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하나: 중요 연대

1800년대 100여 년 동안 칠레의 정치적인 안정기가 이어짐

1879 ~ 1983년 태평양 전쟁, 볼리비아+페루 vs 칠레: 칠레 승리경제 발전

1970년 아옌데 사회주의 집권

1973년 군사 쿠데타로 아옌데 사망, 삐노체뜨 독재시작

1989년 삐노체뜨 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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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굶어 죽지 않는 나라를 꿈꾸다.

쿠바가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정치, 사회, 경제적인 극단적 상하관계로 요약되는 1492년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하였고 그것이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면, 같은 모순을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바꾸어 보려는 이상적인 시도가 칠레에서 있었습니다. 아옌데Salvador Allende의 공산당 정권이 바로 그것입니다. 공산당이란 말에서 의미하는 것처럼 모두 다 같이 공평하게 산다는 뜻으로 간단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이제까지 나는 주인 너는 하인, 나는 윗사람 너는 아랫사람, 나는 사장 너는 종업원”, 이렇게 수직적이던 이분법을 극복하고 다 같이 공평하고 정의롭게 살자는 이상을 실현해 보고자 했던 아옌데와 그 아옌데를 국민 투표로 뽑아준 칠레 사람들의 투쟁 과정과 그 좌절의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쿠바에서는 피델 까스뜨로나 체 게바라 같은 사람들이, 죽어도 바뀌지 않는 국내 기득권 엘리트 세력 그리고 미국의 야욕을 타도하기 위하여 총을 들고 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앞에서 본 멕시코 혁명도 같은 맥락이지요.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에서 모두 그런 피의 혁명이라는 방법만을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무력투쟁은 최후의 수단이었습니다. 다양한 시도를 해본 이후에, 그런 방법으로는 도저히 안 때 최후의 선택이 총과 칼이었던 것입니다. 명은 더 큰 희생을 막으려는 정당방위인 셈이지.

그런 면에서 본다면 칠레에는 축복받았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공부하려는 아옌데 정권 시절 투표라는 합법적 방식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권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꿈의 정부는 미국과 보수 엘리트에 의해 주도된 군사 쿠데타에 의하여 무참히 짓밟힙니다. 이러한 배경과 과정을 이번 장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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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칠레는 남미의 양키

라틴아메리카 국가 중에서 오늘날 정치, 경제, 사회면에서 가장 안정적으로 잘 사는 나라로 많은 사람이 칠레를 꼽습니다. 중남미에 별로 관심이 없는 분들 처지에서는 페루나 칠레나 볼리비아나 그 옆에 있는 파라과이나 다 거기서 거기, 고만고만한 나라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여러 가지 지표를 따져보거나 개괄적인 정보를 살펴보아도 칠레가 주변의 다른 나라에 비하여 매우 안정되고 발전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남미 현지에 가서 국경을 넘어 다니다 보면 이러한 점이 느껴집니다. 육로로 국경을 건너가면 경찰들의 옷차림에서부터 분위기가 다릅니다. 물론 선입견을 품고 있어서 그렇게 느낀 탓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필자가 결코 과장하는 게 아니라는 걸 해당 당사국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군사력도 강해서 주변 국가인 페루나 볼리비아, 아르헨티나까지 칠레랑 싸움해서 이겨본 나라가 하나도 없어요. 정부와 공직자의 부패 지수에서도 칠레는 세계의 선진국 수준에 도달해 있습니다. 그래서 칠레를 남미의 양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 정도로 칠레는 남미에서 나름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미국이 멕시코 영토의 반을 빼앗아 간 역사가 기억나시죠? 알라모 전투, 텍사스의 독립, 미국 해병대의 멕시코시티 점령 등의 일련의 역사적인 사건의 시리즈를 통해서 미국이 멕시코의 현 영토보다도 더 많은 땅을 미국 땅으로 만들었다는 점을 앞에서 이미 공부하였습니다. 이런 것을 보노라면 국제 질서란 역시 힘 있는 자에 의해 만들어지고, 부서지고, 합리화되고 뭐 그런 거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남미 칠레와 주변 국가의 역사에서도 이러한 현실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볼리비아와 페루는 이미 100여 년 전에 그들 영토의 상당 부분을 칠레에 빼앗깁니다. 볼리비아는 원래 바다를 끼고 있던 나라였는데 칠레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지금은 바다가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볼리비아에도 해군이 있는데 내륙에 있는 띠띠까까 호수Lago de Titicaca에서 훈련을 합니다. 볼리비아의 해군 본부는 해발 4,000미터에 있습니다. 희한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아무튼 넓은 호수에서 카누를 타고 훈련을 하는 해군 본부의 벽에는 우리의 바다를 되찾자Recuperemos Nuestro Mar라는 구호가 걸려 있습니다.

영토를 빼앗긴 나라의 서러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추끼까마따Chuquicamata라는 노천 구리 광산도 원래는 볼리비아의 영토였는데 1800년대 말에 칠레에 빼앗겼습니다. 칠레가 빼앗은 땅은 광산이나 초석 등으로 칠레, 아니 세계 경제의 중요한 역할을 했었고 지금도 역시 그렇습니다.

아르헨티나는 칠레와 직접 대규모 전쟁을 하지는 않았지만 19세기를 전후하여 발생한 국경 분쟁으로 현재의 파타고니아 땅을 빼앗겼습니다. 아르헨티나 경찰과 칠레 경찰이 전투를 벌여 아르헨티나 쪽만 여러 명 죽은 사건도 있었습니다. 또한 아르헨티나와 영국이 싸운 말비나스 전쟁(포클랜드 전쟁)에서는 칠레가 아르헨티나와 인접해 있는 칠레의 군사기지인 뿐따 아레나스Punta Arenas를 빌려줌으로써 영국이 승리하고 아르헨티나가 패배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니 마치 칠레 사람들이 죽일 놈처럼 표현되는 것 같아 좀 그렇군요. 아무튼 칠레가 주변의 남미 국가와 비교하여 정치, 경제, 군사 면에서 훨씬 안정되었고, 그 안정을 바탕으로 사회 경제의 발전을 이루었으며 정치면에서도 꽤 일찍부터 앞섰다는 점을 여러분에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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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칠레의 간단 역사

칠레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이곳은 옛날에는 별 중요한 곳도 아니었고 변방에 불과한 땅이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변방은 소위 별 볼 일 없는 곳이었다는 것이지요. 항시 중심은 돈 많은 곳이고 변방은 별 볼 일 없는 싸구려라는 현실적인 인식이 있으니까요. 그렇게 중심과 변방, 즉 비싼 금싸라기 땅과 평당가격이 몇 푼 안 되는 땅이 구분되는 시기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언제부터 시작되었냐 하면, 바로 1492년 이후가 되겠습니다. 즉 식민지 시대에 들어와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인들이 침략을 하면서 유럽인들이 더 좋아하고 더 많이 사는 곳은 비싼 곳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곳은 별 볼 일 없는 땅이 되는 것이지요.

하여간 그래서 이곳 칠레는 그런 식으로 본다면 식민지 시대에는 인기가 높지 않은 변방이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칠레 북부지방의 대부분 땅은 사막으로 인간이 살기가 힘들고 그 반대편인 남쪽도 남극대륙과 맞닿아 있어, 혹독한 자연환경으로 인하여 사람이 살기 힘든 곳입니다. 기껏해야 중부지방 그러니까 칠레의 수도가 있는 산띠아고Santiago de Chile와 그 주변 지역만이 인간이 살기 편한 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런 멀기도 하고, 대단한 금이나 은이 나는 것도 아니며, 원주민 노동력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농사짓기에 적합한 땅이 많은 것도 아닌 이 지역에 에스빠냐의 식민지 지배자들은 덜 관심을 가졌던 것이지요. 애당초 이곳에 에스빠냐의 행정력이 미친것도 상대적으로 늦어서, 1557년부터 페루 부왕령副王領의 일부로 편입되면서 에스빠냐의 통치하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다른 라틴아메리카의 나라들과 비슷한 시기인 1800년대 초에, 식민지지배에 대한 불만 축적 특히 경제적인 이권에서 에스빠냐 본국과의 이해 충돌이 원인이 되어 혼란의 과정을 거쳐 독립하게 됩니다.

여기에 독립의 두 영웅이 등장하게 되는데 오이긴스Bernardo O'Higgins는 칠레 지역 사람으로 독립을 이끈 사람이고 산 마르틴José de San Martín은 이후 그와 손잡고 독립을 완수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독립 초기에는 중남미 대다수 나라가 그러하듯이 혼란과 갈등이 거듭되었지만, 내전을 수습하고 국가의 기반이 되는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정치적인 안정과 발전을 이루는 초석을 마련하게 됩니다.

이후 전 세계의 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발견된 구리와 초석硝石은 칠레의 경제 발전을 이끌게 됩니다. 그런데 경제적인 이권을 장악하려는 칠레의 야욕은 주변 국가와의 이해관계에서 갈등을 빚게 되고 급기야는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그렇지만 볼리비아·페루를 상대로 한 태평양전쟁Guerra del Pacífico(187983)에서 칠레가 승리함으로써 주요한 초석 광산을 획득하여 잘나가는 국가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이어서 칠레는 구리와 광업을 중심으로 서구열강 이권 다툼의 중심에 놓이게 됩니다. 주로 영국과 미국이 광산업에 진출하여 칠레의 정치에 감 놔라 대추 놔라, 참견을 하게 됩니다. 그러는 와중에 칠레는 칠레대로 자원 주권을 외국에 넘길 수 없다는 좌파 정부도 한 축을 차지하게 되지요. 그렇게 좌파와 우파, 반외세정권과 친외세정권이 공방전을 벌이게 됩니다. 그리고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사회주의 급진 정당들이 집권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후 좌우가 격돌을 벌이는 양상을 벌이다가, 급진 좌파의 총화라고도 할 수 있는, 우리가 이번 장에서 주로 살펴보고 있는 아옌데 정권이 탄생합니다. 1970년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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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다섯: 투표로 뽑은 공산당 대통령

칠레는 주변의 다른 어떤 나라에 비해 잘 살고 정치적으로도 안정되었다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아르헨티나나 멕시코, 페루 등과는 뭐가 달라도 좀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악령과도 같은 라틴아메리카의 모순인 빈부격차, 쿠데타, 암살, 독재의 전통을 이들도 고스란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민중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나라가 좀 잘 살면 뭐하겠습니까. 있는 놈들만 떵떵거리며 살고 가난한 민중들은 상대적인 박탈감을 더욱 느낄 뿐이지요. 그러다 보니 이런 부정의와 불합리한 상황에 부닥친 민중들의 삶을 변화시켜보자는 사회주의 사상이 가난한 이들에게 급속도로 퍼져나갑니다.

공산당이 지구상에서 최초로 합법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잡은 적이 있는데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살펴보려는 아옌데 정권입니다. 경이로운 일이지요. 물론 보수 색채의 가톨릭 당과 공조한 것이 큰 역할을 했지만, 좌우간 아옌데 대통령은 사회주의적인 사상을 국가의 기본 통치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당연히 미국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지요. 국유화 등으로 서구자본 이익의 중요한 부분을 상실하게 되고 주변 국가까지 영향을 미칠 것을 두려워한 미국으로서는 자신의 앞마당과 같은 남미 국가에 공산당이 권력을 잡는 것을 방관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상 아옌데 정권이 공산당이라고는 하지만 혼합경제의 성격을 유지하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철저한 국가 주도적 공산사회를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국가 기간 산업인 구리광산이나 금융 등과 같은 분야만 국가가 주도하고 기타 산업 분야에 있어서는 자본주의의 전통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언론과 노조 등을 매수하여 반정부 활동을 벌이는 한편 칠레의 주요 산업인 구리 산업을 위축시키는 방법으로 그들이 싫어하는 아옌데 정권을 흔들기 시작합니다. 경제가 나빠지고 공약 이행이 어렵게 되면 많은 국민이 사회주의 아옌데 정권에게 등을 돌릴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칠레 국민은 이러한 미국의 전방위적인 계략에 굴복하지 않고 그들이 직접 손으로 뽑은 아옌데 정권에 대한 지지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미국은 삐노체뜨라는 인물을 내세워 군사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아옌데는 반란군에 맞서 끝까지 싸우다 대통령궁에서 자살하기에 이릅니다. 수십 년이 지난 이후 공개된 미국의 비밀문서에서 삐노체뜨의 쿠데타가 미국의 지원,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증거들이 나왔습니다. 이제는 칠레 군사 쿠데타의 배후가 미국이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학자는 없습니다. 아니, 배후라는 말보다 좀 다른 말이 필요할 것 같군요. 계획, 지시, 협력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이 사건을 주도하였으니 말입니다. 한 마디로 미국이 없었다면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도, 성공할 수도 없었던 것이지요.

라틴아메리카가 갖고 있던 사회적 정치적 모순도 적었고, 그래서 여러 면에서 안정을 이룰 수 있었던 칠레, 안정과 발전을 바탕으로 분배의 문제, 즉 빈부 격차의 문제를 정치라는 제도권의 틀 안에서 변화시킬 수 있었는데 그 기회가 미국에 의하여 무참하게 실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중남미 정치 불안정의 원인을 각 해당 국가의 문제로 돌립니다. 당연히 국가와 국민 스스로 책임과 문제의식을 느껴야 하겠죠. 결과적으로는 실패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아옌데 정권 실패의 주원인은 미국에 있습니다. 미국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기만 하면 독재 정부냐 아니냐를 따지지 않고 묵인하는가 하면, 자신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정권의 경우, 그것이 아무리 합법적으로 국민의 공감을 통해 민주적 방식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가만히 놔두지를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그리고 유일한 가치 기준은 미국의 이익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미국만 그런 것은 아니지요. 아무튼 라틴아메리카 국가가 어떠한 정부 형태, 어떠한 정책의 방향을 취하더라도 미국은 자국의 이익에 따라 그것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그리고 죽이느냐 살리느냐를 결정하고 실행한다는 것을 칠레 쿠데타를 통해서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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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여섯: 산띠아고에 비가 내린다Llueve sobre Santiago

19709월 세계 최초로 공산당의 대통령후보 살바도르 아옌데가 칠레의 대통령으로 집무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앞에서 본 것과 같이 미국에게 미운털이 박힙니다. 미국은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아옌데를 축출하겠다고 결심하였고. 그가 취임한지 3년이 되는 19739월에 피노체트라고 하는 칠레 역사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고문하고 죽인 인물이 아옌데의 시체를 밟고 대통령궁을 장악합니다.

작전명은 유에베 소브레 산띠아고Llueve sobre Santiago(산띠아고에 비가 내리다)입니다. 아옌데가 대통령이 되고 미국은 정말이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합니다. 정치, 경제, 언론, 노조, 군대 등 다양한 곳에서 반정부 활동을 강화하라는 지시를 하달합니다. 이에 따라 극우세력들의 준동은 극에 달했고 대통령의 군사고문관 역할을 하는 해군 사령관이 암살되기까지 합니다. 이 밖에도 아옌데를 지지하는 사람과 그룹에 대한 다양한 위해가 가해집니다. 그러나 칠레 국민들은 계속해서 아옌데 정권에 지지를 거두지 않고 그를 중심으로 의지를 굽히지 않습니다. 이에 초조함을 느낀 미국 대통령 닉슨Richard Milhous Nixon1971129일 백악관에서 열린 회의에서 직접 칠레의 쿠데타를 계획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계획은 구체화 되기 시작합니다.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맙니다. 911일 이른 아침 산띠아고에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새벽부터 구테타 군은 수도의 중추 역활을 하는 항구도시인 발빠라이소Valparaíso를 점령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산띠아고 시내에서도 작전이 이어집니다. 아침 720분 아옌데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쿠바의 피델 까스뜨로가 그에게 선물해준 AK47소총을 메고 대통령궁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반란군은 언론기관을 장악하고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며 점점 목을 조여오기 시작합니다. 아침 1015분 아옌데는 결과적으로 그의 마지막 목소리로 남은 연설을 시작합니다.

“... 저는 사임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칠레 국민을 위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그들은 비록 힘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폭력만으로 역사를 만들 수 없다는 진실을 믿습니다. 역사는 우리들의 편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저의 희생은 절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반란군의 비행기에서 투하한 폭탄이 대통령궁의 정문을 관통합니다. 그리고 산티아고의 시계가 정오를 알리면서 대통령궁에 대한 진입이 시작됩니다. 반란군은 대통령궁을 반란군에게 내줄 수 없다는 결의를 다지며 끝까지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 항복하지 않으면 사실 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냅니다. 아옌데는 자신을 지키는 주변 사람들에게 총을 내려놓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가지고 있던 총으로 죽음을 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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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일곱: 피노체트 정권하의 살인과 인권탄압

아옌데 이후에 들어선 삐노체뜨 정권은 미국의 도움과 강압적인 계획경제 그리고 많은 노동자와 인권의 희생을 바탕으로 표면적 안정을 이룹니다. 아옌데 정권하에서 미국의 경제 제재 조치에 의하여 발생하던 인플레이션이 억제되었고, 외국의 광산 회사들이 진출하면서 재벌과 엘리트들의 주머니는 더욱 두둑해져서 경제 지표 자체는 좋아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정치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암흑의 기간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살해, 감금, 실종되어 오늘날까지도 이들을 찾아달라는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자행되었던 인권탄압의 희생자만 4만여 명에 사망 실종자가 3000이 넘습니다. 아옌데 정권을 지지하던 정치, 예술, 종교인들이 이 시대에 박해 혹은 죽임을 당했으며 이를 피해 외국으로 떠난 사람이 100만 명에 이릅니다. 칠레의 전체인구가 대략 일천만 명 정도이니 칠레 사람 10명 중 한 명이 독재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나라를 등져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참혹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역사 청산의 문제가 오늘날까지도 종결되지 않았습니다. 피노체트 정권을 우리나라의 박정희나 전두환과 비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이 죽을 때까지도 자신의 죄를 반성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점에서도 유사합니다. 한편 미국은 국민의 합의로 탄생한 정권을 친미 성향이 아니라 하여 무참하게 짓밟고, 자신들이 꼭두각시로 내세운 정권이 행한 20년에 가까운 독재 정치는 지지하고 방관했습니다. 그래서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1973~1989시기를 정치, 사회적으로 칠레 역사의 가장 암울한 시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멕시코의 경우 부르주아 성향으로 혁명이 좌절됨으로써 1492년 이후 성립된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였다고 한다면, 아르헨티나는 페론의 대안이 세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또는 이에 반하는 기득권의 반격을 견디지 못해 실패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곳 칠레에서는 미국의 사주를 받은 군사 세력에 의해 좌절되었습니다. 식민지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방식의 시도가 여러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 실험되었지만, 쿠바를 제외하고는 성공을 거둔 곳이 없습니다.

요즘 세상에 보면 꼭 말 안 듣고 깽판 치는 놈들이 많아졌으니 나라 꼴이 잘 되려면 이런 놈들 다 잡아다 넣고 좀 강하게 할 필요가 있지!”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전두환 시절 삼청교육대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사회 부랑자들의 정신을 개조한다면서 하던 말입니다. 독재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 이런 분위기의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습니다. , 나라가 발전하려면 독재가 필연이라는 논리 말입니다. 그런데 그 진정한 타당성을 말하기 이전에 삼청교육대에 보내진 사람들이 다 사회 부랑자였답니까? 삼청교육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정적을 축출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독재 세력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꼼짝 못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칠레 역시 이와 유사한 독재와 폭력의 역사가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보다도 더 지독할지도 모릅니다. 삐노체뜨가 쿠데타를 통해서 잡은 독재 정권의 유지 방법이 바로 이러한 공포 정치입니다. 무력은 정권을 창출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정권은 관성을 가지고 정권에 기생하는 정치, 경제, 사회의 기득권층을 결속시킵니다. 그리고 국가의 외형적 경제 성장을 가능케 합니다. 박정희와 유사합니다. 혼란스러운 국가가 잘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독재를 해야만 하는 겁니까? 독재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란 말입니까? 국가가 발전하기만 하면 독재는 눈감아 줄 수 있는 건가요? 칠레의 경제 발전을 이룩한 삐노체뜨와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고 자화자찬하는 박정희 정권이 자꾸만 비교되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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