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부 흙과 돌의 미학
마야 사람들의 건축과 예술은 자연 앞에서 인간을 내세우지 않는
아름다움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제 23 장
예술
마야의 예술은 종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술품이라 말할 수 있는 대부분의 것들이 실용적인 것도 있기는 하지만 그 중 작품성과 완성도가 높은 것들은 거의가 종교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들이라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도자기, 조각, 벽화, 건축 등에 보이는 뛰어난 작품들은 많은 수가 그들의 신과 설화를 다루고 있으며 이밖에 예술적으로 표현된 문자나 달력들도 그들의 우주관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종교적인 면이 강조된 예술이라 하여 이들의 작품들이 중세 유럽의 종교예술처럼 근엄하고 엄격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 자체의 성격이 일상생활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되새겨 보면 이들의 작품이 당연히 그러한 일면을 반영할 것이라는 것 또한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서민들의 삶을 진솔하게 담은 해학적인 일상에 대한 표현이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것들을 놓고 많은 사람들이 이것은 종교적인 작품이다, 혹은 아니다 라는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이러한 것들이 종교적인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기준은 종교를 어떻게 정의하느냐, 혹은 예술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더욱이 마야의 경우, 이미 위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너무나 종교적인 삶이기에 종교가 역설적으로 세속화되어 그 도그마적인 요소를 상실했던 것을 기억해보면 이들의 예술을 가지고 이것이 종교적이다, 혹은 아니다의 한계를 엄격히 규정짓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점을 염두에 두고 각 예술 분야의 특징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도자기
도자기는 인간의 생활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친근한 물건 중의 하나로 다른 어떤 도구보다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마야의 도자기도 예외는 아니다. 마야 사람들은 음식을 보관하거나 조리하는 기능 이외에도 장식품, 장난감, 악기 등 도자기를 여러 가지 용도에 사용하였다. 다양한 표현 또한 돋보인다. 세계 어느 나라의 도예사(陶藝史)에서도 이렇듯 다양한 용도의 도자기들이 자유로운 표현과 함께 높은 기술과 예술적 감각으로 제작된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기능, 주제와 소재의 다양함을 마야 도자기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특징들로 꼽을 수 있겠다. 이와 연관되어 다양한 점토인형의 제작이 돋보인다. 물론 점토인형은 전체 메소아메리카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제작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마야의 것은 형태 만들기나 장식 등에서 특히 높은 완성도를 보인다. 대부분의 점토인형들은 종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마야지역에서는 기원전 1500년 이전부터 음각기법(Incisi뾫), 기벽에 구멍을 뚫는 투각기법(Perforaci뾫), 작은 점토덩어리를 손으로 모양을 만들어 붙이는 빠스띠야헤기법(Pastillaje) 등을 이용한 점토인형들이 만들어졌다. 일부에서는 몰드를 이용하여 대량으로 같은 모양을 가진 것들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소재 면으로 본다면 풍요를 상징하는 여성을 표현한 점토인형이 많다. 전고전기 후반과 고전기의 초반에 걸쳐 점토인형생산이 현격히 쇠퇴하다가 고전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새롭게 활기를 되찾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때의 점토인형들은 더욱 다양한 소재를 선보인다. 신, 종교지도자, 사회지도자, 공놀이선수, 장인(匠人), 전사(戰士), 무용수, 신체장애인, 노인, 젊은이 등 점토인형을 통하여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각양각색의 생활모습과 종교 등을 거침없이, 자유스럽게, 그리고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멕시코의 하이나 섬(Isla de Jaina), 빨렝께(Palenque) 등지에서 특히 많은 작품들이 발견되고 있다.
마야의 전고전기부터 이미 도자기는 생활과 종교에 가장 중요한 용구로서 대량으로 가정과 전문 도방(陶房) 등에서 만들어진다. 가마에 넣기 이전 단계에서 형태를 만들어 점토가 마르기 전에 손톱, 조개껍데기, 천, 밧줄, 도장, 도구의 끝 부분 등으로 찍어서 무늬를 내는 방법들이 널리 보급되었다. 또한 빠스띠야헤기법(Pastillaje)도 매우 독특하게 발전된다.
고전기에 들어서면서 한두 가지 색깔을 입히고, 동물의 모습을 그리거나, 혹은 간단한 기하학적 문양을 새겨 넣는 등, 보다 다양한 기법들이 시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형태가 다양화되는 것 역시 고전기에 접어들어 나타나는 특징이다. 한편 성형과 장식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서 더욱 다양한 표현이 가능해진다. 결국 이러한 다양화는 각 지방의 특색을 더욱 구체적으로 만드는 계기가 된다. 각 지역에서 이전까지의 단순한 작업에서 터득된 기술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이는 지역적인 특색의 발전으로 나타나게 된다.
사실상 어느 문명이나 비슷하겠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예술의 흐름이나 분위기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은 아니다. 도자기 발달을 공부하면서도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하여 전고전기, 고전기, 후고전기 등으로 우리 스스로 이해의 편의를 위하여 시대를 구분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여러 가지 사회 제반 요소들의 변화가 두드러지는 시기를 중심으로 이러한 구분을 하였지만 어떤 한 시점을 기준으로 엄격한 변화가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물론 예외적으로 큰 전쟁이나 자연재해와 같은 요소들이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초래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변화의 속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느리다고 볼 수 있다. 역시 도자기에 있어서도 전고전기에서 고전기로의 전환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각 지역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마야지역에서는 대략 기원전 100년(또는 50년)에서 150년(또는 250년)을 이러한 전고전기와 고전기의 전환단계를 일컫는 선고전기(Proto Cl뇋ico)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때에 만들어진 마야 도자기의 일반적인 특징은 유방(乳房)형의 굽으로 대표된다고 할 수 있다.
장식 기법은 이전부터 시작된 네가띠보기법(Negativo)이 주류를 이루고 전형적인 단색을 가진 “아나랑하도 도자기(Anaranjado: 오렌지 색깔이 나는 도자기)”와 이전부터 꾸준히 발전해 오던 다채색 도자기들이 고전기를 맞아 절정에 이른다. 이리하여 “고전기시대 마야 도자기는 회화적 표현으로 특징지어진다”고 한마디로 압축해서 말한다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도자기의 모든 면을 마치 도화지처럼 그림으로 가득히 메운 고전기 도자기의 전형적인 아름다움의 세계를 보여준다.
다채색의 도자기는 고전기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고전기 후반에 이르러 최고의 절정을 이루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많이 접할 수 있는 다채색 도자기는 부드러운 점토로 된 항아리가 많으며 그 항아리의 기벽에 여러 색깔을 가진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원색계통을 주로 이용한 이들의 작품들은 색상의 배합 면에서 높은 작품성을 보여준다. 주제를 본다면 마야인들은 단순한 선, 점, 기하학의 다양한 형태로부터 일상생활, 수렵, 의식, 역사적 사건의 장면에 이르기까지 마치 종이에 그림을 그리듯 도자기의 면에 장식을 하였다. 종종 마야문자도 첨가되고 종교적인 개념, 설화도 삽화 형태로 그려진다. 이러한 도자기의 대부분은 종교적인 용도에 쓰였다고 말할 수 있으며 중요한 사람들의 무덤 부장품으로도 많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다채색 도자기들이 꼭 의례적인 용도로만 이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일상의 삶 자체가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의 정치와 종교도 엄격하게 일반 마야 사람들의 삶을 위하여 존재할 때 그 진정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면 도자기제작에서도 이러한 점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생활용구인 접시, 솥, 물항아리, 잔 등의 실용기들에서도 예술적인 표현을 한층 더해주기 위하여 붉은색, 검은색, 오렌지색, 회색, 백색, 앵두색 등이 다양한 방식으로 응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후고전기에는 이러한 발전된 도자기 제작방법들이 더욱 심화되어 혁신적인 변화도 눈에 띈다. 고온으로 가열하였을 때 윤기를 내는 성분이 들어있는 점토를 사용하여 도자기 표면에 마치 유약을 바른 것과 같은 효과가 나는 쁘로미소(Plomizo) 도자기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납성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납성분으로 인하여 윤기가 도는 것으로 생각되어 “납 도자기(Plomizo, Plumbate)”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이 도자기는 후고전기 초반에 만들어져 메소아메리카 지역에 폭넓게 퍼져나갔다. 이는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우연히 알게 된 금속 광택효과를 살리려는 시도의 결과라고 예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도자기들은 고전기 말기의 띠끼싸떼(Tiquisate)라고 알려진 곳에서 파생된다. 기표면이 유리같이 느껴질 정도로 그 광택이 두드러진다. 이 도자기는 소성 온도에 따라 다양한 색깔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올리브 녹색, 희뿌연 흰색, 붉은 갈색 등의 다양한 색을 만나게 된다. 즉 형태는 같으나 소성 온도에 따라 색깔이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다른 도자기처럼 보이나 사실은 같은 종류의 도자기로 분류할 수 있다.
쁘로미소 도자기는 대략적으로 두 가지로 구별된다. 첫 번째로 초기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산 후안(San Juan) 도자기인데 고전기 후반에 제작되어졌다. 외견상으로 보기에 소성상 온도 조절이 잘되지 않아 기표면이 약한 광택, 혹은 무광택을 띠게 된다. 또한 붉은색이 나타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오렌지 빛을 띤 것들도 있다. 바닥이 넓은 접시 형태, 가운데가 볼록하고 짧은 목을 가진 용기, 향로, 기벽면이 볼록한 용기 등이 많다. 반면 또일(Tohil) 도자기는 좀 더 발전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이 도자기는 산 후안(San Juan)의 것보다 더 정교하고 고도의 장식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소성과정에서의 온도 조절이 잘 되어 기표면이 동일하게 끝맺음되어 있다. 일반적인 외양은 아나랑하도 도자기와 비슷하고 분포는 유까딴(Yucat뇆)반도, 멕시코 만(Golfo de M럛ico), 중앙고원, 메소아메리카의 북쪽, 빠나마(Panam?까지 상당히 광범위하다. 형태면에서는 일종의 작은 항아리와 같은 것이 많이 제작되었고 소재면으로 본다면 대부분 인간이나 동물의 형태가 많다. 인간이 소재가 될 때는 노인, 곡예사, 전투사, 고인의 두상 등이 즐겨 제작되었고, 동물일 경우에는 사슴, 재규어, 곰, 칠면조 등이 많으며 신의 모습을 소재로 다룬 것도 상당수 나타난다.
한편 고전기가 끝나가면서 부드러운 점토로 제작되어 표면을 조각한 항아리로 대표되는 아나랑하도 도자기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 도자기가 회화 기법을 주로 삼았던 이전의 양상과는 다르게 새로운 양식으로 마야의 저지대에서 나타난다. 이때 새롭게 전성기를 맞은 이 아나랑하도 도자기1)(각주1_ 아나랑하도 도자기는 다음의 5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실오(Silho), 알따르(Altar), 꾼두아깐(Cunduacan), 마띠야스(Matillas), 발깐(Balcan) 지역에서 제작된 도자기에 각각 알파벳 X, Y, U, V, Z로 이름을 붙였다.) 는 기본적으로 점토의 부드러운 질감이 살아난다는 것을 그 중요한 특징으로 꼽을 수 있겠다. 이것들은 고전기 후반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으나 실질적으로 후고전기에 더욱 폭넓게 확산되었다. 세 개의 다리가 있는 접시, 받침대가 있는 원형 용기, 고리 모양의 굽이 있는 접시, 삼족 굽이 있는 배 모양의 용기, 속이 비어 있거나 종 모양 도자기 등의 다양한 형태가 선보인다. 장식은 매우 풍부하게 나타나며 소재에 있어서는 인물, 마야문자, 기하학적 도안이 주를 이룬다. 가끔씩은 흰색, 또는 어두운 갈색으로 칠한 용기도 보이고 음각선으로 처리한 선으로 그림을 그린 것들도 나타난다.
후고전기의 도공들은 점토의 가소성을 높이고 소성중에 갈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양한 이물질이 첨가된 기공이 큰 점토를 사용했으며 이러한 결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거친 부분을 감추는데 적합한 프레스꼬(Fresco) 회화 기법을 사용하였다. 프레스꼬 회화 기법이란 벽화 등에서도 많이 이용되는 것으로써 그림을 그릴 장소의 주변을 먼저 회반죽으로 바른 후 그곳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도자기에도 이러한 기법을 사용했는데 이렇게 그려진 그림은 도자기가 완전히 구워진 다음에 칠을 한 것이다. 이것은 유약의 성분에 따라 색깔과 질감을 달리하는 전통적인 우리나라 도자기 채색 방법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어 도자기 형태를 다 만들어내서 소성을 마친 다음에 페인트나 아크릴 등으로 표면을 칠하는 것을 현대 멕시코 도예마을에서 아직까지 볼 수 있다. 이러한 각도에서 오늘날 멕시코와 중미 전통도자기의 회화기법을 두갈래로 나누는데 하나는 그림을 그리고 소성을 하는 뜨거운 그림(Pintura Caliente)이고 다른 하나는 소성을 하고 난 다음에 그림을 그리는 차가운 그림(Pintura Fr뭓)이다. 마야 도자기의 - 그 당시에 사용한 다양한 색상 중에서도 - 짙은 푸른색 안료만이 세월의 풍상을 이기고 오늘날까지 상당히 잘 보존되고 있는데 이를 가리켜 아술마야(Azul Maya)라 부른다. 천 년 이상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색깔을 그대로 유지한 채 기벽에 남아 있는 견고함이 높이 평가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빨려들어 갈 듯한 깊이 있는 푸른색으로 인하여 마야예술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대표적인 색깔로 많이 알려져 있다.
또한 후고전기에는 음각기법(Incisi뾫), 각인기법(Grabado), 도장기법(Sellado) 등과 같은 장식기법들이 새롭게 등장한다. 후고전기 말기에 접어들면서 고전기 도자기의 복고적인 형태들이 나타나는 것도 볼 수 있다. 전통적인 붉은색 도기와 멕시코 중앙고원에서 즐겨 만들었던 똘떼까(Tolteca)풍의 도기들이 공존하며, 납골함, 종 모양의 굽을 가진 반신반인(半神半人) 문양이 새겨진 향로, 동물과 신들을 소재로 한 도기 등이 이때에 주로 제작된다. 기술적인 면에서는 입자가 큰 점토의 사용, 불완전 소성, 표면 연마처리(Pulido)의 미흡 등 고전기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기술적인 완성도가 떨어지는 도기들도 눈에 많이 띈다. 중앙집중적인 정치구조의 붕괴로 인하여 고도로 전문화된 도방의 유지가 불가능하게 되면서 일어난 현상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즉 화려한 종교활동에 필요한 도자기들을 전에는 중앙연맹차원에서 지원하는 전문 도방에서 제작하였으므로 큰 규모의 도방운용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소규모 도방들이 분권화된 각 자치정부의 관할하에 유지되면서 그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따라서 후고전기 말기로 접어들면서 조각이나 건축과 마찬가지로 도자기도 기술적인 면에서의 하락 조짐이 나타난다.
조각
나무나 돌로 만들어진 조각품들의 주 테마는 신, 신격화된 인물, 반신반인(半神半人), 반수반인(半獸半人), 종교행사(인신공양, 피공양 등), 지도자, 전쟁포로, 전사(戰士) 등이다. 역시 각 지방에 따라 독특한 조각양식을 가지고 있다.
1. 뻬뗀(Pet럑)양식
석회로 만든 커다란 신의 얼굴이 건물 외부장식과 머리장식인 끄레스떼리아(Crester뭓)에 많이 이용되었다. 최고지도자나 중요한 사람들의 모습이 화려한 장식을 한 마야문자와 함께 비석이나 건물 벽면 등에 새겨져 있다. 이곳의 양식에는 다른 곳보다 음각기법이 더 많이 나타난다. 띠깔(Tikal)유적지가 대표적인 곳이다.
2. 모따구아(Motagua)양식
이곳에서는 양각(陽角)기법이 다양하게 시도되었는데, 동그란 기둥을 돌아가며 조각으로 빽빽이 메운 것들이 꼬빤(Cop뇆)유적지에서 많이 나타난다. 지도자나 중요한 사람들의 모습, 반수반인(半獸半人)의 모습을 한 신이 화려한 장식이 곁들여진 마야문자의 설명과 함께 비석이나 제단 등에 새겨져 있다.
3. 우수마씬따(Usumacinta)양식
박동감 넘치는 축제, 제사, 전쟁 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건물의 입구 위와 좌우 등에 그들의 조상들에 관한 기록들이 정밀한 돌조각으로 만들어졌다.
4. 빨렝께(Palenque)양식
돌로 된 음각(陰角)과 석회 몰드를 이용한 작품이 많다. 커다란 신의 얼굴이 건물 외부장식과 끄레스떼리아 장식에 많이 이용되었다. 신하들이나 전쟁포로들을 거느리고 있는 지도자의 모습이 여러 장소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대부분의 이러한 조각들에 마야문자가 같이 쓰여 있다. 건물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도록 입구 좌우측 벽 등에 조상들의 연대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5. 리오 벡 체네스(R뭥 Bec Chenes)양식
돌과 석회를 이용하여 건물의 입구나 외벽장식에 비의 신 착(Chac)의 모습을 즐겨 조각하였다.
6. 뿌욱(Puuc)양식
기하학적인 무늬와 조화를 이룬 비의 신의 모습이 여러 곳에서 연속적으로 반복되어 조각 모자이크를 형성한다. 인간의 모습은 아주 조금이며 종교적인 소재들이 조각에 주로 이용된다.
7. 마야 똘떼까(Maya Tolteca)양식2)
깃털 달린 뱀3), 뱀을 형상화한 기둥, 연속된 기둥 전사(戰士)상, 재규어문양, 독수리문양, 재규어가 심장을 먹는 문양, 착몰(Chacmol)상4), 아뜰란떼(Atlante)상5), 기수(旗手)상, 메시까지역 신의 문양, 인간심장을 꺼내 바치는 모습의 표현 등으로 유까딴반도의 북쪽 치첸이차(Chich럑 Itz?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각주2_ 멕시코 중앙고원의 뚤라(Tula)유적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살았던 똘떼까(Tolteca)족이 마야지역을 침공하여 이러한 예술양식을 전파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군사적인 정복설은 근거가 없는 것이며 상호 영향, 혹은 오히려 마야지역에서 처음으로 유행하고 그 이후에 뚤라 쪽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등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어찌되었거나 똘떼까가 마야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아니다.
3_ 멕시코 중앙고원지방에서는 퀘잘꼬아뜰(Quetzalc뾞tl)이라 불렸으며 유까딴의 마야 사람들은 꾸꿀깐(Kukulk뇆)이라 하였다.
4_ 비스듬히 누워서 옆을 바라보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돌 제단으로 그 가운데, 그러니까 사람의 배에 해당하는 부분에 제물 등을 놓을 수 있는 돌 접시가 새겨져 있다. 멕시코 북부문화(Norte de M럛ico)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5_ 거인의 모습을 한 돌기둥으로 보통 가슴에는 나비모양의 장식을 하고 있고 손에는 상징적인 무기로 보이는 것을 들고 있다.)
8. 유까딴 동부해안(Costa Oriental de Yucatan)양식
반죽한 석회로 여러 가지 형태를 만들어서 이것을 건축물의 내·외 벽면 장식에 이용하였다. 깃털 달린 뱀의 문양, 사람과 동물의 문양, 금성의 신이라고 해석되어지는 거꾸로 떨어지는 신의 모습 등이 이 양식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꼽힌다.
이러한 양식들은 우리가 마야의 조각을 좀더 명확하게 이해하고자하는 편의에서 후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앞에서 관찰해본 바와 같이 마야의 각 사회는 자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점은 단지 정치, 사회적인 성격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예술적인 독특함에서도 잘 나타난다. 다시 말해 비록 이렇게 우리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각 양식을 구분하여 설명하였지만, 하나의 양식 속에 있는 도시들도 각자의 개성적인 특징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때로는 조각양식 구분 설정자체가 그 의미를 잃는 경우도 있다는 점을 밝혀둔다.
벽화
멕시코 라깐돈(Lacand뾫)밀림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보남빡(Bonampak)이라는 유적지에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빨간색과 파란색 등 강렬한 원색들이 주를 이룬 이 벽화는 그 아름다움으로 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벽화는 피라미드 속에 있는 세 개의 방 전체 벽면을 꽉 채우고 있다. 전체를 펼치면 그 길이가 총 112미터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크다. 첫 번째 방에서는 의식이 진행되고 있다. 춤을 추는 장면도 있고 중요한 사제들의 모습도 보인다. 두 번째 방에는 전쟁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많은 인물들이 화려한 의상을 입고 전쟁을 하고 있으며 여기저기 전쟁포로의 모습도 보인다. 세 번째 방의 벽화에는 축제의 모습이 보인다. 종교적인 의례(儀禮)로 보이는 이 행사에는 악사들이 나팔을 불거나 북을 치는 등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도 보인다. 일반적으로 이 축제를 전쟁 이후에 가지는 승리의 축제라고 말한다. 높은 예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 이외에도 그 당시의 축제와 생활상들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서 이 벽화가 가지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
대부분의 종교적인 성격을 띤 건축물에는 크건 작건 간에 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었고, 또 채색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열대 밀림의 높은 습도와 오랜 풍상이 마야 사람들이 그려놓은 그림들을 대부분 마모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남빡의 벽화 이외에도 - 이보다는 규모가 작긴 하지만 - 우악샥뚠(Uaxact쐍), 빨렝께(Palenque), 착물뚠(Chacmult쐍), 물칙(Mulchic), 치첸이차(Chich럑 Itz? 등과 같은 곳에서 마야의 벽화를 만날 수 있으며 이것들을 통해 그 당시의 제작기법과 소재 등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크고 작은 돌을 엇갈려 쌓은 벽에 두꺼운 회반죽을 발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바탕을 만든 다음, 그 위에 각종 광물이나 식물성 원료로 만든 물감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렸다. 그 내용은 대부분 축제, 전투, 포로, 인신공양, 피공양, 신, 지도자, 악사, 무용수, 마야문자 등의 종교와 정치에 관련된 것들이다. 시기적으로 볼 때는 기원후 5세기에서 15세기까지 제작된 것들이 많다. 최근 들어 이러한 벽화 작품들의 내용에 작가 자신의 서명이 들어갔다고 하는 주장도 거론되고 있다.
공예
1. 금속공예
마야의 금속공예는 다른 도자기나 목공예, 혹은 석공예에 비하여 그 발달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미 앞에서 마야문명의 발달 과정을 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로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였던 것처럼 마야 사람들은 금속을 이용하기는 하였지만 다른 동서양의 문화에 비하면 그 관심이 적어 생활에 크게 이용하지는 않았다. 고전기 시대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후고전기 시대에도 멕시코 오아하까지방이나 중미 등지의 금속 공예품의 영향을 조금 받았을 뿐 일반적으로 금속에 대한 관심이 적어 일상생활에서뿐 아니라 종교적인 공예품의 수준에서도 그 발달이 미약하였다.
고전기 때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마야의 금속공예품이 꼬빤(Cop뇆)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이 현재까지 발견된 유일한 것인데 금과 동의 합금으로 만들어진 속이 빈 작은 인형의 다리 부분으로, 기술적인 면으로 볼 때 꼬빤유적지에서 직접 제작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코스타리카(Costa Rica)나 파나마(Panam?지역에서 이쪽 지방으로 수입된 것으로 보인다. 즉 현재까지는 고전기 마야지역에서 금속공예품을 만들었다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후고전기에도 상황은 그렇게 크게 변하지 않는다. 마야지역과 인근하고 있는 오아하까문화(Cultura de Oaxaca)는 금속공예에 대한 관심이 다른 지역에 비해 남달리 높아 많은 금이나 동 등의 합금으로 만들어진 공예품들을 생산하였다. 그러나 마야지역은 금세공에 대한 관심이 후고전기때에도 별로 높지 않았다. 마야 후고전기에 발달하였던 유적지 중에서 치첸이차(Chich럑 Itz?의 쎄노떼에서는 많은 양의 금속 공예품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후고전기 마야지역에서 예외적으로 많은 양이 출토된 유일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발견된 금속 그릇, 반지, 귀걸이, 방울 등도 중미나 남미지역, 또는 오아하까 지역에서 원거리 교역을 통해 수입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볼 때 마야는 금속공예의 발달이 미약하였고 다만 중요한 종교적인 의식에 사용할 금속공예품들을 주변지역에서 장거리 물물교환을 통해 소량 이용하였다고 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2. 보석공예
금속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도 단순히 돌도구를 사용하여 경옥 등의 단단한 보석류의 섬세한 가공을 훌륭하게 하였다. 또한 머리장식(Diadema), 귀걸이, 코걸이, 목걸이, 팔지, 반지 등을 제작하였다. 음각, 양각, 모자이크, 입체 형태 등의 기법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형태면에서는 작은 인형과 두상도 제작되었다. 경옥으로 만들어진 반신반인(半神半人), 반수반인(半獸半人), 반목반인(半木半人) 등이 많이 보인다. 이러한 보석 가공품들은 까미날후유(Kaminaljuy?, 네(Nebaj), 우악샥뚠(Uaxact쐍), 띠깔(Tikal), 꼬빤(Cop뇆), 빨렝께(Palenque), 하이나(Jaina), 치첸이차(Chich럑 Itz?유적지에서 특히 다량 발견되었다.
3. 깃털공예
각양각색의 깃털로 만들어진 고급 장식들을 조각이나 벽화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퀘잘(Quetzal)의 깃털이 제일 귀하게 여겨져서 이것으로 머리 또는 등허리장식(Tocado, Penacho), 망또, 방패장식, 햇빛가리개(Sombrillas), 하늘덮개(Doseles), 창(矛)장식(Adornos de Lanza), 신성한지팡이(Cetros), 부채(Abanicos) 등을 제작하였다.
문학
마야문자로 쓰인 것들은 역사적 사건이나 과학기술 등을 소재로 하기 때문에 순수한 문학작품이라고 하기는 쉽지 않다. 고대 마야의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들은 대부분 구전을 통해서 내려오던 것을 식민지시대 이후 라틴문자를 빌어 적은 것들이다. 그 대표적인 것들로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 있는 - 마야의 설화라고 할 수 있는 - 뽀뽈부(Popol Vuh), 또또니까빤사료(El T뭪ulo de Totonicap뇆), 칠람발람(Chilam Balam) 등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역사적 사건, 종교적 사건, 설화, 예언, 철학 등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인간과 자연, 그리고 신들이 자유스럽게 가상과 현실의 공간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펼친다. 이러한 환상적인 요소는 현대 라틴아메리카 문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어 마술적 사실주의 문학이라 불리는 흐름의 배경을 이루기도 한다.
음악
고대 마야인들의 음악에 대하여는 자료의 부족으로 오늘날 알려진 것들이 거의 없다. 그러나 벽화나 그림 등을 통하여 그 당시 음악과 악기의 발전에 대하여 일부 추측을 할 수 있다. 도기로 만든 북, 다양한 모양의 탬버린, 금속방울, 거북이의 등껍질을 노루의 뿔로 두드리는 악기, 긁는 소리를 내는 뼈로 만든 악기, 나무로 만든 트럼펫, 바다고동, 도기로 된 피리, 갈대, 뼈, 호각, 도기로 된 오까리나(Ocarina) 등 다양한 종류의 악기들이 종교적인 행사를 할 때 쓰였다. 특히 보남빡(Bonampak)의 벽화 등에서 보면 나팔수들이 줄을 맞추어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정형화된 격식과 체계를 갖춘 연주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악기연주 이외에도 음악에 맞추어 역사적인 사건, 전설, 신에게 바치는 노래 등을 부르기도 하였다. 기록에 보면 아 홀뽑(Ah Holpop)이라고 불리는 가수이자 음악선생님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음악공연과 악기관리 등을 관장하였다.
연극
종교적인 의미와 대중적인 성격을 공유한 많은 연극들이 공연되었다. 오늘날 옛날의 것과 비교하여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전해 내려오는 라비날 아치(Rabinal Achi)라는 연극공연이 있다. 이 연극은 과테말라 고원지방인 라비날 지역에서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던 것으로 벼슬아치, 미남, 마술사, 광대 등이 출연하여 익살과 대담으로 전체를 엮어간다. 출연자들은 가면을 사용하며, 무대장식이 화려하다는 점도 돋보인다. 여성 출연자가 없다는 점 또한 독특하다. 끼체족(Quich?의 설화를 연극으로 보여주는 이 작품은 역사적인 내용을 소재로 하여 뮤지컬과 같은 형식을 취하는데 마을의 광장에서 축제와 같은 시기에 일반 대중을 상대로 행해졌던 연극이다. 정복 이전 각 도시의 행사 때 광장에서 이러한 연극들이 공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원주민들의 정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하여 라비날 아치 공연을 전승하는데 어려움이 생겨 공연도 중단될 위기에 놓여있다.
무용
앞에서 본 다른 분야처럼 무용 또한 종교적인 행사와 긴밀한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마을의 축제때 음악이나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었는데 그 종류도 다양하여 노인들의 춤인 전사의 춤(16세기 란다 신부는 이 춤을 가리켜 악마의 춤이라고 하였다), 긴 나무다리 위에서 추는 춤, 새 춤, 족제비 춤, 아르마딜요(Armadillo) 춤, 지네 춤, 남녀가 함께 추는 나우알(Nahual) 춤(불경한 춤이라는 별칭이 있다) 등이 있었다.
제 24 장
건축
마야 사람들은 어떤 동서양의 문명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완성도 높은 대단위의 건축물들을 많이 제작하였다. 대다수가 세월의 풍상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지금은 극히 일부만을 볼 수 있지만 아직까지도 몇몇 도시들은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열대 정글의 오지 속에 우뚝 솟아 있는 마야의 신전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종교적인 성격을 띤 이러한 건축물들 중에서도 신전을 가리켜 피라미드라고 말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피라미드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면 제일 먼저 왕의 무덤이었던 이집트 피라미드를 연상하게 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이곳 아메리카 고대문명의 피라미드 모두 돌로 만들어진, 제정일치 사회가 만든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근본적인 차이는 그 역할에서 찾을 수 있다. 이집트의 것은 왕의 무덤으로써 주 기능이 무덤이었던 반면, 고대 아메리카대륙의 피라미드는 신전으로써의 기능에 충실한 건축물이었다. 물론 이중에도 무덤으로 사용된 것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종교행사를 거행하는 신전이었다. 따라서 아메리카 피라미드에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인간이 올라갈 계단이 있으며 각종 건물의 기능에 따라 향로를 놓는 곳, 비석이 위치하는 곳 등 여러 가지 기능에 필요한 장소들이 따로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들 피라미드를 형태적으로 구분할 때 다음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기단(Base)
피라미드의 기초가 되는 부분으로 신전을 모시기 위해 조성된 부분을 일컫는다. 따라서 이곳에는 신전까지 이르는 계단이 있으며 여러 개의 층구조로 이루어진 것과 그렇지 않고 한 덩어리로 된 단순한 형태 등 다양한 모양이 있다. 높은 것은 이 기단부만 수십 미터에 이르는 것도 있다.
신전(Templo)
기단부분이 끝나는 위에 만들어진 구조물을 통칭하여 일컫는다. 전체 피라미드의 핵심 부분으로 인간의 주 활동 공간이 되며 일반적으로 신전의 실내외 공간이 제사의식의 중심이 된다. 여기에 장식이나 조각 등이 집중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보통 주거하는 집의 형태를 가진다.
끄레스떼리아(Crester뭓)
신전의 상단부에 위치한 장식부분으로서 이러한 장식을 통해 웅장함과 화려함을 더욱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초기의 피라미드들은 이것이 없는 것들도 많다. 후기로 들어서면서 많은 지역에서 끄레스떼리아가 더욱 발달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그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신전부분의 기둥과 벽의 두께가 넓어지는 것도 볼 수 있다.
위에 이야기한 피라미드를 종교적인 활동을 하는 신전이라고 한다면 이외에도 다른 용도의 건축물들이 다양하게 만들어졌고 그러한 건축물들은 용도에 따라 각각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도시의 중심부에는 종교적, 행정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건축물들이 모여 있는데 이러한 건축물들의 경우는 전체가 다 돌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며 거주용 집과는 달리 독특한 건축방법과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꼭 다 그런 것만은 아니어서 벽은 돌로 만들고 지붕만을 짚으로 엮은 피라미드들도 일반적이었다. 주거용 공간은 우리나라의 초가집과 같이 주변의 나무를 이용하여 벽을 만들고 짚으로 지붕을 엮는데 마야지역에서는 아직도 이러한 집들이 주거용으로 넓게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 형태나 구조는 고대 마야의 전형적인 주거용 집들과 거의 차이가 없다.
한편 마야의 주요한 건축물들은 덧씌우기라는 독특한 건축적 특징을 보여준다. 덧씌우기 기법이란 기존의 건물을 부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위에 다른 건물을 계속적으로 덧대어 짓는 방법이다. 이러한 기법은 특히 멕시코 고원지역에 많이 나타나는데 많을 때는 10여 차례 이상 덧씌우기가 된 경우도 있다. 그 이유에 대하여는 학설이 분분하여 달력설, 유행설, 마모설, 노동력 동원설 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
●달력설: 메소아메리카 지역의 발달한 달력이 가지는 종교적인 의미에 따라 짧은달력의 52년과 같은 일정한 주기, 혹은 달력이 지정하는 의미있는 때에 신전을 덧씌우기 하였다는 설이다. 그러나 항상 일정한 주기를 가지지 않거나 달력의 일정한 날과 일치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유행설: 옷처럼 건축에도 유행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유행에 따라 기존의 건물에 덧씌우기를 하였다는 주장 또한 가능하다. 그러나 모든 건물들이 다 다른 형태의 건물을 덧씌우기 한 것이 아니라 동일한 모양을 가진 건물을 덧씌우기한 경우도 많이 발견된다. 따라서 이 학설도 모든 부분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모설: 기존의 건물이 오래되어 무너지거나 헐어서 새로이 증축하는 형식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발굴작업을 통해 발견된 덧씌우기 기법이 사용된 건축물들의 하부구조상태가 아주 좋은 것들이 많아 이 역시 충분한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노동력동원설: 이 설은 정치적인 엘리트들이 높은 농업생산력 등을 통해 도시인구의 집중 등이 이루어지면서 일반백성들에게 그들의 권위를 인정받고 유휴노동력이 기존의 정치적인 기득권에게 대항할 것을 막기 위하여 마치 종교적인 필요가 있는 것처럼 상황을 만들어 일반백성들의 노동력이 필요한 사업들을 계속 시행하기 위해 멀쩡한 건물에 덧씌우기 하였다는 주장이다. 다소 고대 아메리카인들의 정치, 경제에 관한 기본적인 선입견으로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이는 딱히 그 모순을 찾기 힘들지만 발상 자체가 무리한 정치적인 모델에 바탕을 둔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마야건축의 기본적인 성격, 각 건축구조의 기능 그리고 덧씌우기와 같은 독특한 특색의 이해를 바탕으로, 각 부분의 특징들을 구성요소별로 살펴보자.
벽, 바닥, 천장
돌로 만들어진 건물 중 중요한 행사에 관계된 것들로 단층짜리 건물도 있지만 복합적인 여러 층의 것들도 많다. 따라서 천장이나 벽은 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견고하게 만들어져있다. 큰 돌사이를 작은 돌로 메우고 그 사이의 공간을 흙으로 채워서 벽이나 바닥을 만들고 이렇게 형태를 갖춘 면을 회반죽으로 입힌다. 그리고 그 위에 식물성이나 광물성의 염료를 혼합한 물감을 이용하여 각종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두꺼운 벽이 내외의 온도 차단 효과를 가져온다는 특징도 있다.
문과 창문
마야의 건물들은 일반적으로 문이 없고, 창문도 드물게 있는데 그나마 있는 창문도 매우 작다. 특히 일부 건물은 미로(迷路)형태를 띠고 있을 정도로 내부가 폐쇄적이다. 보통 건물 입구의 양쪽에 고리를 만들어서 그곳에 커튼과 같은 천을 달았다. 창문의 경우는 우리가 생각하는 일조, 통풍이나 외부를 관찰하는 등의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라 형태가 가지는 종교적인 의미를 중요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빨렝께유적지에는 T 자형의 창문들이 건물의 여러 면에 사용되었는데 이는 “바람”이라는 뜻을 가진 달력의 “(Ik)” 날에 사용되는 기호라고 해석되고 있다. 이 경우 크기나 건물과의 비례로 볼 때 - 길이가 30cm 안팎이다 - 비록 바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통풍의 효과는 최소한이고 상징적으로 외부의 공기와 통한다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종교적인 기능을 가진 장식으로 생각된다.
마야 아치
보통 아치라고 말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아왔던 서양의 아치형태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아치의 모양을 만들기 위한 독립적인 벽돌이나 재료들이 반원형을 만드는 것을 일반적으로 서양 건축에서는 아치라고 부른다. 그런데 마야의 아치는 구조적으로 다르게 만들어졌다. 그림에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이나 창 옆면의 돌들을 조금씩 안으로 쌓아서 천정부분에서 양쪽이 만나도록 만든다. 그러다 보니 서양의 아치와는 그 건축 과정이 다르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서양 사람들은 거짓 아치(Arco Falso)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를 가리켜 거짓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지극히 유럽중심적인 사고방식이라는 점이 지적되면서 마야 아치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 아직까지도 마야의 건축을 다루고 있는 몇몇 책에는 거짓 아치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마야 아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화장실
인간이 화장실을 건물의 중요한 부분으로 만들어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유럽에서는 19세기 중반까지도 화장실이 일반화되지 않아 거리에서 변을 보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마야 사람들도 건물내부에 화장실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이제까지의 어떤 마야의 고대 도시에서도 화장실이 발견된 적은 없다. 특별히 요강과 같은 것을 사용하였다는 확정적인 보고도 아직까지는 없다. 결국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야외의 자연 화장실이다. 그러나 이점에 있어서도 상당히 풀기 힘든 점을 가지고 있다. 마야의 많은 도시들이 몇 만에서 많게는 십만이 넘는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수만에 가까운 밀집된 인구가 다 자연 화장실을 사용하였다는 말인가? 그에 대한 위생의 문제는 어떻게 하였을까? 일부지역에서는 동물이나 인간의 분뇨를 거름으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마야지역에서 분뇨에 대한 처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애석하게도 이제까지 이에 대한 연구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없다. 앞으로 화장실에 관한 연구는 마야도시의 구조와 체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지만 현재로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방면에 대한 지식은 단순한 추정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신성한공놀이장(Cancha de Juego de Pelota)
공놀이장에 대하여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공놀이가 아닌 마야의 독특한 공놀이에 대하여 알아보자.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공놀이는 하나의 오락으로 혹은 현대적인 의미의 스포츠로 여기기 쉬운데, 마야의 공놀이는 그것보다는 종교적인 성격이 강한 일종의 제례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과 의미를 보여주는 내용이 이들의 기원신화인 뽀뽈부(Popol Vuh)에도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모여 2명씩 편을 먹고 공놀이를 하였다(Popol Vuh, 122쪽).” 란다 역시 간단하지만 마야 사람들이 하던 공놀이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각 마을마다 회반죽이 입혀진 큰 집을 사용하는데 사방이 트여져 있고 그 곳에서 젊은이들이 모여 여가를 즐긴다. 공놀이도 즐기고 주사위 같은 것을 이용한 놀이 등도 있다(Landa).” 어떠한 공놀이가 마야 사람들에 의하여 행해졌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오늘날 남아있는 공놀이장의 형태와 부속물들이 각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동일한 형태의 공놀이가 마야를 비롯한 전체 메소아메리카 지역에서 행해진 것 같지는 않다. 그 중에서도 어떤 공놀이장은 고리가 있고 어떤 공놀이장은 고리가 없는 것이 있다. 이는 당시 공놀이의 방법이 달랐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행해졌던 당시의 마야 공놀이를 상상할 수 있는 자료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본 것과 같이 일부 사료에 언급되어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아직까지도 비록 그 형태는 많이 바뀌었겠지만 고대의 공놀이와 유사한 경기를 행하는 곳이 남아 있다.
멕시코의 북서부 태평양과 면해 있는 마사뜰란(Mazatl뇆)의 야니또(Yanito)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는 최근까지 이러한 공놀이 경기를 행하고 있다. 공은 속이 꽉찬 통고무로 만들어져 무거운 것은 4~5kg에 이른다. 경기장은 딱스떼(Taxte)라고 불리는데 7~8명이 한 편이 되어 서로 진영을 달리하며 경기장의 양편에 갈라서서 경기를 진행한다. 공을 서로 주고받으며 상당히 복잡한 규칙을 가지고 점수를 매기는데 오로지 공은 엉덩이 옆면으로만 칠 수 있다. 십여 미터 이상 되는 거리와 높이로 날아오는 무거운 공을 엉덩이 옆면으로 치는 경기 방식이 독특한데 최근에 이르러서는 거의 사라져가고 있는 추세이다.
고대 마야의 도시에서는 신성한공놀이장이라는 건축물들을 거의 예외 없이 만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도시의 가장 중심부는 중앙광장으로 되어있고, 그 한편에 각종 피라미드가 있으며 그 사이에 이 신성한공놀이장이 위치해 있다. 따라서 이 공놀이장이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놀이의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라 종교나 행정 등의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통 공놀이장을 구분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의 하나가 형태에 의한 분류이다. 공놀이장이 열려 있느냐, 혹은 닫혀 있느냐를 기준으로 삼는다. 공놀이장이 열려 있어서 어떠한 턱이나 담의 방해 없이, 혹은 계단의 도움 없이 들어갈 수 있다면 이를 열린 경기장(Cancha Abierta)이라고 말하며, 그렇지 않다면 닫힌 경기장(Cancha Cerrada)이라고 말한다. 이외에도 그 형태에 따라 일(一)자형과 공(工)자형이 있다. 즉 일자형은 전체가 한 일(一)자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하고 공(工)자형은 양쪽 끝에 튀어나온 공간이 있는 것을 말한다. 공(工)자형에 닫힌 공놀이장의 대표적인 것으로서 치첸이차(Chich럑 Itz?의 공놀이장을 들 수 있으며 일자형에 열린 것은 최근에 복원된 꼬바(Cob?의 것을 꼽을 수 있다.
일반적인 신성한공놀이장의 형태는 길게 된 평행의 두 플랫폼이 중심을 이룬다. 장소에 따라 공놀이 고리, 벽면조각, 경기판, 외부벽 등이 있거나 없으며 그 형태도 많은 차이가 있다.
빨라시오(Palacio)
피라미드와 피라미드로 이루어진 다양한 형태와 용도의 공간들을 가리켜 빨라시오라고 부른다. 굳이 한국말로 해석을 하자면 “저택” 혹은 “궁궐”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편의상 붙인 말이지 실제로 이곳이 최고지도자나 그 신하들이 기거하였던 궁궐이라고는 할 수 없다. 사실 이러한 용어를 한국말로 바꾸는데 애매한 점이 많다. 그래서 원어에 충실하게 빨라시오라는 용어를 쓰기로 하겠다. 여기서 말하는 빨라시오는 한 개, 혹은 여러 개의 방을 가지고 있는 단일건물 또는 여러 개의 건물로 이루어진다. 이곳의 공간들은 제사장의 주거지, 행정관서, 각종 작업장, 창고 등으로 쓰였다. 각종 피라미드가 종교적인 제사를 주관하였던 장소였고, 그 주변의 건물들에서는 이러한 의례를 준비 거행하기 위한 제반 업무를 수행하였다고 한다면 이 빨라시오라고 하는 곳이 후자의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을 쉽게 추정해 볼 수 있다. 제정일치의 사회정치 형태로 미루어 보아 국가의 행정적인 업무들이 이러한 곳에서 같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도 별 무리가 없겠다.
마야 피라미드의 각 건물들에 어떤 사람들이 살았으며 그 사람들은 그곳에서 어떠한 생활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사료가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기 위해서는 고고학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구체적인 근거를 마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각 방의 바닥이나 벽 등을 조사하여 그곳에서 집중적으로 불을 지폈던 흔적이 있다면 - 이런 경우 불을 피웠을 당시의 재의 흔적이 바닥 지표에서 일정한 두께로 발견된다 - 음식을 만들었던 장소였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해 볼 수 있다. 또한 지층에서 곡식의 화분(花粉)이 많이 발견된다면 이 곳이 식량을 보관하는 장소였었다는 것을 예상해 볼 수 있다. 흑요석과 같은 광물의 부스러기들이 중앙신전지역의 건물에서 많이 발견된다면 이곳에서는 제사용으로 사용되었던 흑요석 공예품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구체적인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곳들도 많은데 이럴 때는 주변의 환경과 다른 시대의 비슷한 문화를 가진 지역, 혹은 동시대 주변지역의 사료 등 동원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자료를 이용하여 그 건물의 용도나 기능 등을 유추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에는 많은 한계가 존재한다. 불을 피웠던 흔적이 많아서 주방으로 생각하였던 곳이 실질적으로는 특정한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계속해서 불을 피웠던 곳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을 구분하기 위해 다른 증거들을 찾아보는 것이 당연한 순서겠지만 그러한 과정이 모든 것을 완전히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고고학적인 연구는 많은 경우 사료와 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더욱 높은 과학적인 결과를 만들어갈 수 있다. 결국 이 말은 단순히 고고학적인 몇 가지의 단서를 가지고 단정 짓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예상은 가능하나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는 충분한 정보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구상의 다른 문명과 비교했을 때 마야의 사료는 그 수나 양적인 면에서 우리에게 극히 제한적인 정보만을 주고 있다. 특히 그나마도 유럽 사람들이 아메리카대륙을 정복하던 시기와 그 이후의 자료들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그 이전 시대, 그러니까 후고전기 초기나 고전기, 혹은 전고전기를 이야기하고 있는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결국 이 시대 마야 도시들에 있었던 각 건물들의 기능을 단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말도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가능하다.
천문대
천문학과 달력에 대하여 설명한 장에서 본 바와 같이 마야 사람들은 천문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꾸준한 관심으로 얻게 된 지식의 수준 또한 가히 당대 최고에 달하였다. 원형과 사각형의 건물이 천문대로 만들어지기도 하였고, 일반 신전건물들이 천문관측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건물의 모서리와 모서리를 연결하는 선이 중요한 지표로서 표기되었던 것을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치첸이차의 달팽이 신전(El Caracol)을 들 수 있겠다. 지금은 반 가까이 무너져 내려서 정확한 창문의 위치를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남아있는 부분들을 측정해 본 결과, 각 창문의 모서리를 연결한 선이 춘분, 추분 등의 중요한 천문학적인 지표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건물에 비하여 키가 큰 이러한 건물들은 넓은 개활지에 만들어져서 천체를 관측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빨렝께유적지에 있는 천문대 역시 이러한 천체관측의 기능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북쪽과 서쪽은 넓은 개활지로 되어있으나 동쪽과 남쪽은 높은 산이 가로막고 있어 하늘전체를 관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곳이 천체관측을 하던 장소였다고 확정적으로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남쪽과 서쪽의 개활지를 관찰하기 위한 망루와 같은 역할을 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고 보면 이와 유사한 형태와 구조를 가지는 천문대라고 생각되어지는 다른 것들이 진짜 천체관측을 위해 만들어진 천문대였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무덤
일반적으로 마야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살던 집에 구덩이를 파고 그곳에 매장을 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사후의 세계에 대하여 믿고 있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이 평소에 사용하던 물건이나 저승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을 같이 묻는 관습은 우리와 비슷한 면이 있다. 저승에 가는 길을 인도해 준다고 믿는 개(犬)와 다른 동물들을 같이 묻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 사람이 생전에 어떤 생활을 하였으며 어떤 사회적인 활동을 하였는지도 무덤에 따라 짐작해 볼 수 있다. 한편 도시 중심지의 피라미드에서도 무덤이 발견된다. 앞에서 마야의 피라미드와 이집트 피라미드의 다른 점에 대하여 말을 하면서 기본적으로 마야의 피라미드는 용도가 신전이었다는 말을 하였다. 대부분이 신전이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그것들이 무덤으로 사용되었던 것도 볼 수 있다. 물론 흔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일부 건축물들은 중요한 인물들의 무덤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알베르또 루스(Alberto Ruz)가 발견한 빨렝께(Palenque)의 무덤을 들 수 있겠다. 1952년 이곳 발굴작업의 총 책임을 맡고 있던 알베르또 루스가 피라미드 신전부분의 바닥에 놓여있는 돌에 두 개의 구멍이 나 있는 것을 궁금하게 여겨 그것을 들어 봄으로써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과 그 아랫부분에 있는 무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당시의 고고학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며 공개된 이 빠깔(Pakal)이라고 하는 최고지도자의 석관묘에서는 여러 가지 보석과 함께 그의 뼈가 발견되었다. 지금 현재 이곳의 유물들은 멕시코 국립인류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증기목욕탕
증기목욕탕이 도시의 중심에 있었다고 하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일부 특권층 사람들의 호화로운 생활을 위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기 쉽다. 그러나 꼭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다. 이 증기목욕탕은 기본적으로 종교적인 성격을 띤 것이라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다. 상류층의 사람들이 일반 평민과 차별되는 호화로운 생활을 위해 만들어 사용한 것은 아니다. 또한 마야지역의 기후적인 특성에서 알 수 있듯이 고원지역은 우리나라의 늦가을 날씨와 비슷하여 증기목욕탕이 생활에 유용한 장소로 사용될 수 있으나 저지대는 온도가 항상 높은 열대우림지역이므로 목욕을 할 때 온수를 사용해야할 필요가 별로 없다. 즉 증기목욕탕이 생활의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그러한 다른 차원의 필요가 바로 종교적인 것이다.
마야 사람들은 제례의식을 거행하기 이전에 항상 여러 가지 자기정화의 절차를 거쳤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가장 일반화된 것이 손끝과 같은 자신의 신체 일부에 상처를 내서 피를 바치는 피공양(Autosacrificio)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증기목욕탕에 들어가서 몸을 씻는 것도 그 중의 중요한 하나로 꼽을 수 있겠다.
여러 가지 형태의 증기목욕탕이 있었는데 대부분 좁은 공간에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문이 만들어져 있다. 물론 목욕을 할 때는 열을 차단하기 위해서 천이나 나무 등으로 막아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밖에서 건물의 벽면에 장작을 지펴서 달구고 안쪽에서는 그 달구어진 벽면에 물을 흩뿌려 줌으로써 벽면의 열을 통해 물이 증기로 변하게 된다. 이러한 원리로 증기목욕을 함으로써 의식을 올리는데 필요한 정화효과를 얻게 된다고 믿었다. 과테말라의 삐에드라스 네그라스(Piedras Negras), 유까딴반도의 치첸이차(Chich럑 Itz? 등 대부분의 마야도시에 이러한 증기목욕탕 시설이 있었다. 증기목욕탕 시설과 개념 등은 마야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전체 메소아메리카 지역에 넓게 행해지던 관습이었다. 메시까 사람들 역시 증기목욕탕에 대한 관심이 많아 멕시코 고원지역의 많은 유적지들에서도 공히 이러한 형태의 건축물들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도로
마야문명은 전체 메소아메리카문화와 유사한 문화적인 면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적인 유사성, 혹은 동질성은 서로 다른 지역에 위치해 있는 도시들 간의 빈번하고 지속적인 교류에 의하여 가능하였다. 단순히 물물교환을 목적으로 한 경제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교류가 왕성하였다. 이것은 마야지역을 비롯한 전체 메소아메리카 지역과 나아가 그 이외의 지역과도 원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는 점이 계속적으로 확인되면서 더욱 확고해진다. 강이나 협곡과 같은 지형이 많아 길을 만들기 위해서는 특수한 구조물이 필요하였던 안데스문명과는 달리 마야지역의 길은 상대적으로 자연적인 계곡과 평지를 이용하여 용이하게 만들 수 있었다. 시대적으로는 전시대에 걸쳐 마야의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길이 잘 정비되어 빈번한 교류가 있었다. 특히 산지(山地)가 없는 유까딴반도 지역에서는 하얀길이라는 뜻을 가진 삭베(Sacbe)라고 불리는 포장도로가 발달하였다(유까딴 지역의 삭베지도는 107쪽 참조). 삭베의 전통은 이미 전고전기부터 있었으나 절정을 이룬 시기는 고전기 초반부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삭베를 크게 나누어 도시내부에 건설된 내부도로와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외부도로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중에서도 내부도로는 전고전기부터 상당한 발전을 보이는 반면, 외부도로는 고전기때 많이 만들어졌다. 어떤 것들은 수십,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도시들 간을 연결하는 현대적인 의미와 기능을 가진 대단위 도로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중에서도 꼬바(Cob?와 약슈나(Yaxun?사이의 삭베는 100km에 달한다. 건축방법은 집의 기초를 만드는 것과 동일하여 지형에 따라 크고 작은 돌들로 기반을 만들고(기반이 높은 것은 1미터가 넘는 것도 있다) 그 위에 회반죽으로 포장을 하였는데 석회로 만들어진 바닥면이 흰색이어서 이 길을 하얀길이라는 뜻의 삭베로 부르게 되었다. 이는 오늘날의 포장도로와 같은 것인데 도로표면에 아스팔트나 시멘트 대신 회반죽이 입혀져 있다는 점이 외형적으로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삭베는 단순히 편리한 교통을 위한 기능적인 면도 중요하겠지만 종교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은 현대적인 개념의 도로와는 다른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정확히 이 도로가 순수한 종교적인 목적 때문에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교통을 위한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다.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길이 단순히 순수한 종교적 이유에서 만들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이 도로가 종교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쪽에 더욱 많은 비중을 두어 설명하고 있다. 그 이유로 도로 중간에 건설된 개선문들이 종교적인 건축물이며, 도로의 시작점과 끝나는 지점이 종교행사를 주관하는 신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필자는 종교적인 행사자체의 성격이 좀더 실제 생활과 밀접한 것이며 종교와 생활을 좀 더 친근한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종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 도로를 결코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고 엄격히 제한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견해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마야종교의 성격과 그러한 성격에 따른 운용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겠다.
어린아이들에게 있어서 추석과 같은 명절은 - 지금은 먹는 것이 워낙 풍부한 시대다 보니 그런 모습이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 그야말로 맛있는 것을 실컷 먹을 수 있는 날이요, 친척들이 다 모여 놀 수 있는 마음 부푼 놀이의 장이다.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고향을 찾아가 부모 친지를 만나는 뜻 깊은 날일뿐 아니라 노부모 입장에서는 자식, 손자를 모두 볼 수 있는 설레이는 날이 아닐 수 없다. 어디 그뿐이랴 상인들은 이때를 가리켜 대목이라고들 한다. 명절마케팅이라는 말이 뭐 별거겠는가. 명절에 발생하는 엄청난 수요와 재화의 이동에서 이익을 올리자는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당연한 발상이다. 그런데 마야 삭베의 종교성에 대하여 말을 하면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야 사람들이 치렀던 종교행사가 우리의 추석처럼 이러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보기 위해서이다. 즉 종교적인 행사가 사회적인 기능과 경제적인 기능 등을 다 담당한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과 마야가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전혀 다른 부분이 존재할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모든게 세상사는 이야기고 보면 완전히 다를 수도 없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보편성과 개별성이라고 좀 유식한 척하는 말로 설명하기도 한다. 추석이라고 하는 것과 이때 행해지는 제사라고 하는 것을 외형적으로는 완전히 한국전통의 종교적 행사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장황하게 설명한 것처럼 경제적인 기능, 사회적인 기능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예 더 극단적인 경우도 많다. 무슨무슨 선물을 준다는 무슨무슨 데이니 뭐 그런 것들의 시초에는 유명한 가톨릭 성자의 이름이 나오지만 사실상 아무리 요리조리 바로보고 뒤집어보아도 초콜릿회사, 혹은 사탕회사의 판촉작전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즉 종교적이냐 사회적이냐 혹은 경제적이냐의 관계는 명확히 그 경계가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의 주 관심사인 삭베의 문제로 돌아가 보면 삭베가 기본적으로 종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동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 다른 장에서 보아왔던 것처럼 마야의 종교행사는 전체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는 중요한 사회, 문화, 경제적인 행사이기도 하다. 제사에 쓸 용구를 멀리 떨어진 외지에서 운반하는데에 이 삭베가 쓰였을 것이다. 그러한 물건들을 가지고 온 상인들의 행렬이 이 삭베를 통해 움직였으리란 것 또한 상상해 볼 수 있다. 신성한 제단을 만들 먼 동네의 돌도 여러 가지 의식을 치르면서 이 삭베를 통해 들여왔을 것이다. 결국 종교적인 용도로 쓰이는 삭베라 할지라도 이렇게 놓고 보면 그 경계가 애매모호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사가 끝나고 제사에 사용하였던 용구들을 마을 사람들이 일상의 생활용구로 사용한다던가 음식을 같이 나누어 먹는다던가 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렇다면 삭베를 통해 운반된 제사용구는 종교적인 기능과 사회, 경제적인 기능을 다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삭베가 기본적으로 종교적인 길이라고 하는 데에는 큰 이의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마야 사람들의 순수한 종교적인 발로와 기원으로 만들어진 일반인이 범접할 수 없는 사원과 같은 순수한 종교적인 건축물이라고 하는 점 또한 실질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모두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시장
상업 자체가 개인적인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필요성에 의하여 지역 생산물의 차이를 교환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시장의 성격에 대한 이해에도 한결 도움이 될 것이다. 즉 시장의 존재 원인과 목적이 영리활동을 중심으로 한다는 우리의 개념과는 다르기 때문에 시장자체의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많은 학자들은 영리를 추구하는 상인계급이 마야뿐만 아니라 전체 메소아메리카 지역에 생겨났었으며 유럽의 정복을 앞둔 시기에는 이러한 영리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상인계급이 서서히 힘을 얻어가면서 상업자본의 형성이 이루어지는 시기라는 주장도 하고 있다.
도시 중앙에 있는 광장이 시장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도시 한가운데보다는 그 이면의 공간이 더욱 많이 활용되었다. 특별한 건축물들이 있는 것은 아니고 지금 현재 마야지역에서 열리고 있는 장의 형태와 같이 약속된 날 지정된 공터에서 사람들이 모여 교환할 물건을 쌓아놓고 거래를 하였다. 우리나라의 장(場)의 형태와 유사한 것이었다. 후고전기에는 현재의 멕시코 따바스꼬주(州)에 위치한 시깔랑꼬(Xicalanco)라는 지역이 멕시코 고원지방과 연결되는 중요한 시장으로 자리하였으며 메소아메리카 전체를 놓고 볼 때는 고전기 떼오띠우아깐(Teotihuacan)의 씨우다델라(Ciudadela)나 후고전기의 뜨랄떼롤꼬(Tlaltelolco)와 같은 멕시코 중앙고원지방의 유명한 시장들의 규모가 가장 컸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개선문
유까딴반도에서는 개선문의 형태를 가진 건축물들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진짜 우리가 생각하는 개선문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 형태가 개선문과 같아서 그렇게 불려진다. 모두가 위에서 설명한 도로인 삭베의 시작이나 끝 지점, 혹은 도로의 중간에 만들어져 있어 이 문을 통하여 걷게 되어 있다. 형태적인 면에서도 기념비적인 인상을 가지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이와 유사한 것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산과 강이 거의 없고 평지가 발달하여 많은 도로가 건설되었던 유까딴반도에만 나타나는 특수한 건축적인 상징물로 여겨진다. 따라서 삭베와 개선문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어 이러한 건축물을 개선문이라고 명명하는 데에 설득력을 더해주고 있다.
수로
인공적인 수로를 건설하여 도시의 홍수를 조절하고 농수를 공급하는 등 다양한 필요를 충당하였다. 특히 빨렝께(Palenque)의 수로는 상당히 큰 규모로 건설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최근에 들어 중앙신전지역의 발굴복원 작업이 진행되면서 더욱 다양한 연구의 성과들이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도시외벽
고전기 후기에 들어서면서 전쟁이 이전의 종교적인 의례의 형태에서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되기도 하면서 도스 삘라스(Dos Pilas), 아구아떼까(Aguateca), 낌 치 힐람(Quim Chi Hilam), 뿐따 치미노(Punta Chimino)와 같은 뻬뗀의 남서부 지역에 군사적인 목적으로 성벽이 건설되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다. 특히 도스 삘라스와 같은 지역에서는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기존 건축물들의 조화를 무시하고 다양한 형태의 성곽과 해자(垓字)가 급조된 경우도 발견된다는 연구가 있다(Dary F. Claudia, 1997).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이러한 전쟁성격의 변화와 성벽의 건설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후고전기시대의 경우에도 방어개념의 성곽을 건설하였던 도시는 얼마 되지 않아 유까딴반도의 마야빤과 뚤룸 등지에서만 나타난다는 것을 이미 앞의 전쟁에 대하여 설명한 장에서 살펴보았다(「제 17장 전쟁」부분 참조).
이렇듯 전 지역에서 폭넓게 성곽건축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전쟁의 개념과 방법 등이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도시외곽 담장의 정확한 용도를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적군에 대항한 군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각 유적지들을 독립적으로 놓고 보았을 때는 그러한 설명이 가능할지 모르나 마야 전체 도시를 놓고 보았을 때에는 이러한 도시외벽들이 얼마 나타나지 않는데 이 점은 외벽의 용도가 전쟁에 대비한 방어용이라는 설명을 약화시킨다. 다시 말해 전쟁이 빈번하여 군사적인 목적에서 성벽을 쌓을 필요가 있었다면 왜 다른 도시들은 그러한 성벽을 만들지 않았겠는가 하는 의문이 남기 때문이다. 결국 이를 성곽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겠다.
출뚠(Chult쐍)
유까딴은 강이 없고 지표에 물이 모이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물을 보관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발달한 것을 볼 수 있다. 출뚠은 이의 일환으로 물을 모아놓을 수 있는 돌로 된 큰 웅덩이이다.
벽돌 건축
마야의 건물들은 대부분이 돌로 만들어졌고 그 위에 회반죽이 입혀진다. 현재까지 발견된 마야의 도시 가운데에 돌이 아닌 벽돌로 만들어진 도시는 멕시코 따바스꼬주(州)에 있는 꼬말깔꼬(Comalcalco)라는 유적지가 대표적이다. 주변에 돌을 구하기 힘들다는 자연적인 약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흙을 가지고 벽돌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도시의 건축물들을 지었다. 자연적인 조건을 적절히 이용한 마야인들의 삶의 지혜를 이러한 벽돌로 만들어진 도시에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제 25 장
건축양식
다른 테마와 마찬가지로 건축양식 역시 뚜렷하게 이 지방, 이 시대에는 이러한 건축양식이 사용되었고 다른 시대, 다른 지역에서는 저러한 건축양식이 사용되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 쉽지 않다. 특히 마야의 강력한 지방분권적인 성격은 건축의 독특한 개성에서도 잘 나타나서 각 지방이 그 정치사회적인 특징만큼이나 다양한 건축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결국 각 도시는 그 도시 나름대로의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이야기하려는 마야의 각 건축양식은 전체적인 이해를 돕고 지역적인 경향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먼저 밝혀 둔다. 그렇다고 하여 전체적, 혹은 지역적으로 공통적 특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들을 나름대로 구분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어왔으며 최근 들어 새롭게 건축양식을 구분해 보려는 시도도 있다. 그러나 각 도시의 다양성을 어떠한 시각으로 집단화시키겠는가 하는 관점에 따라 그 구분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구분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상태에서 내용의 이해를 목적으로 건축 방법이나 기능 등의 내용적인 면보다는 외형적으로 보이는 건축물들의 형태와 외곽장식에 중점을 두어 구분해 보도록 하겠다. 건축양식의 이름을 소제목으로 삼고 이러한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는 마야의 유적지들과 각 건축양식의 특징들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뻬뗀(Pet럑)양식
띠깔(Tikal), 우악샥뚠(Uaxact쐍), 홀물(Holmul), 우올란뚠(Uolant쐍),
나랑호(Naranjo), 약스하(Yaxh?
뻬뗀양식이 나타나는 도시들은 열대 우림의 전형적 밀림지대에 위치해 있어 밀림의 키 큰 나무들의 성장선을 넘도록 높이 지어진 피라미드가 인상적이다. 띠깔의 피라미드에 올라보면 나무로 빽빽하게 뒤덮인 밀림의 구름 위에 올라있는 듯한 장관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키가 큰 피라미드의 구조적인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면 피라미드의 각 모서리를 각지게 하지 않고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지그재그로 만든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이러한 표현이 꼭 이곳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뻬뗀지방의 건축양식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밖에도 경사가 가파른 계단, 끄레스떼리아의 발전, 신전의 두꺼운 벽과 이로 인한 실내공간의 협소함도 특징으로 꼽을 수 있겠다. 경사가 가파른 계단은 이후 리오 벡(R뭥 Bec)이나 체네스(Chenes)양식에서는 인간이 실제로 오르기 힘든,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의 계단으로 발전하게 된다. 끄레스떼리아의 발전은 신전의 두꺼운 벽과 실내공간의 협소함으로 이어진다. 대부분의 신전들은 돌로 지어졌기 때문에 끄레스떼리아의 규모가 커지면 자연스럽게 그 자체의 무게가 증가하게 되고 이를 지탱하기 위하여 그 건물의 벽이 두꺼워질 수 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실내 공간이 협소해진다. 이 점은 설계에서부터 건축물의 기능보다는 미적인 면에서의 상징성이 더욱 중요하게 여겨졌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즉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으로서의 피라미드가 아니라 종교적 의미를 강조한 건축물이라는, 마야종교의 성격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건축의 특징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모따구아(Motagua)양식
꼬빤(Cop뇆), 끼리구아(Quirigu?
이 지역은 과테말라의 끼리구아라는 유적과 온두라스 최대의 유적지인 꼬빤으로 대표된다. 이 두 유적지는 불과 50여 km 밖에 떨어져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지금 현재 각기 나라를 달리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인근 도시국가로써 유사한 건축양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곳은 뻬뗀양식과는 달리 건축물의 높이에 그렇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또한 건물을 장식하는 끄레스떼리아의 발전도 중요한 건축적인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건축물들의 벽 두께가 얇고 실내공간이 넓은 것을 볼 수 있다. 비록 마야건축의 장식을 대표하는 끄레스떼리아가 발달하지는 않았지만 건물 벽면과 비석, 제단(祭壇), 심지어는 계단에까지 정교함의 극치를 이루는 조각을 함으로써 색다른 건축적 화려함을 보여준다. 특히 계단 전체에 도시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야문자를 채워 넣었으며 이는 꼬빤이라는 도시국가가 보여주는 독창적인 건축 방법이다. 이 지역의 건축에서 돌을 다루는 마야 석공과 건축가들의 뛰어난 면모를 잘 볼 수 있다. 여러 번에 걸쳐 덧대어 지어진 중앙신전지역이 발전했다는 점도 이 지역 건축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유럽정복 이전의 마야 사람들에게 있어서 현재의 국경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 당시에도 물리적인 국경의 개념이 없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여기에서 설명하고 있는 꼬빤(온두라스)과 끼리구아(과테말라)같은 두 도시의 관계가 긴밀했었다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만들어 놓은 국경선이 문화적인 것과 상관없이 동일한 문화를 갈라놓을 뿐 아니라 가족까지도 생이별을 하게 하는 현실은 단지 우리나라의 경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과테말라와 멕시코의 국경이 더욱 뚜렷하게 되었지만 워낙 밀림이 빽빽한 곳일 뿐만 아니라 당시의 국가적인 상황으로 인하여 두 나라는 국경을 관리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후 점차 국경의 의미와 이권이 커지면서 전에는 가까운 옆 마을이었던 곳이 이제는 명확하게 소속국가를 달리하게 되었다. 결국 옆 동네에 시집간 누님은 영원히 다른 나라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멕시코의 치아빠스와 과테말라의 국경지방에서 심각하게 대두되었지만 이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적었고 그저 가난한 무지랭이 인디오들의 개인적 문제로 치부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곳 원주민들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칙적으로는 불법인 왕래를 많이 하였다. 애당초 국경의 개념조차도 온전히 가지고 있지 않은 이들의 교류와 왕래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점점 이러한 문제가 그야말로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 등 중미의 가난한 사람들이 멕시코에서 보다 나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혹은 불법으로 미국에 가기 위한 수단으로 멕시코의 국경을 많이 넘고 있으며 마약 밀거래의 사안이 걸려 멕시코 남부 국경이 점점 더 강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그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의 불법적인 왕래가 엄격하게 제한되고 있어 인권의 성격을 띤 마야 원주민들의 피해와 문제가 더욱더 증가되고 있다.
우수마씬따(Usumacinta)양식
삐에드라스 네그라스(Piedras Negras), 약실란(Yaxchil뇆),
보남빡(Bonampak), 치니끼하(Chinikih?
뻬뗀(Pet럑)과 빨렝께(Palenque)양식의 특징을 다 가지고 있으며 특히 보남빡 벽화의 발전이 특기할 만하다. 벽화를 위해 건물 하나를 지어 그곳의 내부벽면을 모두 화려한 그림으로 치장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주변의 건축양식을 구분하는 것은 학자간의 상당한 이견이 있다. 다음에 볼 빨렝께양식을 이 우수마씬따양식에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빨렝께(Palenque)양식
빨렝께(Palenque)
이 양식의 특징으로 제일 먼저 들을 수 있는 것이 건축물 실내공간 활용을 중요시 여겼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하여 끄레스떼리아 장식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뻬뗀(Pet럑)양식의 단점을 보완시킨 건축법을 개발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끄레스떼리아의 전체적인 입체감은 줄어들지 않은 채 끄레스떼리아에 구멍을 많이 뚫어 전체 중량을 줄였다. 그러다보니 뻬뗀에서 보는 것처럼 더 얇은 벽면으로도 지붕과 끄레스떼리아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게 됐다. 또한 건물 내부공간에 다른 벽을 더 배치함으로써 무게를 분산하여 지탱하는 방법도 적용되었다. 즉 두꺼운 하나가 아니라 얇은 여러 개로 하중을 지탱하는 것이 공간활용 면이나 건물의 안전 면에서 효율적이라는 점을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빨렝께 건축가들의 노력은 여유 있는 실내공간의 확보를 가능케 하였다. 이런 내부공간에 다시 독립된 하나의 방의 형태를 가지는 제단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좀더 중요성을 강조한 독자적인 공간인 내실이 건물의 내부공간 안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방에 각종 그림과 마야문자의 조각으로 그들의 역사를 적고 있다. 이제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들의 조상과 최고지도자들의 이야기가 방의 벽면에 쓰인 마야문자들의 주 내용이다. 이 지역의 건축물들은 출입구가 여러 개 있다는 특징도 가지고 있다. 빨라시오(Palacio)라는 이름을 지닌 건축물군에는 미로(迷路)형으로 연결된 건물에 여러 개의 입구가 다양한 방향으로 나 있다. 또한 천문관측이나 주변관측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관측대가 이 건축물군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
마야의 건축물들을 복원하다보면 어쩔 수 없는 무게의 문제가 이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는 점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지은 건물이 얼마 가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 것들이 있었고 이렇게 붕괴된 건물을 당대에 다시 고쳐지은 흔적도 발견된다. 하중으로 인한 붕괴를 막기 위하여 애당초의 벽을 이후에 더 두껍게 만든 것이라든가 아예 두세 개 되던 입구를 막아 하중을 견디기 위해 벽으로 개조하는 등의 흔적도 나타난다. 지금도 유적지의 발굴과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을 가다보면 많은 건축물들이 지붕의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붕괴된 지붕의 잔해들이 건물 외벽 면에 쌓이고 당시의 입구이던 곳을 나무들이 모두 덮고 있어 밀림에 버려진 마야의 건축물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너진 지붕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지표조사를 하다보면 저절로 알게 될 정도로 마야건축의 지붕 하중 문제는 심각했었다. 물론 천 년이 훨씬 넘는 시간의 풍상에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마야의 많은 건축물들은 과중한 지붕의 무게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에 대한 시행착오와 교정 등을 통하여 건축술이 발전해 나갔다.
리오 벡(R뭥 Bec)양식
리오 벡(R뭥 Bec), 베깐(Bec뇆), 치까나(Chican?, 꼬훈리츠(Kohunlich),
스뿌힐(Xpujil)
뻬뗀이나 체네스양식과 비슷한 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 건축양식의 가장 큰 특징적인 것으로 쌍둥이 탑을 꼽을 수 있다. 건물의 양쪽 끝 부분에 높은 탑이 같은 모양으로 대칭이 되게 세워진 것을 이 곳의 유적지들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계단이 거의 수직에 가깝게 나타나는 것 역시 특이점이다. 경사가 급한 계단은 기능성을 무시한 것으로 마치 건물 장식의 일부처럼 계단이 그 건물에 있다는 의미만을 부여할 뿐 실제로 그 계단을 오르기는 힘들다. 기능적인 면보다는 종교적인 상징성을 중요시 여긴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체네스(Chenes)양식
호촙(Hochob), 찌빌노깍(Dzibilnocac), 산따 로사(Santa Rosa),
스땀빡(Xtampak), 쩨흐깝뚠(Dzehkabt쐍), 따바스께뇨(Tabasque뻩)
첸(Chen)이라는 말은 연못이라는 뜻을 가진 마야 유까딴어이다. 이 지역의 건축물들에서는 거의 끄레스떼리아의 발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렇지만 가장 두드러진 점이라고 한다면 비의 신인 착(Chac) 문양이 건축에 많이 이용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건축물 전면을 뒤덮는 화려한 착 신의 조각은 반복적으로 건축물의 전면을 덮고 있다. 긴 코가 꼬부라져 말린 모습을 가지고 있는 착 신의 반복은 이곳 지역의 기후적인 특수성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종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건물, 즉 제사를 올리는 건물에 인간 생활에 가장 필요한 비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비의 신을 무수히 조각한 것이다. 유까딴반도 지역에는 강이 발달되지 않아 비의 중요성이 다른 어떤 곳보다도 강조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이러한 해석이 설득력을 가진다. 건물 장식을 통해 신전의 입구를 마치 신의 입과 같이 표현해 놓은 점도 재미있다. 다시 말해 신전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신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렇게 신의 세계로 들어간 인간(제사장)이 신을 위한 의식을 행함으로써 비를 얻게 되는 것이다.
뿌욱(Puuc)양식
에드스나(Edzn?, 욱스말(Uxmal), 까바(Kabah), 사일(Sayil), 랍나(Labn?,
스랍빡(Xlabpak), 착물뚠(Chacmult쐍)
뿌욱양식에서 우리는 리오 벡이나 체네스양식의 모자이크식 반복을 이루는 건물벽면 장식이 더욱더 화려하게 발전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단순히 그 조각적인 기법에서의 완성도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잘 조합하여 건물벽면에 조화시키는 예술성 또한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한 덩어리로 된 돌을 입체적으로 다듬어 그 질감과 양감을 잘 표현하였고 이를 건물벽면과 조화되게 반복적으로 배치하여 건물전체의 입체감과 장엄함을 잘 표현하였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많은 조각들이 떨어져 나갔지만 아직까지도 그때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가지고 있어 당시 화려함의 극치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치첸이차-마야빤(Chich럑 Itz?Mayap뇆)양식
치첸이차(Chich럑 Itz?, 마야빤(Mayap뇆)
유까딴반도의 북쪽 지방에서 주로 발전한 양식으로서 전반적인 분위기는 뿌욱양식과 상당히 유사하다. 그러나 똘떼까(Tolteca)양식이라고 하는 건축적인 분위기가 십세기경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특이점을 가지고 있다. 똘떼까양식은 신전에 많은 기둥을 사용하였으며 경사벽(Talud)과 기단면(Tablero)의 장식을 보다 화려하게 장식하였고 건물의 양쪽 입구에 장식이 많이 된 기둥을 상징적으로 적용하는 독특한 외형으로 다른 양식과 구분된다. 또한 착몰(Chacmol)이라고 하는 상(像)을 건물 앞에 배치한다는 점 역시 특징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건물벽면을 인간해골의 문양으로 장식하는 쏨빵뜰리(Tzompantli) 역시 똘떼까 유행이 만들어낸 중요한 건축양식 변화 중 하나이다. 이곳의 마야 사람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건축 기법과 새로운 유행으로 발전하였던 똘떼까양식을 잘 조화시켜 고전적인 마야 아치에 똘떼까의 기둥을 가미하였다. 새롭게 공놀이장에 고리를 부착한다던가 공놀이장 양쪽 끝을 벽으로 막는다던가 하는 것 또한 후고전기에 들어오면서 똘떼까의 유행이 만들어낸 여러 가지 특징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마야빤은 치첸이차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치첸이차의 건축물들을 많이 모방하였다. 이곳에서는 특히 도시중심부를 두르는 담장이 시외곽에 적용되었다.
유까딴 동부해안(Costa Oriental de Yucat뇆)양식
뚤룸(Tulum), 스카렛(Xcalet), 쉘하(Xelj?, 쁠라야 델 까르멘(Playa del Carmen)
이 양식은 마야 고전기의 양식이 아니라 후고전기에 들어 유까딴반도의 동부 카리브해를 따라 발전한 양식이다. 주로 해안가를 따라 번성하였던 이 양식의 대표적인 유적지들은 현재 멕시코의 세계적인 관광지 중의 하나인 깐꾼(Canc쐍)을 중심으로 수많은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이곳도 역시 시기적으로 후고전기를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므로 일정부분 똘떼까양식의 영향이 나타난다. 즉 치첸이차 - 마야빤양식의 설명에서 나오는 똘떼까의 특징들이 이곳에서도 일부 나타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건축 규모가 내륙지방보다는 작아서 각 단위 건물들의 규모도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건물들이 가지는 눈에 띠는 특징으로 외부 벽면의 중심이 밖으로 기울어져있다는 점도 꼽을 수 있는데 이 때문에 건물이 미세하게 역 마름모꼴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