의 원주민에 대하여도 여러 부분 기술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총 7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내용은 작품의 제목이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자연의 역사(Historia Natural)에 해당하는 아메리카대륙의 자연환경에 관련한 부분이 앞의 4장에 걸쳐서 설명되어 있고, 후반부의 3장은 윤리의 역사(Historia Moral)로 그러한 자연환경에서 살고 있는 원주민들의 관습에 대하여 적고 있다.

프란시스꼬 하비엘 끌라비헤로 (Francisco Javier Clavijero, 1731~1787)

대표작: Historia Antigua de Mico

생애: 그는 다른 어떤 연대기 학자와 비교하여도 후대 사람이다. 또한 특이하게도 에스빠냐 태생이 아니라 멕시코에서 태어난 끄리올요(Criollo) 출신이다. 1731년 멕시코 제일의 항구였던 베라끄루스(Veracruz)에서 태어났다. 멕시코 수도에 있던 산 헤로니모(San Jeronimo)와 산 이그나시오(San Ignacio)학교에서 수학하였고 1748년에는 예수회 신부가 되었다. 그는 당대 신학과 철학분야에서 -신대륙의 사제 중에서도 - 거물로 평가받을 정도로 이 분야에 대한 학문적인 업적을 인정받는 신부였다. 이후 이탈리아로 건너가 여생을 그곳에서 마쳤다.

내용 및 작품특징: Historia Antigua de Mico의 원본은 그가 이탈리아에서 살던 말기에 쓰여졌다. 원본은 에스빠냐어로 쓰여졌으나 최초의 출판은 이탈리아어로 하게 돼서 이때 이미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었다. 이 작품은 작가의 고향에 대한 향수를 학문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여러 자료들을 모아 이 책을 만들게 되었다. 에르난 꼬르떼스의 Cartas de Relaci이나 프란시스꼬 로뻬스 데 고마라의 Historia General de las Indias등의 작품이 끌라비헤로 작품의 중요한 정보제공원이 되고 있다. 그러나 작가 스스로 역사의식을 가지고 서술한 부분도 많은데 당대 존재하였던 많은 사료들을 바탕으로 역사를 기술하고 이에 대한 종합적인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단순한 과거 자료에 대한 편집의 수준을 넘어 역사책으로서의 중요한 의미도 같이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를 멕시코 최초의 역사학자라고 평하기도 한다.

 

2. 정복자들의 사료

뻬드로 데 알바라도 (Pedro de Alvarado, 1485~1541)

대표작: 그의 기록은 단행본으로 출판되지 않고 다음 책의 한 부분 형식으로 출판되었다. Libro Viejo de la Fundacide Guatemala y Papeles Relativos a Don Pedro de Alvarado

생애: 그는 1510년 쿠바의 산또 도밍고(Santo Domingo)에 도착하여 아메리카 생활의 막을 열었다. 1518년에는 후안 데 그리할바(Juan de Grijalva) 장군을 따라 대륙의 탐사에 나서기도 하였으며 당시의 경험을 인정받아 메시까(아즈떼까)정복을 이룬 꼬르떼스를 수행하게 된다. 꼬르떼스의 총애를 받아 메시까 정복을 성공리에 이끄는데 가장 많은 공헌을 한 장수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본격적으로 자신이 총대장이 되어 과테말라지역의 마야정복에 나서게 된다. 1523년 과테말라의 끼체와 깍치등 중요한 부족들을 정복하는데 성공, 이때 만들어진 현재의 안띠구아(Antigua)시는 과테말라와 중앙아메리카 지역을 통괄하는 식민지사업의 본고지가 된다. 알바라도는 1527~ 1531년 이곳의 총독을 지냈다. 그러나 그 역시 다른 정복자들과 마찬가지로 계속되는 야망과 이에 따른 에스빠냐 정부와의 갈등을 겪으면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는 힘든 생활 끝에 결국 멕시코 중부지역에서 발생한 원주민 봉기진압 과정에서 죽게 된다.

내용 및 작품특징: 마야지역을 본격적으로 정복한 사람으로 정복시기에 적은 글들을 통해 당시에 살고 있던 마야 사람들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면들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뽀뽈부라는 창조신화로 일반에 잘 알려진 과테말라 고원지방의 끼체, 깍치족 정복 당시 상황이 잘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전쟁에 관한 기록이 많고 문화적인 면에 대한 언급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에르난 꼬르떼스 (HernCort, 1485~1547)

대표작: Cartas de Relaci

생애: 꼬르떼스는 아메리카대륙의 문명을 본격적으로 정복한 최초의 장군이다. 그는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살라망카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세 때 쿠바로 건너가 신대륙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준비하던 중 1519, 병사 508명과 말 16필을 가지고 메시까 정복길에 오른다. 아메리카 정복이 항상 그러하였던 것처럼 많은 원주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뜻을 이룬 후 1523, 자신이 정복한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무훈(武勳)에도 불구하고 1526년에 월권(越權)으로 파면되어 본국에 소환되었다. 1540년 귀국한 후에도 에스빠냐정부의 미움을 받아 결국 불행한 최후를 맞게 된다.

내용 및 작품특징: 정복자로서 에스빠냐의 황제나 쿠바의 부황에게 보낸 편지들이 오늘날까지도 남아있어 메시까정복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해 볼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사료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는데 이를 모아 출판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정복의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사료라는 데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정복대의 대장으로서 자신의 무공을 과장하기 위해 현실을 왜곡했을 가능성이 많다. 특히 그가 감행한 메시까 정복은 당시로서는 불법적인 행위였다. 그는 단순히 해안 근처의 정찰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다. 그러나 차츰 욕심이 생겨 명령을 어기고 정복을 시도한 것으로서 이러한 자신의 불법적인 행위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많은 부분 당시의 상황을 왜곡하고 있다.

 

베르날 디아스 델 까스띨요 (Bernal Dz del Castillo, 1492~?)

대표작: Historia de la Conquista de Nueva Espa

생애: 메디나 데 깜뽀(Medina de Campo)라는 지방의 시의원 집안에서 태어났다. 22세에 아메리카대륙으로 건너가 1517년 꼬르도바, 1518년 그리할바, 1519년 꼬르떼스로 이어지는 메시까 정복의 준비단계에 모두 참여하게 된다. 그는 정복을 수행한 장군들과는 달리 평범한 병사로 이 과정에 동참하여 정쟁(政爭)이나 논란에 직접적으로 휩싸이는 일이 적었다. 그래서 잘 알려진 정복자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순탄한 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정복 이후 여러 지역의 땅을 하사 받았고 이에 대한 소유권관련 분쟁이 있기는 하였지만 이를 잘 해결하고 자신의 땅과 권리를 지키며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43세의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였고 슬하에 많은 자녀와 손자, 손녀들을 거느린 다복한 집안을 이루면서 과테말라 지역의 부호로 최후를 마쳤다.

내용 및 작품특징: 메시까 정복의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한 사람으로 생동감 있는 정복의 역사를 쓰고 있다는 점이 그의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각 내용을 꼬르떼스의 기록보다 더욱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 역시 그의 저술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 책의 양이 방대하여 멕시코 정복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재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현장에서 쓰인 종군 일기식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이미 늙은 후에 과거의 화려한 경험에 대하여 쓰기 시작하여 1557년경에 책의 대부분을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즉 정복시기가 훨씬 지난 후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적은 글이다. 그는 정복사의 중요한 인물로서 그의 자식들과 손자 혹은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용담을 항상 들려주었고 이를 책으로 만들게 된 것이다. 물론 옛날의 기억이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다(재인용, Esteve, 162)” 라고 책에 쓰고 있지만 날짜나 숫자 등의 정확성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또한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뽐내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과장과 왜곡이 없었다고 보기 힘들다. 또 하나 이 기록의 사실성을 약하게 하는 이유로 꼽고 있는 것이 그의 꼬르떼스 장군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과 충성심이다. 그는 의롭고 용감한 사나이의 표본으로 꼬르떼스 장군을 따르고 섬긴 사람이다. 당연히 정복사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고 있는 꼬르떼스의 명예를 손상시킬 수 있는 내용, 그의 판단이나 업적을 냉정히 평가하는 부분이 까스띨요의 저술에 나타나기 힘들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3. 가톨릭 선교사들의 사료

프라이 디에고 데 란다(Fray Diego de Landa, 1524~1579)

대표작: Relacide las cosas de Yucat

생애: 프라이 디에고 데 란다(Fray Diego de Landa)16세기에 아메리카대륙에서 활동한 에스빠냐의 신부로서 초기 식민지시대에 멕시코로 건너가 평생을 바쳐 마야 원주민들의 포교와 그들에 대한 저술활동에 힘을 쏟았다. 그는 1524년 에스빠냐의 씨푸엔떼스(Cifuentes)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17세의 나이에 프란시스꼬 수도회에 들어가 신부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1549년 아메리카대륙에 건너가게 되는데 이때 이미 마야지역은 몬떼호(Montejo) 장군에 의하여 1520년대 이후부터 정복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1540년대 이후에는 많은 지역이 에스빠냐에 의하여 복속되었다. 따라서 란다가 이곳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본격적으로 성당이 세워지고 수도사들에 의하여 포교 활동이 시작되던 시기이다. 란다 역시 이의 일환으로 유까딴 지역에 도착하였으며 1552년 이사말(Izamal)의 주임신부로 부임하는 것을 시작으로 마야 원주민들과 인연을 맺게 된다. 1573년에는 당시 유까딴 지역 가톨릭의 최고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메리다의 대주교가 되었다. 이제 막 새롭게 접하는 사람들의 포교를 위해서 신부들은 원주민들의 언어와 관습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란다 역시 종교적인 필요에 의하여 이들의 생활과 언어 등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현지 생활을 바탕으로 한 경험과 학문적인 호기심 등이 만나 란다의 마야이야기(Relacide las cosas de Yucat)”라는 대작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그는 이 책을 마침과 함께 자신의 고향인 에스빠냐로 돌아가 157955세의 나이로 쓸쓸히 여생을 마친다.

집필이나 행적에서 보여주는 그의 입장은 철저히 원주민들을 이교도로 규정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우주관과 세계관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가장 귀중한 마야의 사료를 만든 동시에 마야의 수많은 책들을 우상 숭배의 도구들이라고 규정하고 불사른 장본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마야의 책들은 유일하게 3권이며(Cide Madrid, Cide Dresde, Cide Paris) 이나마 자료의 부족으로 완전한 해석이 불가능하다. 결국 이러한 탄압을 선봉에서 지휘한 장본인인 란다가 만들어 놓은 책이 고대 마야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는 아이러니를 가지게 된다.

내용 및 작품특징: 책의 내용을 보면 앞부분은 멕시코 마야 원주민들이 사는 땅의 자연환경에 대한 기술에서부터 시작되어 에스빠냐인들이 이곳을 어떻게 발견, 정복하게 되었고 이곳 지명의 유래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본론에서는 이들의 건축과 종교, 문자, 관습, 역사, 생활 등을 구체적이고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는데 이것들은 한 자 한 자가 마야에 대한 가장 중요한 자료로서 인정되고 있을 정도로 학문적인 비중이 크다. 이러한 내용들은 란다 스스로가 보고 느낀 것을 토대로 꼬꼼(Machi Cocom)이나 가스빨 안또니오 치(Gaspar Antonio Chi)와 같은 원주민 지도자들과의 문답을 통해 자료를 정리하여 집필한 것이다. 시기적으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략적으로 1560년경에서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10여 년 이상의 기간이 걸렸던 것으로 보인다. 불행하게도 원본은 현재까지 남아있지 않고 원본을 보고 적은 1616년의 요약 필사본만이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은 그 중요성으로 인하여 식민지시대의 여러 자료에 언급이 되어 있으며 산체스 데 아길라(Schez de Aguilar), 로뻬스 데 고마라(Lez de Gara), 라스 까사스(Las Casas) 등과 같은 사람들의 기록에 그의 원본에 대한 언급이 나타난다. 이 책은 그가 활동하였던 메리다의 산 프란시스꼬(San Francisco) 성당에 있었으나 지금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불행 중 다행히도 프랑스의 사학자인 브라쉘(Brasseur de Bourbourg)에 의하여 마드리드 역사학교 박물관(Biblioteca de la Academia de la Historia de Madrid)에서 위에 말한 필사본이 발견되어 1864년 처음으로 발간되기에 이르렀다.

란다의 마야이야기(Relacide las cosas de Yucat)”는 문학이나 학술적인 면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중남미 고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서적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본인의 주장이 아니요, 많은 관계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라는 것이 이 책의 번역의 역사에서도 잘 보여진다. 이미 19세기에서부터 이 책은 세계 각 국어로 번역이 되었으며 마야지역을 여행하는 일반 관광객에서부터 학자, 문인에 이르기까지 실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역사적인 자료뿐만 아니라 하나의 문학작품으로도 폭넓게 읽히고 있다. 이 작품을 굳이 우리나라의 책과 비교한다면 역사사료로 잘 알려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작품이지만 이러한 서적의 난해함과 딱딱함에 비한다면 란다의 마야이야기는 역사적인 증언을 하고 있는 기행문이나 감상문의 성격도 상당히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읽는 이로 하여금 많은 흥미와 관심을 유발시킬 뿐만 아니라 그 필체도 유려하여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 더욱더 문학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이 책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것은 희소성에서도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아즈텍이라고 불리는 메시까(Mexica)나 남아메리카의 잉까(Inca)문명 등은 상대적으로 더욱 많은 사료와 기록들이 남아 있는 반면, 마야를 연구하기 위한 식민지 초기의 종합적인 1차 사료는 여기에 소개하고 있는 란다의 마야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종합사료이다.

이 작품이 가지는 또 다른 중요한 의의로 기록의 정확성과 종합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정복 전쟁이 끝나고 식민지화가 막 시작된 마야 사람들과 이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자연 등을 세밀하게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이 책이 가지는 역사적인 의의는 실로 크다. 그는 유까딴 지역에서 직접 생활하면서 그들의 생활을 보고 느꼈으며, 그러한 것들을 하나하나 사실적으로 기록하였다. 물론 그의 주관적인 세계관과 종교관이 많이 들어 간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점이 작가로서 가지는 인디오에 대한 애증(愛憎)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단순한 보고서나 역사기록과는 조금 다른 문학적인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원본은 16세기 에스빠냐어로 쓰여져 있으며 현재 영어, 불어, 독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등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 1864년 브라쉘(Brasseur de Bourbourg)에 의하여 처음으로 필사본의 원본 소개와 더불어 불어로 번역된 것을 필두로 1881년에 레온 로스니(LeLosny)의 에스빠냐어본이 나오고 1937년 윌리암 게이트(William Gate)의 영어본에 이어, 1938년에 알프레도 바레라 바스께스(Alfredo Barrera Vquez)의 에스빠냐어로 된 멕시코본이 출간되었다. 1941년 알프레드 토설(Alfre M. Tozzer)에 의하여 다양한 주석과 해설이 곁들여진 영어본이 새롭게 번역되었으며, 이후 실바누스 몰리(Sylvanus G. Morley)와 같은 많은 학자들이 원본보다 더 많은 양의 주석과 설명을 붙였다. 가까운 일본에서도 1982년 코이께유우지(小池佑二)에 의하여 일어로 번역되었다.

 

베르나르도 데 리사나 (Bernardo de Lizana, 1580~1629)

대표작: Historia de Yucat,

Devocionario de Nuestra Sera de Izamal y Conquista de Yucat.

생애: 에스빠냐 똘레도(Toledo) 출신이다. 1606년 현 멕시코의 유까딴반도에 도착하였다. 그는 다른 어떤 사제들보다도 유까딴의 원주민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였는데 이점에 대하여 로뻬스 꼬골유도(Lez de Cogolludo)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고 있다. 사제로서 유까딴의 원주민들과 같이 생활하다 결국 그 중심지인 메리다에서 생을 마친다.

내용 및 작품특징: 이 작품은 오자 및 탈자가 많아 작가의 부주의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내용은 크게 나누어 유까딴반도 이사말 성녀가 발현한 기적에 대하여 이야기한 부분과 부근의 성직자들의 생애에 대한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중간 중간에 마야 원주민들의 생활과 관습에 대하여 적고 있다. 특히 이사말 성녀의 기적을 말하기에 앞서 이들의 전통적인 종교에 대하여 - 리사나 자신은 이를 우상숭배(Idolatr)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 말하는 부분이 있다. 유까딴 지역 원주민들의 삶과 종교, 그리고 식민지 초기의 종교적 환경에 대하여 연구할 수 있는 자료이다.

 

디에고 데 꼬골유도 (Diego de Cogolludo, 1610?~1688?)

대표작: Historia de Yacath2(각주2_ 오늘날의 에스빠냐어 맞춤법에 의한 표기는 “Yucat이나 16~17세기에는 여기에 나오는 대로 “Yucath이라고 표기한 것들도 발견된다.) compuesta por el M.R.P. Fr. Diego Lez de Cogolludo Lector Jubilado y Padre Perpetuo de Dicha Provincia.

생애: 프란시스까노 교파의 신부로 유까딴 지역에서 포교를 하였다. 17세기 사람으로 다른 연대기 학자들보다도 시기적으로 늦다. 그가 살던 당시의 원주민들에 대하여 책을 썼는데 과거의 사제들이나 정복자, 행정관들의 자료를 종합하여 이용하였다.

내용 및 작품특징: 크게 4개의 장으로 구분이 되어 있는데 첫 장은 유까딴이 본격적으로 정복되기 이전의 탐험기를 다루고 있다. 즉 꼬르도바(Cdoba)와 그리할바(Grijalva)의 탐험에서부터 꼬르떼스의 꼬수멜 섬(Isla de Cozumel) 상륙 등의 메시까 정복기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2장에서는 본격적으로 유까딴반도의 정복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설명하고 있으며, 3장에서는 이러한 정복의 과정과 함께 식민지 도시건설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4장은 이 지역의 자연환경과 이곳에 사는 원주민들의 생활에 대하여 적고 있다.

그의 작품은 상대적으로 정복 이후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쓰여지기는 하였지만 그 분량이 방대하고 잘 정리되어 있어 종합적인 정보를 제공해 준다. 원주민들이 정복 이전부터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고 말하는 등 황당한 면이 없지는 않지만 원주민들의 삶을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묘사해 보려는 의지도 곳곳에서 보인다. 한편 작품의 다른 특색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지금은 없어진 자료를 활용하였다는 점이다. 꼬골유도의 저작이 시기적으로 다른 사료들에 비해 늦음에도 불구하고 마야의 기본사료로 많이 원용되는 이유는 그가 자신이 살던 시대 이전의 사료들을 수집하여 이를 바탕으로 집필을 하였는데 그런 사료들 중에는 지금 현재까지 남아 있지 않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즉 그의 저작을 통해 지금은 볼 수 없는 16세기의 중요한 자료들을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다.

 

프란시스꼬 데 히메네스 (Francisco de Ximez, 1666~1720)

대표작: Historia de la Provincia de San Vicente de Chiapas y Guatemala del Orden de Predicadores

생애: 에스빠냐의 갈리시아(Galicia) 지방에서 태어나, 20세 이전에 아메리카대륙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1691년에 현재 과테말라 지역 산 후안 사까떼뻬께스(San Juan Sacatepequez) 지방의 사제로 부임하게 되고, 이때부터 그 지역 원주민들과 같이 생활하며 원주민 언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치치까스떼낭고(Chichicastenango) 교구로 가게 되어 이곳에서 그의 대표작들의 편찬에 힘쓰게 된다. 저술의 원본은 남아 있지 않다. 그가 죽은 후 원본을 복사한 필사본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오늘날 그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내용 및 작품특징: 그의 대표작인 Historia de la Provincia de San Vicente de Chiapas y Guatemala del Orden de Predicadores의 앞부분에 마야의 가장 중요한 고대설화로 꼽히고 있는 뽀뽈부가 적혀 있다. 뒷부분에는 이 지역을 정복한 에스빠냐의 장군인 뻬드로 데 알바라도(Pedro de Alvarado)의 정복사와 더불어 과테말라지역의 식민지 초기 상황들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나머지 부분은 이 지방에 관한 이야기, 원주민들의 에스빠냐 식민지 정복에 대항한 반란, 정복되지 않았던 최후의 마야 원주민들인 이차(Itz?족의 정복과정 등 과테말라의 정복과 식민사를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페루정복에 관한 이야기도 적고 있다.

 

4. 기타

토마스 게이지3)(각주3_ 이 사람은 영국인으로 엄격한 구분상 에스빠냐인 사료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는 없으나 사료의 성격이나 특징 등이 에스빠냐인 사료와 유사한 면이 많아 편의상 이 곳에 포함시켜 다루고 있다.) (Thomas Gage, 1602 혹은 1603~1656)

대표작: A new survey of the West Indies, or the English American

생애: 영국출신으로 외국인들이 아메리카대륙으로 건너가는 것을 금지한 에스빠냐의 법 때문에 1625년 나무통 속에 몰래 숨어 아메리카대륙으로 건너간다. 애당초의 계획은 필리핀으로 건너가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간에 에스빠냐 관리들의 추적을 피해 멕시코 치아빠스로 도망가게 되고 이후 과테말라로 가서 그곳에서 12년간 생활하다가 1637년 조국인 영국으로 귀국한다. 원래 가톨릭이었던 그는 귀국 후 신교로 개종을 하고 에스빠냐 사람들의 폭정을 고발하기 시작한다. 결국 이러한 에스빠냐 사람들의 만행을 개선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아메리카대륙 정복을 계획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던 중 자메이카에서 사망하게 된다.

내용 및 작품특징: 이 작품은 다른 에스빠냐 사람들의 기록과 비교할 때 영국 사람이 영어로 기록한 최초의 아메리카대륙에 관한 종합적인 서적으로 에스빠냐의 아메리카대륙 경영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진 저작이라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가톨릭적인 입장이 아니라 신교도적인 입장에서 쓴 최초의 서적이라는 점도 역시 이 저작의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아메리카대륙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여행경로에 따라 그곳에서 보고 들은 식민지역사와 원주민들의 언어, 생활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가 직접 본 멕시코와 과테말라뿐 아니라 페루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의 종합적인 정보를 책에 삽입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Relaciones Geogricas del Siglo XVI: Guatemala, Relaciones Hiatorico-Geogricas de la Gobernacide Yucat

식민지 초기 에스빠냐 정부에서는 효과적으로 아메리카 지역을 통제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복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이 지방의 절대권력을 가지게 되자 에스빠냐 정부는 이를 견제하기 위해 지방행정관을 직접 파견하여 행정을 관할하는 한편, 이들로부터 지방의 사정을 상세히 적은 보고서를 작성하게 한다. 이것을 세금을 징수하거나 행정을 통제하는 데 이용하였는데 이것들을 가리켜 “Relaciones Geogricas...” 라고 부른다. 식민지 전 지역에서 16세기 말엽에 만들어졌으나 이 보고서의 정보들은 이전에 만들어진 여러 가지 저술이나 행정업무 연락 등을 참조하기도 하였다. 공식적인 저자는 각 지방의 행정관들이어서 각기 다르다. 책으로 만들어져서 우리가 사료로 이용할 수 있는 마야의 “Relaciones Geogricas...”“Relaciones Geogricas del Siglo XVI: Guatemala”“Relaciones Historico-Geogricas de al Gobernacide Yucat이다. 여러 가지 자세한 항목으로 되어있는 설문지에 답변을 쓰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그 지역과 주변지역의 이름, 그리고 그러한 이름의 기원 등은 무엇인가(Relaciones, 1982, 26)로 시작되어 각 지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산업, 자연환경 등 다양한 항목이 있다. 그런데 많은 항목들에 대한 대답이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다른 지역의 것을 그대로 보고 베껴 쓴 흔적이 나타난다. 서로 다른 지역의 설문 대답이 어떤 경우에는 글자 하나 바뀌지 않고 그대로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자료를 이용할 때는 다른 사료들과 비교하여 주의 깊게 사실여부를 따져보아야 한다.

 

원주민 사료

1. 정복 이전 사료

마야 사람들이 유럽인의 침략이 있기 이전에 만들었던 꼬디쎄(Cice)라고 부르는 책들이 지금까지도 일부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수는 많지 않아 현재까지 발견된 것이 약 3권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을 이미 앞에서 누차 언급해왔다. 꼬디쎄 드레스데(Dresde), 꼬디쎄 마드리드(Madrid) 그리고 꼬디쎄 빠리(Paris)가 익히 말해왔던 대표적인 정복 이전의 사료이다. 사료들의 이름과 역사는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 역사를 대변한다고 할 정도로 운명적인 과정을 가지고 있다. 이 책들은 유럽인들이 들어오기 이전까지만 하여도 그 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상당량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에스빠냐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이해도 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교도들이 우상숭배를 하는데 사용하는 도구로 여겨져서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그 후 마야의 책을 만들거나 보는 것이 철저히 금지되어 발견되는 대로 모두 불태워졌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세권의 책들은 이러한 와중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극히 일부분인 것이다. 이 책들은 현재 모두 유럽국가들이 소장하고 있는데 한 권은 에스빠냐, 다른 한 권은 독일, 그리고 나머지 한 권은 프랑스에 있다. 어떠한 경로를 거쳐 책들이 유럽에까지 건너가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자료들을 신기하게 여긴 유럽인들이 왕실에 선물로 바친 것이 남아있거나 에스빠냐 사람들이 불법적인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몰래 유럽에 가지고 옴으로써 현재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들은 우상숭배의 도구 중 하나로 인정되어 개인적으로 가질 수 없었고 유럽으로 가지고 오는 것은 더더욱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피해 몰래 유럽으로 흘러들어 온 것이다. 대부분의 책들이 여러 가지 색깔로 그려진 화려한 그림책이었으므로 이것을 마치 해외여행 기념품과 같이 유럽으로 몰래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그 당시 신대륙이라 불리는 곳에 호기심을 잔뜩 가지고 있던 유럽 사람들에게 이러한 기념품을 보여준다는 것은 상당히 인상적이었을 것이라는 점을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한편 마야의 책이 현지인 멕시코나 과테말라 등지에서는 아직까지 단 한 권도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볼 때 식민지시대의 마야문화에 대한 에스빠냐 사람들의 탄압이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느끼게 한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이러한 책들을 아직까지 우리가 완전히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또한 300여 년이 넘는 식민지 기간 동안 에스빠냐 사람들이 펼친 탄압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책들의 구체적인 특징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작: 마야어로 꼬뽀(Cop? Ficos cotinifolia)라 불리는 나무의 속을 얇게 잘라내고 그곳에 자연 고무를 입혀서 만든 종이로 제작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종이의 표면에 다시 고운 회반죽을 입히고 각종 식물성과 광물성의 배합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색깔의 물감을 가지고 양쪽 면에 모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썼다. 이것을 아코디언처럼 번갈아 접어서, 펴면 길게 늘어지고 접으면 부피가 작아진다. 세 개의 꼬디쎄들이 공통적으로 후고전기(기원후 900~1492)에 만들어진 것이다.

내용: 마야의 벽화나 건물 조각 또는 문자장식의 내용과 유사하다. 즉 그림과 이에 해당하는 구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문의 대부분을 달력이 차지한다는 점 역시 마야문자를 설명할 때 보았던 것으로 여기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 내용은 아직까지도 완전히 해독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상당부분이 이해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마야의 신관들이 제사를 올릴 때 사용한 일종의 성서와 같은 역할을 하거나 과학적인 기록들을 적어 놓는 것으로 여겨진다. 사제들이 제사를 지낼 때 이러한 책을 보면서 설화나 그들의 역사, 혹은 과학적인(종교적인) 일식이나 월식 등의 예측을 일반 대중 앞에서 하거나 종교적인 행사를 준비하는 데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꼬디쎄 빠리(Cice Paris)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책의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에 불과하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다보니 상당부분이 소실되어 없어지고 일부만이 남아 있다. 꼬디쎄 뻬레시아노(Pereciano)라고도 불린다. 1859년 프랑스 파리의 파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을 레온 데 로스니(Lede Rosny)가 발견하여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높이는 22cm, 총 길이는 1.45m에 이르고 11장의 종이에 22쪽의 면을 가지고 있다. 각종 신들과 그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꼬디쎄 마드리드(Cice Madrid)

꼬디쎄 뜨로 꼬르떼시아노(Cice Tro Cortesiano)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려진다. 꼬디쎄 뜨로아노(Cice Troano)와 꼬디쎄 꼬르떼시아노(Cice Cortesiano)라고 하는 것이 1866년과 1867년에 각각 발견되었는데 이후 이 두 개의 원본이 동일한 책의 다른 부분이라는 것이 1881년 레온 데 로스니(Ln de Losny)에 의하여 밝혀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 두 원본의 이름을 붙여 처음에는 뜨로 꼬르떼시아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후에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소장되어 있는 장소의 이름을 붙여 꼬디쎄 마드리드라고 공식적으로 불리게 된다. 6.82미터로 마야 꼬디쎄 중에서 가장 길다. 높이는 22.5cm, 56장의 종이에 112쪽이 기록되어져 있다.

 

꼬디쎄 드레스데(Cice Dresde)

높이는 20.4cm, 총 길이는 3.5m에 이르는 39장의 종이에 78쪽이 기록되어 있다. 꼬디쎄 빠리의 경우는 책의 일부만이 남아 있고 마드리드의 경우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 여러 쪽들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마모가 심하나 드레스데는 이런 것에 비하면 양호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에 의하여 상당부분이 침수되어 지금 현재는 옛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없다. 다행히도 1892년에, 그러니까 전쟁이 있기 이전에 촬영한 폴스트만(Fstemann)의 마이크로필름이 남아 있어 이를 이용해 1972년 책으로 발간하였다. 원본은 현재 독일의 드레스데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꼬디쎄 드레스데의 경우 내용상 전체를 다음과 같은 7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신들의 이야기 - 2쪽에서 23쪽까지가 마야 신들의 이야기를 다룬 신들의 이야기이다. 대부분이 날짜들과 관련이 있는 구문들이고 이러한 날짜들이 신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신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그 신들은 손에 신성한 물건들과 함께 달력의 날짜를 표시하는 문자를 들고 있다. 어떤 신은 이러한 날짜문자들을 등에 지고 있거나 머리에 이고 있기도 하다.

금성 이야기 - 24쪽에서 29쪽까지. 이곳에는 제목이 말하는 바와 같이 금성과 연관된 천문학적인 정보들이 기록되어 있다. 역시 달력의 날짜와 신들의 관계도 계속해서 이곳의 전반에 흐르는 배경이다.

일식, 월식 이야기 - 30쪽에서 37쪽까지. 이곳에는 개기일식, 개기월식과 관련된 천문학적인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뱀 이야기 - 39쪽에서 43쪽까지. 이 부분은 -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 뱀과 연관된, 혹은 뱀으로 형상화된 과거의 어떤 사건에 대한 서술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비, 구름, 가뭄에 따른 농작물 성장에 관한 기록도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의 신 이야기 - 45쪽에서 49쪽까지 그리고 62쪽에서 78쪽까지. (Chac)이라고 불리는 비의 신이 동서남북에 위치하고 주변에는 제사에 사용하는 여러 가지 용구들이 놓여져 있다.

홍수 이야기 - 49쪽에서 54쪽까지. 물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림이 있어서 보통 홍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홍수는 커다란 괴물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칠람발람이라고 하는 유까딴 지방의 설화에 보면 이참 까바인(Itzam Cabain: 전설의 악어)이라고 하는 괴물이 일어나면 이 세상에 홍수가 올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 전설의 내용을 이 부분에서 언급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전문적인 천문학적 정보 또한 담고 있다. 개기일식에 관한 이야기도 보인다.

새해의 이야기 - 55쪽에서 58쪽까지. 앞에서 우리가 공부한 달력의 달 중에서 우아옙(Uayeb)이라고 하는 달은 5일짜리 자투리 달로서 새해를 준비하는 의미 또한 담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마야의 사제가 한해가 가고 새로운 해가 오는 이 우아옙 기간 중에 여러 가지 제례의식을 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4의 마야 꼬디쎄에 관한 논란: 진품인가 모조품인가?

꼬디쎄 그롤리엘(Cice Grolier) : 이 책은 1973, 마이클 코우(Michael Coe)에 의하여 처음으로 학계에 보고 되었다. 이제까지 마야의 고대 책은 3권에 불과하다고 말하였으며 그 세 권에 대하여도 이미 언급하였다. 그런데 이 꼬디쎄 그롤리엘에 대한 언급을 이곳에서 갑자기 하게 된 이유는 이 책이 고대의 원본이 아닌 식민지시대, 혹은 현대에 만들어진 모조품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마야연구에 있어서 혁혁한 공헌을 한 마이클 코우는 탄소연대 측정법에 의하여 이 책의 연도를 1230±130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다른 학자인 톰슨(Eric Thompson)은 이러한 연대 측정이 단순히 종이가 만들어진 연대일 뿐 책의 내용이 만들어진 시기가 아니라는 점으로 반박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 책의 종이는 정복 이전 시기에 제작되었을지 몰라도 쓰인 것은 훨씬 이후의 일이며 이전부터 있었던 원본의 일부를 조잡한 실력으로 베껴 쓰기 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논쟁은 아직까지도 끝을 맺지 못했다. 책의 외형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다른 3개의 꼬디쎄에 비하여 그 제작상의 정밀도가 많이 떨어진다.

 

유까딴 지방의 가톨릭 주교로 있던 란다는 원주민들의 우상 숭배를 철저히 탄압하였고 종교적인 성격이 강한 꼬디세를 보는 대로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 물론 역사의 가정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겠지만 만일 이러한 마야책들의 반의 반 만이라도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면 얼마나 많은 고대 마야의 역사가 우리들 이해의 영역 속에 놓일 것인가 하는 점을 뼈저리게 생각해 보게 된다. 어찌되었거나 그러한 핍박을 피할 수 있었던 단 세권의 책들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는 것만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2. 정복 이후 사료

뽀뽈부 (Popol Vuh)

19장 설화 부분을 참조.

 

칠람발람 (Los libros de Chilam Balam)

19장 설화 부분을 참조.

 

메모리알 데 솔롤라 (Memorial de Solol? Los Anales de los Cakchiqueles, Memorial de Tecpan Atitl)

이 사료는 1844년 산 프란시스꼬(San Francisco)성당에 있는 자료보관소를 정리하던 중에 발견되어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모두 48장의 종이로 되어 있는데 뽀뽈부와 마찬가지로 깍치께ㄹ(Cakchiquel) 원주민어를 에스빠냐어 알파벳을 빌어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이다. 내용상으로 보면 세사람이 공동 집필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필체는 한 명의 것이다. 사히라(Xahila)라고 하는 가계(家系)의 내력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 집안의 가족사가 뭐 그리 중요한 사료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이들은 지리적인 경계를 중심으로 도시나 정치, 경제의 단위들이 만들어졌던 서양과는 달리 가계를 중심으로 모든 활동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한 가계의 역사는 곧 한 도시의 역사요, 한 민족의 역사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이곳에서는 그들 조상들의 설화적인 부분까지 다루고 있다. 즉 천지창조와 같은 것들 역시 부분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을 만나게 되는데 이러한 점에서 보면 뽀뽈부와도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사료에는 제목이 복잡하게 세 개나 붙어 다니는데 그 유래를 보면 원래 이 사료의 이름은 메모리알 데 떽빤 아띠뜰란(Memorial de Tecpan Atitl)이다. 그런데 이를 1855년 브링턴 (Daniel G. Brinton)이 영어본으로 번역 출간할 때 임의로 에널스 오브 더 칵치켈스(Annals of the Cakchiquels)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것이 굳어져 학계에서는 에스빠냐어로 된 아날레스 데 로스 깍치께ㄹ레스(Anales de los Cakchiqueles)라는 이름으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여기에 다시 반론을 제기한 사람이 원주민 사료발굴에 공헌이 많은 아드리안 레시노(Adrian Recino)이다. 그는 떽빤 아띠뜰란(Tecpan Atitl)이란 이름은 정복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원래 그 지역의 이름은 솔롤라(Solol?라는 점을 강조하며, 이것이 메모리알 데 솔롤라(Memorial de Solol?라고 불려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나서게 되었다(Memorial, 49). 그래서 최근에는 메모리알 데 솔롤라라고 부르는 것이 많이 일반화 되어가고 있다. 마야연구를 위한 사료가 어렵게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으며 복잡한 과정을 거치면서 이름에까지도 많은 사연이 담겨져 있는 것을 이 사료를 통해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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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연구를 위한 사료의 문제점

 

앞에서 고대 마야의 사료를 원주민들이 직접 작성한 것과 이들을 정복한 에스빠냐 사람들이 작성한 것으로 크게 나누어 설명해 보았다. 전자의 것은 정복 이전의 것과 정복 이후의 것으로 다시 구분되는데 정복 이전에 만들어진 사료들은 아직까지도 마야문자의 해독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 이해에 한계가 있다. 그리고 이 점이 사료로서의 치명적인 문제점이라는 것에 대하여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반면 정복 이후에 만들어진 것은 알파벳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그 문어적인 이해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얼마만치 순수한 사실을 왜곡없이 적었겠는가하는 사료비판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에스빠냐 사람들이 오늘날 남겨놓은 사료는 원주민들의 사료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방대하고 에스빠냐어로 쓰여진 것이 대부분이어서 그 이해에 큰 어려움이 없다. 연대기 학자, 정복에 직접 참여하였던 사람들의 기록, 선교사들이 남겨놓은 자료, 아메리카대륙으로 이주해간 행정관료들이나 일반인들의 기록, 여러 지방을 탐험하였던 사람들의 기록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은 각기 나름대로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른 과장, 누락, 왜곡 등의 면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것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한계로 시간적인 문제와 공간적인 문제를 분명히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다.

시간적인 면에서 전고전기, 고전기, 후고전기의 한계를 명확히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대부분의 사료들이 후고전기 중에서도 정복 전후의 상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시간을 초월한 확대 해석에는 충분한 타당성의 제시가 요구된다. 16세기 마야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보고 들은 사료를 가지고 8세기나 9세기의 마야 사람들도 그렇게 살았을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절대적으로 다른 자료의 보완을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해 8세기나 9세기 마야 사람들의 주거지에 관한 고고학적인 자료들의 보완을 통해 16세기 사료가 말하고 있는 내용이 8, 9세기 주거지의 발굴작업 결과에서 얻어진 내용과 동일한 경우에 가능한 것이다. 공간적인 면에서도 마야라는 말 자체가 가지고 있는 지역적인 범위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을 전제로 한다.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마야문명이라는 말은 마치 하나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단위를 구성하는 공동체로 이해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많이 다르다는 점을 상기해 보자(2장 마야문명의 정의참조). 마야 사람들은 한번도 마야, 혹은 다른 이름으로 정치적인 단일 공동체를 유지한 적이 없었다. 다만 문화적인 면에서 여러 가지 유사한 점을 공유하고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각 사료가 언급하고 있는 지역의 특색이 다른 지역에까지 엄격하게 적용될 수는 없다. 문화적인 동질성으로 많은 부분 공유가 가능한 것 또한 사실이지만 이 역시 엄밀한 의미에서는 각자의 충분한 타당성이 제시되어야 마땅하다.

사료는 한 지역, 혹은 민족을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 사실을 추정할 수 있는 근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필수적인 정보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마야의 고대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의 사료를 공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 앞의 장에서 대략적으로 살펴본 사료들에 대한 사전 검토는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마야연구의 필수적인 분야이다.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사료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와 문제점들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필요하다. 이것은 곧 사료들을 각자가 하고 있는 연구에 직접 이용하기 위해 전제되는 필수적인 주의점이 될 것이다. 이런 점을 놓고 볼 때 사료의 한계와 문제점은 단순히 마야사료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아메리카대륙의 식민지화 결과 발생한 복잡한 사료의 한계와 문제점들은 아메리카대륙 고대문화를 연구하는 데 이용되는 모든 사료들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지적하는 내용은 마야의 고대사뿐만 아니라 메시까(아즈떼까), 멕시코 서부, 멕시코만, 오아하까, 따라스꼬, 멕시코 북부, 캘리포니아, 미국 남부 문화 및 남미의 잉까 등을 비롯한 역사적 맥락의 동일성으로 인한 비슷한 유형의 사료를 가지고 있는 모든 아메리카대륙의 고대사 연구에 대부분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을 먼저 밝혀둔다.

 

공통의 한계

1. 시대적인 한계

마야가 국가(國家)와 유사한 형태의 조직을 만들고 발전시킨 시기는 기원전 2000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각주1_ 마야 긴달력의 계산에 의하면 마야의 역사는 기원전 3114813일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날이 실질적인 의미를 가진 날짜인지 수학적인 계산에 의한 가상의 날짜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당시에 문자로 기록된 사료들이 존재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고 비록 있었다하여도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전혀 없다. 문명이 본격적으로 융성한 고전기(기원후 150~ 900)때에는 많은 사료들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많은 기록들이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돌로 된 비석이나 건물에 새겨져 남아있다. 이것으로 볼 때 책들도 제작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고전기 때의 책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은 없다. 고전기의 비석이나 건물에 새겨진 텍스트 중에서도 상당히 긴 것들도 존재하지만 해독상의 불완전함으로 인하여 여기에서는 중심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다. 따라서 앞 장에서 열거한 원주민사료들은 모두 마야의 후고전기(기원후 900~ 1492), 혹은 그 이후의 사료들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마야의 후고전기나 유럽정복 이후의 사료들을 이용함에 있어서 전고전기(기원전 2000~기원후 150), 고전기, 후고전기로 나누어지는 시대의 한계를 명확히 하지 않는 것은 적합하지 못하다. 이는 마치 조선시대의 복식(服飾)에 대한 기록을 인용하며 고려시대나 삼국시대와 구분을 안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물론 상당한 부분은 전고전기나 고전기에도 같이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료들이 후고전기 중에서도 후반기인 유럽정복 전후의 상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시간을 초월한 확대해석에는 충분한 타당성이 제시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성곽(城郭)의 경우 후고전기의 도시들에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러한 점이 사료에는 마치 모든 시대에 걸쳐 나타나는 것처럼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후고전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고 지역적으로도 일부 도시에서만 확인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고전기의 마야에 직접 대응시킬 수는 없다. 고전기 때의 도시들에서는 성곽의 형태를 가진 구조물이 발견된 것이 없다. 특히 후고전기 시대에도 군사적인 목적으로 성곽을 만들었던 지역은 극히 제한적이다.2)(각주2_ 성곽의 형태로 보이는 구조물들의 용도가 군사적인 것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아직 논란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이것을 성곽으로 이해하는 점에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후고전기의 일부도시에서 발견된 성곽과 유사한 형태의 것을 가지고 마야문명은 성곽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2. 지역적인 한계

공간적인 면에서도 마야라는 말 자체가 가지고 있는 지역적인 범위에 대한 주의가 필요하다. 물론 이점에 있어서는 2장 마야문명의 정의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다시 한번 여기에서 간단히 확인해 보면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마야문명이라는 말은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과 같은 단어와 마찬가지로 마치 하나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단위를 구성하는 공동체로 이해되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마야의 경우는 많이 다르다. 마야 사람들은 한번도 마야”, 혹은 이 이름 이외의 다른 이름으로라도 정치적인 단일 공동체를 유지한 적이 없었다. 다만 문화적인 면에서 여러 가지 유사한 점을 공유하고 있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 마야라는 말은 정치나 경제의 단위를 구성하는 나라가 아니라 마치 르네상스와 같이 동일한 문화를 가진 집단이나 경향을 일컫는 말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각 사료가 언급하고 있는 지역의 특색이 다른 지역에까지 엄격하게 적용될 수는 없고 엄밀한 의미에서는 일부지역에 나타나는 현상이며 이것 중에 일반화시킬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모든 현상을 전부 고대마야의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송영복, 2000, 707~708). 예를 들어 마야연구의 가장 중요한 사료라고 인정되는 란다의 사료(Relacide las cosas de Yucat)에는 유까딴반도, 즉 북부 마야지역에 사는 원주민들의 생활을 적고 있지만 다른 마야지역은 이와는 다른 것이 많다. 마야를 지역적으로 크게 분류해보면 북부, 중부, 남부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중에서 유까딴반도는 북부에 해당하고 중부와 남부와는 지형이나 기후가 현격히 다르기 때문에 문화적인 면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마야전체의 문화적인 동질성으로 인해 사료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이 많은 부분 공유 가능한 것도 있지만 이 역시 시대적인 한계에서 밝힌 것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조심스럽게 확인 과정을 거쳐 각자의 충분한 타당성이 제시되어야 마땅하다.

 

 

에스빠냐인 사료의 한계

1. 마야어 번역(이해)의 문제

원주민들을 정복한 에스빠냐 사람들은 그들의 이해 방식대로 원주민의 문화를 이해하고 자의적인 해석에 따라 다른 문화를 관찰한 것을 사료에 기록하였다. 그런데 많은 현상이나 사물 등을 규정하는 데에 있어서 에스빠냐에 없는 것들은 설명을 통해서 표현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것들은 특별한 언어적인 여과 없이 에스빠냐어로 그대로 기록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노예(Esclavo)”라는 단어가 사료에 많이 사용되었는데 원주민들의 관습에 존재하는 이와 유사한 현상은 에스빠냐 사람들의 노예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송영복, 1995).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정복 이전의 마야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이와 약간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원주민을 가리켜 별 비판 없이 사료에 노예라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마치 원주민 사회에도 유럽의 노예제도와 같은 것이 존재하였던 것처럼 오해하기 쉽다. 식민지 초기 지방행정관들이 각 마야지방의 사정을 적은 Relaciones Geogricas del Siglo XVI에 보면 당시 고대마야 사람들이 노예를 마치 물건과 같이 세금으로 바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카카오, 옷감, 퀘잘, 노예 등을 세금으로 바치는 한편, 모든 부역에도 종사하였다(Relaciones, 1982, 104)3)(각주3_ ...pagaban su tributo en oro, cacao, mantas, quetzales, esclavos, y acudian con todos los demservicios personales.).” 그러나 여기 써 있는 노예는 단순히 짐을 운반하는 사람(Tameme)이거나 다른 기능을 가진 사람이지 노예라고 부를 수는 없다(송영복, 1995, 98~100). 이러한 현상은 문화의 접촉과정에서 나오는 당연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학술적인 논의에서조차 쉽게 간과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2. 과장

정확한 정보의 확인 없이 글 쓰는 이의 선입견이나 잘못된 정보를 이해관계나 편의에 따라 그대로 기록하는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어 에스빠냐 사람과 원주민의 전투에 대한 기록에서는 에스빠냐 사람들의 전공을 추켜세우기 위해서나 혹은 패전을 변명하여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많은 경우 원주민 병력이 부풀려진 것을 볼 수 있다: “백오십 명의 병력과 두 필의 말과 함께 방어벽을 거의 완성하게 되었는데 오만 명의 병력과 견고한 성곽을 가진 뽀알라(Cempoala)와 그 주변의 오십여 개의 마을들을 포기하게 되었다.”4) 정확한 당시의 병력상황을 알 수는 없으나 여기에 나오는 오만 명의 병력은 이 주변 지역의 인구분포로 미루어 볼 때 가능치 않은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과장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장은 여러 다른 면에서도 나타난다.

문화적인 면도 예외일 수 없다. 다음은 Relaciones Geogricas...에서 말하고 있는 원주민들의 결혼 관습이다. “원주민 시대에는 한 남자가 넷에서 다섯, 여섯 명의 여자를 데리고 살았다. 그리고 마세후알(Macehual, 역주: 일반평민)들은 두 명에서 세 명의 여자를 데리고 살았는데 둘째나 셋째부인들이 첫째부인을 존중해 주었다.”5) 원주민들의 야만성을 과장하기 위하여 모든 원주민 남자들이 많은 여자들을 거느리고 살았다고 전하고 있으나 이는 지역에 따라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 마야지역에서 있었던 현상은 아니며 일부 사람들에게 제한적으로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송영복, 1995, 123~125). 특히 위에 인용한 문장은 각기 다른 지역의 상황을 보고하는 사료에서 공통적으로 토씨하나 바뀌지 않고 그대로 인용된 것으로 보아 그 사실 여부가 충분히 의심된다.

 

3. 원문 판독의 문제

마야사료들은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에 작성된 것들이다. 따라서 당시의 필사본을 판독(Paleograf )하는 과정에서 잘못 판독되는 것들과 누락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이는 원본과의 대조를 통해 해결될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사료의 보존상태에 따라 불가능한 것들도 있다. 마야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사료라고 할 수 있는 란다의 기록도 여러 학자들이 현대 에스빠냐어로 옮겨 적었으나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보자. 가리바이(Angel MarGaribay)의 판본은 유까딴이라는 지명의 어원을 말하는 부분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손짓발짓으로 당신네 땅이 어떠냐고 물어봤더니 씨우예뗄 쎄(Ciuyetel Ceh)’라고 대답하였는데 이 말은 칠면조와 노루의 땅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섬이라는 뜻을 가진 뻬뗀(Pet)’이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Than)’이라는 말을 해라는 말과 착각을 일으켜 에스빠냐 사람들이 이곳을 유까딴(Yucat)’이라고 부르게 되었다.”6) 그런데 최근에 전 문장을 새롭게 판독하여 같은 저술을 발간한 까르멘 레온(Mardel Carmen Leon)은 동일한 부분을 다르게 전하고 있다: “손짓발짓으로 당신네 땅이 어떠냐고 물어봤더니 씨우딴(Ciuthan)’이라고 대답하였는데 이 말은 말을 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를 듣고 에스빠냐 사람들이 이곳을 유까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7) 가리바이가 “ciuyetel”이라고 판독한 것을 까르멘 레온은 “ciuthan”으로 판독하고 있다. 이는 가리바이의 판독에 오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까르멘 레온 역시 오류를 범해 원문으로 쓰여진 각주 가리바이판의 밑줄 친 부분을 실수로 빠뜨리고 판독한 것이 보인다. 현재의 멕시코 유까딴반도가 그렇게 불려지게 된 기원을 말하는 중요한 부분이 이러한 판독의 오류로 인하여 커다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비교적 여러 판본이 나와 있는 란다의 경우에도 이런 오류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다른 판본들의 경우는 오류의 가능성이 - 그 대조연구의 부족으로 - 더욱 높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이러한 판독의 오류는 빈번하다. 부록으로 사진이 함께 나오는 원본의 경우나 소장한 곳에서 원본의 마이크로필름을 제공하는 경우는 직접 확인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은 원본들의 오류가 의심되는 부분은 확인하기 힘든 경우도 많다.

(각주4_ “...ciento cincuenta hombres con dos de caballos, haciendo una fortaleza que ya tengo casi acabada; y dej?toda aquella provincia de Cempoala y toda la sierra comarcana a la villa, que serhasta cincuenta mil hombres de guerra y cincuenta villas y fortalezas, muy seguras...”(Cort, 32

5_ “...en su gentilidad, cada uno dellos tena cuatro, y cinco y seis mujeres. Y los macehuales tenn dos y tres mujeres, y a la primera respetaban las dem”(Relaciones Geogricas... 106, 128, 142)

6_ “...y que preguntdoles mpor ses que co era suya aquella tierra, respondieron ciuyetel ceh que quiere decir tierra de pavos y venados, y que tambila llamaron Pen que quiere decir isla, engados por las than que quiere decir, diciendo; y que los espales la llamaron Yucat.” (Landa, 1986, 4~5)

7_ “...y que preguntdoles mpor ses que co era suya aquella tierra, respondieron ciuthan que quiere decir, diciendo; y que los espales la llamaron Yucat.”(Landa, 1994, 86))

 

4. 모순

각각의 사료들이 저마다 다른 말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마야의 정복사를 장식하는 흥미로운 이야기 중에 헤로니모 데 아길라(Gerimo de Aguilar)와 곤살로 게레로(Gonzalo Guerrero)의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두 명 모두 1511년 난파한 에스빠냐 배의 선원이었다. 가까스로 살아 해안가에 도착한 이들은 마야 사람들에게 잡히게 된다. 그리고 각각의 기구한 사연과 함께 헤로니모 아길라는 정복자 꼬르떼스를 만나 그와 동행을 하여 아메리카대륙정복에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되고 곤살로 게레로는 이러한 침략자들에 맞서 마야를 지키는 장군이 되는 운명을 맞는다. 그런데 각각의 사료들은 이들이 마야지역에 있을 때 꼬르떼스를 만나게 되는 과정을 다르게 적고 있다. 꼬르떼스를 도와 통역사로서 메시까 정복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던 헤로니모 아길라에 비하여 곤살로 게레로에 관한 사실은 아직까지 자세히 밝혀져 있지 않다.8) 이 점에 대한 당시의 총사령관인 에르난 꼬르떼스의 문건과 그의 휘하에 있던 베르날 디아스 델 까스띨요의 사료가 이 두 사람에 관하여 특히 곤살로 게레로에 대하여 다른 증언을 하고 있다. 베르날 디아스 델 까스띨요는 다음과 같이 곤살로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에스빠냐 사람들과 같이 가기를 거부하였다고 전한다: “편지를 읽고나서 곤살로 게레로가 대답하기를: 나의 형제인 아길라여 나는 이미 결혼도 하였고 3 명의 자녀들까지도 있는데다 [원주민들이] 나를 촌장과 장군으로 대하고 있소... 오기를 거부하였다.”9)

(각주)8_ 이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29 장 마야와 유럽의 만남에서 다루겠다.

9_ “...como le ley?las cartas, Gonzalo Guerrero le respondi? hermano Aguilar: yo soy casado y tengo tres hijos, tienenme por cacique y capit... no quiso venir...”(Castillo, 44)

곤살로 게레로 (Gonzalo Guerrero)는 헤로니모 아길라(Gerimo Aguilar)와는 구분되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그는 에스빠냐 사람들이 유까딴지방을 정복하려 할 때 원주민을 모아 대항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에스빠냐 군대의 무기와 전술, 전략 등을 알고 있는 곤살로는 유럽인들의 마야정복에 끝까지 항거하였으나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에스빠냐 사람으로서 자신의 동족이 마야를 지배하려는데 대하여 부정하고 저항한 사람으로 멕시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애국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로뻬스 데 고마라(Lez de Gara)는 짧게나마 그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곳에 정착을 하고 싼따 마리아 데 라 빅또리아(Santa Marde la Victoria)라고 명명하였다. 그곳을 평정하는데 6년에서 7년 정도가 걸렸다. 이 기간동안 많은 굶주림과 위험이 항상 같이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체뚜말에서 원주민들을 지휘하던 곤살로 게레로가 (에스빠냐 사람들을) 죽이려하였을 때가 가장 어려운 순간이었다: “Pobl?alli, y la nombr?Santa Marde la Victoria. Gast?otros seis o siete as en pacificar la provincia, durante los cuales pas?mucha hambre, trabajos y peligro, especialmente cuando lo quiso matar en Chetemal Gonzalo Guerrero, que capitaneaba los indios”(Lez de Gomara, 89).)

 

그러나 꼬르떼스의 편지에는 다른 내용이 적혀 있다. 게레로 이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있었을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헤로니모 아길라 이외에는 데리고 갈 여건조차 되지 못하였다고 적고 있다: “항해 중에 그와 같이 표류하게 된 다른 에스빠냐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헤로니모 아길라로부터 듣게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소비되는 관계로 그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 불가능하였다.”10)(각주10_ “De este Gerimo de Aguilar fuimos informados que los otros espales que con el se perdieron en aquella carabela que di?al trav... y que era imposible poderlos recoger sin estar y gastar mucho tiempo en ello.”(Cort, 14)) 이러한 점이 정확히 왜, 어디서부터 서로 다르게 증언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한사람이 잘못된 정보, 혹은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원주민 사료 이해의 한계

이점에 관하여서는 이미 마야문자 해독 부분에서 자세히 설명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원주민 사료는 현재까지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대륙을 정복할 당시만 해도 한글이나 한자, 라틴어처럼 하나의 독립된 문자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정복과 함께 사용이 금지됨으로써 수백 년을 거치는 과정에서 옛날의 문자는 남아 있으나 현재 이 문자를 사용하거나 아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비록 많은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원주민들이 작성하였던 정복 이전 사료의 이해에는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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