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하나: 중요 연대

1903년 파나마 독립.

1914년 파나마 운하 완공 미국이 운하 통제 및 관리

1940년 반미(反美) 아리아스Arnulfo Arias 대통령.

1941년 쿠데타로 아르아스 하야.

1977년 카터-또리호스 조약으로 1999년까지 파나마 운하 파나마로 양도 약속.

1878년 또리호스 사망.

1983년 노리에가 집권.

1989년 미국의 파나마 침공.

1992년 미국이 노리에가 종신형 선고.

1999년 파나마 운하 미국에서 파나마로 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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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별 볼 일 많은 나라 파나마의 기구한 운명

여러분, 우리나라가 한국 전쟁 이후 오늘날까지 경제 성장을 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머릿속에 금방 떠오르는 것이 여럿 있지요. 근면, 성실, 교육열, 국민 통합 등등의 단어들이 생각날 겁니다. 혹시 박정희의 얼굴이 떠오르는 사람도 있나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요. 이번 장에서 한국 정치사를 말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뭐가 되었든 좋습니다. 한국이 경제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한 가지 뚱딴지같은 의견을 덧붙여 볼까 합니다.

우리가 빠른 경제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나라가 별 볼 일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어떻습니까? 괴변인가요?

파나마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왜 이런 엉뚱한 말부터 시작하는지 풀어 보겠습니.

지구상에서 군사 강대국 빼고, 그러니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별 볼 일 있는 것을 지킬 힘이 있는 나라 빼놓고, 별 볼 일 있는 것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필연적으로 서구 열강에게 그것들을 빼았겼습니다. 19세기 이전에는 대놓고 서구열강의 식민지가 되었고, 19세기 이후에도 역시 서구열강의 경제 침탈, 정치 간섭 등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차근히 여러 예가 되는 나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노예를 잡아가기 위해 수탈되었던 아프리카에서부터, 황금과 땅을 빼앗긴 아메리카, 그리고 20세기에 들어 석유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도 좋은 예가 되겠네요.

그런데 이렇게 별 볼 일 있는 나라(말이 좀 웃기기는 한데……)라서 서구 열강의 각축장이 된 곳치고 오늘날 제대로 사는 나라들이 적어요. 대부분 외교적인 의존성, 정치적인 낙후성, 경제적인 식민성 등 국가 발전에 중요한 요소들에서 문제가 많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번 주제와 거리가 있으니 여러분 각자 따져보세요.

하여간 우리나라가 석유도 없고, 그렇다고 세계의 다른 지역에 비해 땅이 특별히 기름져서 농업 생산성이 높으냐 하면 그렇지도 못하고, 파나마 운하와 같은 전략적 요충지도 아니기 때문에 그나마 요만큼이라도 먹고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전략적 요충지……. 대한민국은 일본과 중국의 수많은 침략을 받아왔습니다. 식민지도 겪었고 서구 열강에 전쟁터를 제공한 한국 전쟁도 겪었습니다. 반도 국가라는 지리적 중요성이 없었더라면 적어도 이 가운데 몇 개는 피해 갔을 겁니다. 물론 역사를 가지고 가정한다는 것이 애당초 모순된 설정이기는 합니다만 탐나는 것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외세의 간섭이 심해지고, 그것이 결국은 자국 안위와 발전에 결코 도움이 안 됩니다. 파나마가 바로 그런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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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파나마 없다

파나마는 탄생부터 이권이 많아 모든 나라가 빼앗고 싶었던 땅이라는 운명을 안고 있었습니다. 원래 파나마란 나라는 없었습니다. 남미 콜롬비아에 속한 땅이었지요.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이 1800년대 초에 하나 둘 에스빠냐로부터 독립을 하면서 콜롬비아도 독립을 하고, 이후 100여 년 가까이 그렇게 콜롬비아의 땅으로 굳어졌습니다.

그런데 콜롬비아에서 떨어져 나와 파나마라는 독립 국가가 만들어진 이유는 간단합니다. 콜롬비아가 파나마 운하와 관련해서 미국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으니 미국이 아예 파나마란 나라를 독립시킨 겁니.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거의 자신들의 속국으로 지배해서 파나마 운하에 대한 절대 권리를 보장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파나마의 독립은 운하를 떼어 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 독립하는 게 좋겠어……라고 말한 일부 현지 사람들을 앞에 내세웁니다. 그리고는 파나마 지역에 살고 있던 현지 사람들이 독립을 원했다고 말하지요. 그들의 자주적인 결정이었다고 미국은 주장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현지의 독립파들은 미국의 절대 원조와 지지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던 것입니다.

미국은 참으로 다양한 형태로 외국에 간섭을 합니다. 그런데 중남미 쪽에서는 바로 이 독립시키고 나서 내 마음대로 휘두르기신공을 가끔 사용했습니다. 미국의 절대 지원하에 독립을 시키고 그렇게 탄생한 독립 국가를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면에서 미국에 절대복종하게 만드는 정책입니다. 쿠바가 그랬고, 이곳 파나마가 그랬습니다. 또 하나가 있죠. 바로 텍사스의 독립입니다. 원래 텍사스는 멕시코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독립시키고 나서 내 마음대로 휘두르기신공을 발휘해서 독립을 시킵니다. 이후에는 아예 미국 땅이 된 경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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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파나마 같은 텍사스의 이야기

미국이 멕시코로부터 땅을 빼앗는 과정에 텍사스라는 나라로 독립을 한 기간이 있습니다. 그 이후에 텍사스가 자율(?)적으로 미국에 통합한 것이지요. 미국이 텍사스 땅을 집어삼켰다고 하는 것보다 얼마나 모양새가 좋습니까. 멕시코의 압제로부터 독립한 텍사스가 자율적으로 미국에 통합한 것과, 미국이 멕시코 땅을 군사적으로 빼앗은 것은 벌써 어감부터 다르잖습니까? 정당화라든지 모양새라든지 어느 면으로 보나 전자가 훨씬 낫습니다. 자주독립 국가인 텍사스를 괴롭히는 멕시코라는 나쁜 나라를, 국제 질서를 어지럽히는 멕시코를 세계 정의를 수호하는 나라인 미국이 응징한 것입니다. 지구의 정의를 어지럽히는 멕시코의 행동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 미국이 용감하게 멕시코의 수도를 점령하는 번거로움도 감수하셨습니다. 우리의 영웅 슈퍼맨이 텍사스를 구한 것입니다. 공식 역사를 보면, 그냥 읽으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것들의 이면에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미국 정규교육과정의 학생들은 역사 시간에 알라모(Alamo) 사건에 대해서 배웁니다. 알라모가 바로 텍사스의 한 요새 이름이거든요. 텍사스는 300년 넘게 에스빠냐의 식민지 땅이었고 멕시코의 독립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멕시코 영토의 일부가 되었죠. 그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고 멕시코 정부가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알라모를 공격했었습니다. 그건 당시 미국의 땅도 아니었어요. 그런데도 미국에서는 이 역사를 통해서 외세가 미국과 미국의 자유와 정의를 공격한 것으로 배우고 느끼게 합니다. 하여간 그렇게 미국에서는 멕시코가 행한 만행에 대하여 배우고 텍사스 독립의 정당성과 이후 미국과의 병합 과정을 정당화시키고 있습니다. 미국이 멕시코 수도를 점령해서 젊은 사관생도들을 포함해 무고한 양민들을 살해한 사건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일본의 우익 역사책에 일본이 한국에서 저지른 만행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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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다섯: 독도는 우리 땅, 파나마는 미국 땅

이제 여러분에게 파나마와 파나마 운하를 설명해도 될만한 어느 정도의 배경 자극을 주었다고 생각하고, 우리의 중심 주제인 파나마로 들어가 봅시다. 너무 주변 이야기가 많았나요? .

아무튼, 파나마 운하라는 중요한 이권 때문에 미국에 의하여 콜롬비아에서 분리 독립되어 탄생한 나라가 파나마입니다. 다른 중남미 국가와 비교100여 년 가까이 늦은 1903년의 일입니다.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가 파나마를 독립시키는 데 많은 이바지를 했습니다. 독립 이후의 파나마는 정치면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사회, 문화, 정신면에서도 미국에 절대 의존하게 됩니다. 파나마 영토를 동서로 관통하는 파나마 운하가 1914년에 완공됩니다. 그리고 운하의 남북 10마일을 미국에 영구 임대한다는 조약을 맺습니다. 그냥 무상으로 영구 임대한다고 하면 너무 속이 보였겠죠. 그래서 돈을 좀 줍니다. 매년 임대료 25만 달러입니다. 대략 한화로 따지면 약 3억 정도 되려나요. 삼억 정도의 돈에 파나마 운하 전체와 그 주변을 다 가질 수 있었습니다. 강남 아파트 한 채도 안 되는 가격에 말입니다. 말을 더하겠습니까. 한 마디로 파나마 운하는 영구적으로 미국 땅이나 다름없게 된 겁니다.

그런데 19991231일 운하가 파나마에 반환되었습니다. 운하를 돌려받기 위해 삐비릿내 나는 투쟁의 역사가 파나마의 역사입니다. 운하라는 이권 덕택에 역사가 만들어지고 다시 쓰이는 운명을 겪은 겁니다. 파나마의 역사에서 지면을 가장 많이 할애하고 있는 두 명의 대통령이 아리아스Arnulfo Arias Madrid와 또리호스Omar Torrijos Herrera입니다. 아리아스는 세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되고도 군사 쿠데타에 의하여 세 번이나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던 비운의 인물로 파나마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중 한 명입니. 또리호스는 다음 꼭지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이 이외에 한 명이 더 있기는 한데 잠깐 기다리세요, 그가 오늘 이야기의 피날레니까요. 아리아스와 또리호스는 모두 반미라고 하기에는, 파나마에서 반미라는 말을 하기가 좀 힘들어서 표현이 어색합니다만, 아무튼 미국과 어느 정도 동등한 입장 내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 한 대통령입니다. 경제적으로 달러를 사용하고, 자국의 군대도 없이 경찰이나 방위대 정도만 있고, 미군이 주둔해서 영토를 가로지르는 운하 지대를 차지하고 있는 그런 나라에서 반미라는 말은 분명 한계가 있겠죠. 그래서 이들 대통령을 반미대통령이라고 하기는 좀 껄적지근합니다. 그렇지만 다른 대통령들에 비해서는 미국에게 할 소리는 했다 정도로 이해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이들 대통령과 관련된 파나마 운하 그리고 미국의 관계가 파나마 역사의 주요한 축이 되니 이 부분을 좀더 구체적으로 관찰해 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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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여섯: 또리호스: 운하를 돌려주세요~~

오마르 또리호스(1929~1981)1968년부터 1978년까지 파나마의 대통령을 역임했던 사람입니다. 미국에 밉보이면서까지 파나마의 운명을 바꾼 인물입니다. 원래는 군인 출신으로 엘살바도르와 미국, 베네수엘라에서 군인 엘리트 과정을 거쳤습니다. 원래 미국의 영향력이 강한 나라에서는 미국 관련 교육기관에서 공부를 좀 해줘야 그 나라의 엘리트가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도 비슷하지요. 방귀 궤나 뀌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미국 거시기 뭐시시 대학을 다녔다든가 하면 좋고, 적어도 영어를 잘한다든가 해야 하지 않습니까. 말을 할 때도 혀 꼬부라진 단어들을 적당히 섞어 써 줘야 좀 수준 있어 보이기도 하고요. 하여간 또리호스는 이런 미국이 만들어 놓은 엘리트 과정을 거쳐 1952년 군대가 존재하지 않는 파나마의 국가방위대Guardia Nacional de Panamá 장교로 임관하게 됩니다. 그 뒤 승승장구하여 1969년에는 준장으로 승진을 합니다. 전형적인 친미 엘리트 과정을 거쳐 권력의 상층부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그가 서서히 삐딱(?)해지기 시작합니다. 196810월에 당시의 대통령인 아르눌포 아리아스Arnulfo Arias Madrid 대통령을 타도하기 위한 쿠데타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본인 스스로가 대통령에 오릅니다. 그러더니만 점점 더 요상한 정치 행보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쿠바의 피델 까스뜨로를 방문한 몇 안 되는 라틴아메리카 지도자 중 한 사람이 됩니다. 미국이 제일 싫어하는 나라의 최고지도자인 피델 까스뜨로를 만났다는 사실 만으로도 미국은 또리호스를 탐탁지 않게 볼 수 있겠지요.

결국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합니다. 미국에게 파나마 운하를 비롯한 엄청난 땅덩어리를 영구 임대한다는 것은 너무 한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운하를 파나마가 돌려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를 공공연히 하고 다닙니다. 많은 국민들도 그에 흐응하기 시작합니다. 미국도 다른 나라 땅을 영구 임대한다는 것이 사실상 그 나라의 땅을 자신들이 차지한 것 아니냐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의 요상한 노력이 나름의 열매를 맺습니다. 마침 민주당 정권이 미국에 들어서고 또리호스는 대 중남미 온건 유화정책을 펴던 카터에게 줄기차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해, 급기야 197797일 당시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과 카터-또리호스 협정을 조인합니다. 그로부터 23년 후인 2000년에 미국이 운하를 파나마에 돌려준다는 약속을 하게 된 것이지요. 당장 돌려받는 것은 아니지만 돌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 만으로도 파나마입장에서는 민족주의의 승리라고 할 수 있고, 반대로 미국에서는 경제, 안보적인 실익을 잃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집니다. 좌우간 토리호스에게는 영광의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내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직위와 권한을 내려놓고 1978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납니다. 그리고 그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네요. ... 하여간 그가 탄 비행기가 파나마의 정글 지대에서 원인 모를 폭발을 하게 되고 그는 그렇게 사망합니다. 원인과 배후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말이 많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미국을 의심합니다. 정치, 외교적인 정황을 고려할 많은 이들이 범인으로 미국을 가리킵니다. 기술적으로 보아도 미국이 모든 파나마 비행기를 일일이 관리하고 통제하던 당시의 상황에서 미국은 토리호스 죽음의 책임에서 자유롭기 힘듭니다. 아마도 정확한 원인은 영원히 안 밝혀질 가능성이 크겠지요. 그러니 독자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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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일곱: 역사의 인물 노리에가

파나마가 미국으로부터 실질적인 독립을 하는 예고편에 또리호스가 주인공이었다고 한다면, 이번에는 본격적인 반미 스펙터클을 펼친 대통령이 탄생합니다. 노리에가Manuel Antonio Noriega(1938~2017)입니다. 앞에서 본 또리호스와 마찬가지로 군인 출신의 인물입니다. 사실상 파나마라고 하는 나라는 공식적인 군대가 존재하지 않고 국가방위대나 경찰 정도만이 존재하는데, 그런 곳에서 군인 출신이 정치의 큰 맥락을 이어갔다는 것은 그만큼 무력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비민주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역시 페루의 육군사관학교를 나왔고 파나마로 돌아와서는 국가방위대 장교로 임관하여 또리호스와 친분을 쌓게 됩니다.

그런데 이후의 행보에서 특이한 점은 미국과의 관계입니다. 국가방위대의 중요한 부서인 정보부의 장교가 되면서 미국 정보기관과 아주 긴밀한(?) 협조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딱히 공식적으로 그렇게 말하기는 힘들지만 미국 정보기관의 요원이었다고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미국의 협조와 방조 아래 정치적인 입지를 넓혀나가게 됩니다. 결국 1981년 또리호스가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뒤 그가 국가방위대를 장악하고 여기의 수장이 됩니다. 실질적인 대통령이 된 셈이지요. 그 이후 그의 정치적인 행위와 평가는 엇갈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역시 파나마 운하와 관련된 사항입니다. 또리호스와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사이에 맺은 파나마 운하 반환 협정을 둘러싸고 미국과 갈등을 빚은 것입니다. 미국은 이 조약을 이행할 생각이 없었을 것이고 노리에가는 이에 대한 이행을 강력히 촉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파나마의 위상을 높이고 미국으로부터의 실질적인 독립을 위해서 파나마 방위대를 정규군화 시키려는 시도도 합니다.

미국이 파나마의 이웃 나라인 니카라과의 민주 정부를 전복시킬 목적으로 반정부군을 도왔다는 점을 바로 이전의 니카라과 편에서 보았습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반정부군을 돕기 위해 주변 국가의 협조가 필요했고 노리에가는 이때 파나마 국가방위대의 실권자로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미국이 주는 표창장도 많이 받았습니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마약 단속을 도운 공으로 받은 상이긴 했지만, 어찌 되었건 미국과 노리에가가 아주 긴밀한 협력자 관계였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노리에가가 무럭무럭 자라나서 대통령이 됩니다. 이제 더는 예전의 애송이가 아닙니다. 미국에 무엇인가를 요구하거나 하는 과정에서 미국과의 갈등이 생겨났을 것으로 보입니. 이 요구가 파나마 운화와 관련될 것이라는 추정이 충분히 설득력을 가집니다. 니카라과에 대한 불법적인 미국의 군사 개입에 대하여 잘 알고 있던 노리에가가 이 러한 미국의 약점을 가지고 미국 정부와 줄다리기를 벌였겠지요. 이렇게 애매하게 이야기 드리는 점이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관련 내용이 온전히 밝혀지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보니 그 과정과 결과들을 가지고 당시의 상황을 유추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여간 이제 미국은 그를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앞에서 니카라과나 쿠바 같은 경우에서도 보았고, 다른 더 많은 예가 무수히 많은 것처럼, 미국은 중남미의 대통령이 독재자인가 아닌가 혹은 정당한가 아닌가 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정권이 문제가 많더라도 친미라고 한다면 묵고 할 뿐만 아니라 방조하고 부추기기까지 한 예가 전 세계에 넘쳐나니까요.

1989년에는 노리에가에 반대하는 군사 쿠데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미국은 경제봉쇄조치를 단행하여 파나마의 경제를 꼬꾸라뜨립니다. 항상 하는 기본적인 수순이지요. 그러나 노리에가와 파나마는 저항합니다. 결국 미국은 스스로 칼을 뽑아 듭니다. 미군은 '저스트 코즈'(Just Cause) 작전을 개시했습니다. ‘정당한 이유라는 작전명은 미국이 파나마의 독재자를 벌주는 것이 정당하다는 점을 애써 강조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유엔UN마져도 찬성 75, 반대 20, 기권 40으로 미국의 파나마 침공은 국제법을 위반한 명백한 부당행위flagrant violation of international law”라고 의결합니다.

그렇지만 결과는 애당초부터 너무나 뻔한 것이었습니다. 변변한 군대조차 없는 파나마에 세계최강의 미국이 침공을 했는데 그것도 파나마 영토 안에 주둔해 있는 미군의 협조를 받아서 작전을 수행했으니 파나마가 이를 격퇴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습니다. 민간인 사망자만 3000명이 넘습니다. 미군은 23명 파나마 군은 314명이 사망합니다. 물론 나라마다 기관마다 사상자 통계 수치는 차이가 큽니다. 하여간 보름도 안 돼 전쟁은 맥없이 끝납니다. 199013일 노리에가는 미군에게 잡혀 미국으로 끌려갑니다. 죄목은 마약 밀매와 독재, 불법 자금세, 인권 탄압……. 뭐 대강 그런 겁니다. 파나마 군은 방위대로 다시 위상이 격하되었습니다. 노리에가 자신은 파나마로 돌아가 파나마 사람에게 재판받을 것을 희망했으나 그게 어디 언감생심 가능한 일이었겠습니까. 19927월 미국 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리고 파나마 운하는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19991231일 파나마로 양도됩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나 국무장관 등은 이 행사에 참석하지 않습니다. 파나마에 운하를 돌려준 조치는 잘못된 결정일 뿐만 아니라 미국 국익에 반하는 행위라는 비판이 지금까지도 미국 내에서 팽배합니다.

노리에가는 이후 미국에서의 감금 생활을 하다 다시 프랑스에 수감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고국인 파나마로 이송되어 감옥에서 지내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가택 연금 상태로 집에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2017년 자택에서 사망하게 됩니다.

그가 꼭 하고 싶어서 반미를 했다고 말하기 힘든 부분도 있고, 내부의 부정부패 등의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약 밀매에도 관여한 정황이 있고요. 하지만 그런 것들은 노리에가에 대한 평가와 역사의 본질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건 반미를 하는 중남미의 대통령은 응징된다는 것이 당시 미국의 철칙이었고, 그 철칙이 잘 지켜졌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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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여덟: 드디어 운하가 파나마에게로

또리호스 전 파나마 최고지도자와 지미 카터Jimmy Carter 미국 대통령과의 조약에 따라 운하가 19991231일 파나마로 돌아갔습니다. 이 역사적인 자리에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참여하였는데, 미국은 냉담했습니다. 미국 공화당에서는 운하를 넘겨준 것이 미국의 이익과 안보에 막대한 위협이 된다고 계속 불만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운하를 파나마에 넘겨준 것이 미국의 실패한 정책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공화당 계열의 보수주의자들이 많습니다. 운하 주변을 관할하는 기업 중에 홍콩계 기업들이 있는 것도 미국으로서는 중국의 압력을 느끼는 마당에 영 신경 쓰이는 일입니다. 2016년 파나마는 대만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중국과의 교류를 공식적으로 시작합니다. 미국은 파나마가 친중국화 되는 것이 영 못마땅합니다. 파나마 운하를 파나마에 돌려준 것이 영 찝찝하게도 느껴집니다.

아무튼 지금 운하는 파나마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파나마는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 큰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제국주의의 이해관계에 따라 탄생한 한 나라가 국제적인 종속 관계를 극복하고 홀로 서려는 노력을 구체화 시키기까지 100여 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주권 국가인 한 나라의 대통령이 주변의 이해관계에 따라 무참하게 미국에 잡혀가 재판을 받고, 이러한 과정에서 파나마인들의 의견과 권리는 철저히 무시, 배제되었다는 점을 우리는 파나마의 역사를 통해 통렬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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