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다섯: 투표로 뽑은 공산당 대통령
칠레는 주변의 다른 어떤 나라에 비해 잘 살고 정치적으로도 안정되었다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아르헨티나나 멕시코, 페루 등과는 뭐가 달라도 좀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악령과도 같은 라틴아메리카의 모순인 빈부격차, 쿠데타, 암살, 독재의 전통을 이들도 고스란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민중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나라가 좀 잘 살면 뭐하겠습니까. 있는 놈들만 떵떵거리며 살고 가난한 민중들은 상대적인 박탈감을 더욱 느낄 뿐이지요. 그러다 보니 이런 부정의와 불합리한 상황에 부닥친 민중들의 삶을 변화시켜보자는 사회주의 사상이 가난한 이들에게 급속도로 퍼져나갑니다.
공산당이 지구상에서 최초로 합법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잡은 적이 있는데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살펴보려는 아옌데 정권입니다. 경이로운 일이지요. 물론 보수 색채의 가톨릭 당과 공조한 것이 큰 역할을 했지만, 좌우간 아옌데 대통령은 사회주의적인 사상을 국가의 기본 통치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당연히 미국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지요. 국유화 등으로 서구자본 이익의 중요한 부분을 상실하게 되고 주변 국가까지 영향을 미칠 것을 두려워한 미국으로서는 자신의 앞마당과 같은 남미 국가에 공산당이 권력을 잡는 것을 방관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상 아옌데 정권이 공산당이라고는 하지만 혼합경제의 성격을 유지하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철저한 국가 주도적 공산사회를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국가 기간 산업인 구리광산이나 금융 등과 같은 분야만 국가가 주도하고 기타 산업 분야에 있어서는 자본주의의 전통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언론과 노조 등을 매수하여 반정부 활동을 벌이는 한편 칠레의 주요 산업인 구리 산업을 위축시키는 방법으로 그들이 싫어하는 아옌데 정권을 흔들기 시작합니다. 경제가 나빠지고 공약 이행이 어렵게 되면 많은 국민이 사회주의 아옌데 정권에게 등을 돌릴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칠레 국민은 이러한 미국의 전방위적인 계략에 굴복하지 않고 그들이 직접 손으로 뽑은 아옌데 정권에 대한 지지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미국은 삐노체뜨라는 인물을 내세워 군사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아옌데는 반란군에 맞서 끝까지 싸우다 대통령궁에서 자살하기에 이릅니다. 수십 년이 지난 이후 공개된 미국의 비밀문서에서 삐노체뜨의 쿠데타가 미국의 지원,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증거들이 나왔습니다. 이제는 칠레 군사 쿠데타의 배후가 미국이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학자는 없습니다. 아니, 배후라는 말보다 좀 다른 말이 필요할 것 같군요. 계획, 지시, 협력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이 사건을 주도하였으니 말입니다. 한 마디로 미국이 없었다면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도, 성공할 수도 없었던 것이지요.
라틴아메리카가 갖고 있던 사회적 정치적 모순도 적었고, 그래서 여러 면에서 안정을 이룰 수 있었던 칠레, 안정과 발전을 바탕으로 분배의 문제, 즉 빈부 격차의 문제를 정치라는 제도권의 틀 안에서 변화시킬 수 있었는데 그 기회가 미국에 의하여 무참하게 실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중남미 정치 불안정의 원인을 각 해당 국가의 문제로 돌립니다. 당연히 국가와 국민 스스로 책임과 문제의식을 느껴야 하겠죠. 결과적으로는 실패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아옌데 정권 실패의 주원인은 미국에 있습니다. 미국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기만 하면 독재 정부냐 아니냐를 따지지 않고 묵인하는가 하면, 자신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정권의 경우, 그것이 아무리 합법적으로 국민의 공감을 통해 민주적 방식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가만히 놔두지를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그리고 유일한 가치 기준은 미국의 이익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미국만 그런 것은 아니지요. 아무튼 라틴아메리카 국가가 어떠한 정부 형태, 어떠한 정책의 방향을 취하더라도 미국은 자국의 이익에 따라 그것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그리고 죽이느냐 살리느냐를 결정하고 실행한다는 것을 칠레 쿠데타를 통해서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