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중요 연대

1500년 포르투갈의 브라질 정복

1521년 에스빠냐의 멕시코 정복

1532년 에스빠냐의 페루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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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데 왜 신대륙이야?

우리가 교과서에서 위대한 발견이요 개척정신의 총화라고 배운 콜럼버스, 꼴론의 항해는 그야말로 몽상을 가진 사기꾼의 무지와 우연이 만들어낸 에피소드였습니다. 진취성이라고 배운 것은 무모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며, 동기나 과정과 결과에서 보여준 치졸한 욕망은 그 어떤 것도 인류의 가치라고 하는 측면에서 미화될 수 없는 것이었지요.

하여간 그렇게 시작한 원정에서 엉뚱하게도 커다란 대륙을 만나게 됩니다. 동양인 줄 알았는데, 웬걸 동양이 아니네. 물론 여기가 일본이나 인도가 아니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지만. 아무튼 이제까지 다른 나라가 갖지 못한 굉장한 이권이 이곳에 있을 것 같았습니다. “금이 있으면 아주 좋고, 없으면 땅이라도 가지면 되지.”

그런데 그 금이나 땅이 어디 유럽인들의 것이랍니까. 원래 살던 사람들은 허수아비인가요? 그러다 보니 원주민들의 원래의 소유권, 나아가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하면 유럽인들이 공들여 찾아낸 금과 땅의 이권을 독점하기 힘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원래 사람 안 살았어요라는 의미로 신대륙이란 말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는 빼앗은 것이 아니라 아무도 없던 땅을 개척한 거예요라는 말을 정당화시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콜럼버스의 숭고한 도전정신이고, 또한 나아가 그 유명한 미국 개척정신의 실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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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손엔 총칼, 다른 손에는 십자가

처음으로 백인들을 만나게 된 원주민들은 대부분 이들을 극진히 환대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황금뿐이었고 돈을 위해서라면 원주민들을 때리고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곳에 수천 년간 토대를 이루고 살아왔던 사람들은 당연히 거부하고 저항했겠지요. 땅과 금을 원하는 유럽사람들을 향해 순순히 맞아요, 이거 다 당신 땅이에요, 당신 금이예요. 금을 많이 못 구해온 저를 죽여주세요~~”라고 하지는 않았겠지요. 결국 유럽 침략자들의 칼과 총이 맨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남들이 멀쩡히 잘살고 있던 땅을 빼앗은 사람들도 뭔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구실이 필요했겠죠. 거기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전쟁과 살육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종교가 따라간 겁니다. 공식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려는 유럽의 국왕을 위해서 정복을 한 것입니다. “너희들은 하나님 안 믿는 나쁜 놈들이니까 하나님 믿게 해주려는 거야!. 우리가 너희들을 위해서 좋은 일 해 주는 거야, 짜샤!” 뭐 대강 이 정도의 합리화입니다.

원주민들은 다양하고 인간적이며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 종교관을 가지고 있던 터라 사실 많은 경우 서양사람들이 가지고 온 기독교를 거부감 없이 잘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근데 이런 상황이 에스빠냐 사람들 입장에서는 좀 황당한 겁니다. 원래 주목적은 금은보화, 그리고 그게 없으면 땅, 나아가 그 땅에서 일할 원주민 노동력인데, 그렇게 대놓고 노골적으로 말할 수 없어 기독교들 들이댄 것인데 원주민들이 이걸 덥석 믿겠다고 하면서 좋다고 하니... 아니 이게 아닌데, ... “어 그래,~~~ 우물쭈물 우물쭈물 ~~~ 근데 너희들 거짓말 하는 거지. 너희들 말은 그렇게 하고서 우상을 계속 믿고 있는 거지?... 그러니 너희들을 때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너희들이 그렇게 많이 죽고 힘든 것은 살인적인 노동과 핍박 때문이 아니라 너희들이 기독교를 잘 믿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 우리가 너희들을 교화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거야!”

정복의 과정은 잔인하고 철저했습니다. 기존 원주민들의 모든 것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관습, 재산 등그야말로 모든 것이 철저히 무시되고 에스빠냐사람들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과 이유로 정복은 잔인하고 철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철저하지 않으면 신대륙이라고 말할 수 없을 테니까요.

잠깐! 추천 영화 : ‘1492 콜럼버스’, 감독: 리들리 스콧, 제작년도: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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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르투갈, “돌아 삔다~~”

당시 유럽에서 별 볼 일 없는 나라였던 에스빠냐가 대박을 터트렸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금과 은이 유럽으로 들어오고 새로운 땅에서 온 물건들이 유럽을 열광시킵니다. 다들 에스빠냐가 부러워서 미칠 지경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제일 배가 아팠던 나라가 어디일까요? ... 포르투갈입니다. “아 짜증나!, 희망봉 돌아 새로운 무역로를 막 개척했는데, 이거 제대로 활용해보지도 못했는데, 더 좋은 무역로가 생겼네 ㅜㅜ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었는데 그걸 에스빠냐에 빼앗기게 되었네. 아이고 배 아파라! 더군다나 우리는 현재 최고의 항해술과 국력을 가진 나라 아닌가.~~”

그러나 당시 유럽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던 교황은 1493년에 이미 인떼르 꼬에떼라Inter Cohetera 칙서를 통해 에스빠냐에 모든 권리를 주게 됩니다. 중세의 유럽에서 교황의 말은 어떤 나라 왕의 말보다도 더 힘이 있던 시대다 보니 여기에 누가 반기를 들 수도 없었습니다. 대서양의 서쪽 끝에 있는 까보 베르데Cabo Verde 섬의 서쪽 100레구아(400km) 지점을 기준으로 그 서쪽의 땅을 모두 에스빠냐의 소유로 인정한 겁니다. 즉 에스빠냐가 발견한 땅에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얼씬도 하지 말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지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시 최고의 국력을 가진 포르투갈이 마지막 남은 모든 권력을 동원해서 교황청에 로비를 하게 됩니다. 한 참 건너뛰고 결론부터 말씀을 드린다면, 포르투갈의 그 애잔한 노력의 결과가 바로 오늘날의 브라질이 됩니다.

149467일 포르투갈의 청원으로 또르데실야Tordesilla 조약이 맺어집니다. ‘까보 베르데의 서쪽 370레구아(1,500km)에 그어진 자오선을 기점으로 서쪽은 에스빠냐가 가지고, 동쪽은 포르투갈이 가지라는 내용입니다. 즉 전에 100레구아였던 에스빠냐 땅의 경계선이 서쪽으로 1000km이상 옮겨가면서 브라질 땅을 포르투갈이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때 이미 아메리카 대륙의 지리적인 실체를 잘 알고서 한 것은 아니고 다만 모든 권리를 에스빠냐에게 줄 수만은 없다는 포르투갈의 마지막 의지가 관철된 것입니다. 사실상 이때를 기점으로 포르투갈은 당시 세계 최고의 패권국가로서의 영향력을 마지막으로 발휘하고 화려하게 은퇴합니다. 그런데 포르투갈은 부자의 마지막 몸부림으로 브라질 땅을 건지게 된 거지요.

아메리카 대륙의 지도를 보면 브라질이 제일 동쪽에 두드러져 있습니다. 그래서 150039일 포르투갈의 까브랄Pedro Alvares Cabral이 지금의 브라질 땅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이후 포르투갈의 정복자들이 이 땅에서 파우 브라질Fau Brasil이라는 이름을 가진 붉은색 염료를 만드는 나무를 싣고 귀환하게 됨으로써 브라질이란 이름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또르데실야 조약의 결과 에스빠냐의 영토선이 서쪽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가장 끝자락에 있었던 남미의 현 브라질 땅이 유럽의 망한 부자 포르투갈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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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약탈이 시작되다.

1492년은 사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아메리카 대륙과는 별 상관이 없는 연도입니다. 1492년 유럽사람들은 아메리카 대륙 근처에도 못 갔었고, 카리브해의 섬과 그 근처에나 왔다 갔다 하는 정도였습니다. 꼴론은 죽을 때까지도 자신이 도착한 곳이 이전까지 듣도 보도 못한 땅이라는 사실조차 몰랐으니까요. 유럽사람들은 여기가 어디인지 그야말로 노 아이디어였던 거지요. 마젤란이라는 사람이 남미대륙을 통과해서 세계를 한 바퀴 도는 항해를 시작한 것도 1519년의 일입니다. 그가 어마어마한 태평양을 건너 구사일생으로 필리핀에 도착한 것이 1521년의 일입니다. 그러니 유럽사람들은 1492년 이후 20~30년 정도나 지나서야 여기가 동양이 아니라 새로운 땅인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카리브해 연안에 웅크리고 있던 에스빠냐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본격적으로 발을 디뎌 보려고 노력을 하기 시작한 것이 1517년의 일입니다. 꼬르도바(Córdoba)라고 하는 사람이 주축이 되어 멕시코 남쪽, 지금의 유까딴 반도를 처음으로 정찰하게 됩니다. 그런데 꼬르도바는 그곳에 있던 원주민들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고 여기에서 원주민들의 화살을 맞아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결국에는 쿠바에 돌아가서 그 후유증으로 죽게 되지요. 그런데 탐험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강력한 저항을 받은데다, 유까딴 반도의 건축물들이나 원주민들의 행색이 대단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합니다. 황금에 욕심을 가지고 있던 쿠바의 에스빠냐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꼬르도바가 탐험한 지역에 금은보화가 가득할 거로 생각하게 됩니다. 구미가 당기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다음으로 나선 사람이 바로 그리할바Grijalva입니다. 1518년입니다. 그런데 그리할바 역시 주변을 정찰하는 임무만을 수행하고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이야기해대기 시작합니다. 굉장한 사람들을 보았고 화려한 도시가 유럽의 그 어떤 곳보다도 크고 웅장했다느니 등등...어쩌고 저쩌고. 참 많이 떠벌린 것 같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쿠바에서 기회를 노리던 인간들 중에 내가 먼저 기회를 잡아야겠다는 야심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제 진짜 쎈 놈이 등장하게 되는 거. 아메리카 대륙 침공의 선봉장이라 할 수 있는 꼬르떼스Cortés란 인물이 탄생한 겁니다. 1519년의 일입니다. 1517년 꼬르도바의 최초 아메리카 대륙 정찰에서부터 1518년의 그리할바 탐험 그리고 1519년까지 이어지는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갔습니다. 사실 이때가 진정한 의미에서 아메리카와 유럽의 만남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시에 꼬르떼스가 작성한 편지도 지금까지 남아있고 그를 충실히 따르던 부하인 베르날 디아스 델 가스띨요Bernal Díaz del Castillo의 일기도 아주 두꺼운 책으로 만들어져 잘 보존되고 있는 등 관련 자료도 많아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해 줍니다. 하여간에 꼬르떼스는 아주 야심이 큰 인물이었습니다. 이전에 정찰을 한 꼬르도바와 그리할바가 여러 난관을 만났었기 때문에 쿠바에 있던 총독은 꼬르떼스에게 조심스럽게 정찰만 하고 오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이 꼬르떼스는 흥미로운 소식을 놓치지 않습니다. 메시까라고 하는 족속들이 멕시코 고원지방에 살고 있는데 이놈들이 아주 강력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족속으로 금은보화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은 것입니다. 사실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정보였지요.

하여간 이런 말을 들은 이상 꼬르떼스는 애당초 쿠바를 떠나 항해를 시작할 때부터 이곳을 정복해서 금은보화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하 난 것으로 보입니다. 11, 선원 500명 그리고 말 16필이 그와 같이합니다. 야심에 찬 계획을 차곡차곡 수행해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중간에 유까딴반도에서 만난 원주민들을 회유하거나 정복해서 그곳에서 메시까에 대한 정보도 얻는 한편 통역을 담당할 사람도 구하게 되고 등등의 과정을 거쳐 드디어 베라끄루스 상륙작전을 감행하게 됩니다. 뭐 사실 이곳 베라끄루스에서 원주민들의 저항이나 전투가 있었던 것도 아니라서 상륙작전이라는 말이 좀 무색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전 아메리카 대륙이 유럽사람들에 의하여 식민지화되는 상징적인 첫 사건이라고 하는 점에서 제가 좀 부풀려서 상륙작전이라고 거창하게 이름을 붙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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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베라끄루스(Veracruz) 상륙작전

베라끄루스라는 도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멕시코 최고의 항구로 인식되는 곳입니다. 메시까 족의 본거지이자 멕시코 중앙고원지방의 중심지인 멕시코 시티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 중의 하나로서 지리적인 요충지이기도 하지요. 꼬르떼스가 이곳에 서양인 처음으로 발을 들인 이후 지금까지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오가는 배들이 가장 많이 정박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이곳이 꼬르떼스의 메시까 정복의 교두보가 됩니다. 그러나 만반의 준비를 하고 베라끄루스에 도착한 꼬르떼스는 선원들의 저항에 부딪힙니다. “쿠바에 있는 부황이 분명히 정찰만 하고 오라고 했는데 왜 정복을 위해서 상륙을 하느냐 이건 안된다. 위험하다.” 뭐 이런 항의가 빗발쳤던 거지요. 그러자 꼬르떼스는 배수진을 칩니다. 타고 온 배를 모두 불살라 버렸다고 전해집니다. 이제 돌아갈 수도 없으니 오로지 진격만이 남아있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지요.

그런데 엄밀하게 보면 이건 역사적인 사실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많은 멕시코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학술적인 사실과는 별개로 당시 모든 배를 불살랐다고 하는 극적인 이야기에 사람들은 더욱 열광하게 되었고, 그냥 그렇게 이야기가 굳어지게 된 것입니. 그러나 사실은 배를 불태우지는 않았고 일부 배를 분해해서 당장 항해가 불가능하게 만든 정도로 보입니다.

하여간에 꼬르떼스는 부하들을 향해 이제는 돌아갈 수도 없다. 그러니 모두 나를 따르라! 그렇게 하면 메시까 족속들이 가지고 있는 황금을 갖게 될 것이고, 우리는 부자가 돼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설득한 것이지요. 결국 선원들도 황금에 대한 욕심으로 꼬르떼스를 따라 메시까 정복의 길에 오릅니다. 그리고 이것이 아메리카 대륙 정복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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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슬픈 밤의 나무

우여곡절 끝에, 주변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400Km가 넘는 행군을 하고 해발고도 3000m에 달하는 고봉을 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1519118일 메시까(Mexica)의 최고 지도자인 목떼주마(Moctezuma)와 꼬르떼스가 멕시코시티에서 만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나름 화기애애했습니다. 선물도 주고받고 수도의 한가운데로 에스빠냐사람들을 모셔와 융성한 대접도 했습니다. 금은보화를 달라고 해서, 있는 거 없는 거 다 모아 주기까지 했지요. 그런데 에스빠냐사람들은 이들이 이렇게 친절한 것에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이러다가 갑자기 우리를 공격해서 금은보화도 다 뺏고 우리를 죽이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경계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다른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사를 찾아봐도, 서양사람들이 들어왔을 때 원주민들이 극진히 대접을 해줘서 그나마 생명을 부지하고 새로운 땅에서 정착해서 살았던 것이 일반적입니다. 원주민들이 먼저 폭력적으로 유럽사람들을 대한 경우는 극히 예외적입니다. 그런데 에스빠냐사람들은 도둑이 제 발 저린 거지요. 불안함으로 인하여 원주민들이 몇 명 모이는 것만 봐도 의심을 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일로 먼저 공격을 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메시까 원주민들의 심장부입니다. 병력면에서도 열세에 있었던 에스빠냐 사람들의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결국 도망을 가게 됩니다. 1520630일 밤의 일입니다. 에스빠냐사람들은 이 밤을 노체 뜨리스떼(슬픈 밤)Noche Triste - 에스빠냐사람들에게 슬픈 패배를 안겨준 밤이라 하여 그렇게 부릅니다. 그때 가지고 도망가다가 물속에 빠뜨린 황금이 지금 어디에 있느니 없느니 하는 풍문들이 오늘날까지도 떠돌고 있습니다. 물론 그걸 찾아내 인생 역전을 하겠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여간 그 당시 전투에 패배하고 간신히 도시를 빠져나온 꼬르떼스가 힘들고 원통해서 나무를 붙잡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믿거나 말거나 슬픈 밤의 나무라고 이름 붙여진 그 나무가, 즉 꼬르떼스가 붙잡고 통곡을 했다는 그 나무가 아직도 멕시코시티에 있습니다. 그 사건이 지금으로부터 500여년이 지난 일이니 정말 그때 꼬르떼스가 울기는 한 건지 그리고 그 나무가 그 나무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당시의 이야기는 아직도 사료와 전설을 오가며 멕시코의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로 전해 내려옵니.

그런데 슬픈 밤을 겪은 꼬르떼스와 에스빠냐사람들이 그냥 물러설 사람들이 아니지요. 더군다나 이미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황금을 보았던 터라 욕망을 채우기 위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은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슬픈 밤의 악몽을 극복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원주민들을 살육한 에스빠냐사람들은 1521813일 지금의 멕시코 시티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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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저주받은 정복자들

멕시코에서 꼬르떼스가 황금을 손아귀에 쥐었다는 이야기는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 막 도착하기 시작한 에스빠냐사람들에게 그야말로 황금의 열병을 앓게 할 만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힘을 얻어 또 다른 엘도라도(황금향)에 용감하게 뛰어든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삐사로Francisco Pizarro입니다.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온 사람들을 보면 전형적인 야망가가 많았습니다. 본국인 에스빠냐에서 안정적인 기득권을 가진 사람보다는 뭔가 부족하고 아쉬운 것이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신분 상승이나 인생 역전의 기회를 노리고 온 경우가 대부분이었지요. 위험한 탐험이나 정복 등을 통해서라도 기회를 잡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은 항상 부담이 따랐으며 생각보다 더 큰 위험을 감수하거나 심지어 죽음을 불사해야 했지요. 그런데 성공을 하게 되더라도 결국 욕심은 끝이 없어서 더 많은 황금, 더 많은 지역, 더 많은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싶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계속 무리를 하다 보면 언제가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지요. 얻게 된 황금은 주변의 시기와 질투를 불러일으키고 이를 지키기 위한 암투는 끝이 없게 됩니다. 결국 앞에서 살펴본 꼴론이나 꼬르떼스, 그리고 지금 등장한 삐사로까지 그 어느 누구도 편안한 여생을 보낸 사람이 없습니다. 삐사로도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한, 그렇지만 끝없는 욕심으로 불행한 생을 살아야만 했던 인물의 전형입니다.

그는 군인인 아버지와 불우한 가정환경을 가진 어머니 사이에서 사생아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냈을 뿐만 아니라 교육도 온전히 못 받아 평생을 문맹으로 살 정도였습니다. 사정이 이러니 인생 역전을 꿈꾸며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가게 되는데, 별 신통한 결과가 안 생기자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1513년 다시 아메리카에 건너갑니다. 그리고 기회가 찾아오게 됩니다. 당시 파나마 지역에 있던 관리들 사이에서 정권을 거머쥐려는 암투가 일어납니다. 여기에서 기존 총독에 대항하는 세력, 즉 반 총독파를 제거하는데 삐사로가 충성을 바침으로써 총독의 신임을 얻게 됩니다. 이것을 계기로 그의 신분은 급상승하게 되지요. 그러는 와중에 삐사로는 꼬르떼스가 멕시코에서 거둔 승리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결국 그가 염원하던 남미 본토 정복의 꿈을 이룰 항해를 할 수 있게 됩니다. 1530년의 일입니다.

불과 3척의 배와 200여 명의 선원을 이끌고 잉카 정복에 나섭니다. 역시 원주민들은 외지에서 온 손님들을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극진히 대접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외지인들이 바라는 건 극진한 대우가 아니라 극진한 황금일 뿐이었습니다. 15321115일 삐사로와 잉까의 최고 지도자인 아따후알빠Atahualpa는 현재 페루의 까하마르까Cajamarca라는 곳에서 역사적인 첫 만남을 가졌습니다. 에스빠냐사람들은 어떻게든 이들을 무력으로 굴복시킬 수작을 벌였고 결국 에스빠냐 군대의 살육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마치 황금의 저주와도 같이 이 당시 현장에 있던 주요 사람들은 다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잉까의 최고지도자 아따후알빠는 파사로의 군대에 의하여 처형됩니다. 삐사로의 항해를 도왔던 부관인 알마그로Diego de Almagro는 삐사로와의 갈등으로 역시 처형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삐사로는 자신이 죽인 부하의 아들에게 복수를 당해 칼에 찔려 죽게 됩니다. 그 어떤 누구도 행복하지 못한 탐욕의 결과를 보는 듯합니다.

한편 에스빠냐 세력에게 저항하던 뚜빡 아마루Túpac Amaru라고 하는 원주민 지도자가 1572년에 빌까밤바Vilcabamba에서 사지가 잘려 죽음으로써 남미의 가장 큰 원주민 세력인 잉까가 더 이상 저항할 수 없게 됩니다. 드디어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시대가 열리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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