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하나: 중요 연대

 

1919년 에바 뻬론 탄생.

1946년 뻬론 대통령 당선.

1952년 에바 뻬론 사망.

1955년 뻬론이 군부에 의하여 망명.

1973년 뻬론 대통령 재선.

1974년 뻬론 사망. 부통령이던 그의 부인 이사벨 뻬론이 대통령이 됨.

1976년 군부의 반발로 이사벨 뻬론 실각.

1976~1989: 군부정권

1989년 뻬론당의 메넴이 대통령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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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무지렁이들의 촛불 혁명: 뻬론과 에비타 정권의 탄생

멕시코에서 1492년 이후부터 시작된 400여 년간의 민중들에 대한 억압이 혁명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한다면, 아르헨티나에서는 뻬론이즘Peronismo을 통해 나타납니다. 억압받던 사람들, 핍박받던 사람들, 그래서 억울한 사람들의 울분이 멕시코에서 혁명이라는 극단적인 무력투쟁의 형태로 나타났다면 아르헨티나에서는 제도권 안에서의 변화를 추구했습니다.

일단 에비따와 뻬론의 정치에 대한 평가는 잠시 유보하고, 현상적으로 볼 때 에비따가 당시 대중의 절대적인 추앙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에게 신뢰를 받고 가히 종교와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과연 그 원인은 뭘까요. 왜 이리도 많은 사람이 한 정부(政府), 한 여인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보냈을까요? 이 질문이 에비따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열쇠일 겁니다. ,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에비따와 뻬론에게 보낸 절대적인 애정의 원인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이번 장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제까지 한 번도 인간다운 대접을 받아보지 못한, 한 번이라도 저들 부자처럼, 저들 지주처럼 잘살아 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조차 품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몇백 년간을 나는 언제나 바닥 인생이.” “나는 하인, 저 사람은 주인님이라는 것을 강요받아 고착, 습관화된 라틴아메리카 사회에 기적과 같은 가능성을 보여준 것입니다. 나도 존귀한 사람이다, 나도 저 사람들과 동일한 권리와 인권을 가진 사람이고 그래서 나도 저들처럼 살 수 있다는 희망과 의식을 심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가 좀 과장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하루아침에 사회 분위기가 바뀌고 의식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그들은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가능성의 실마리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제까지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어 절대로 터질 것 같지 않던 저수지 옹벽에 작은 구멍을 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말입니다. “! 저렇게 구멍이 나고 옹벽 아래에도 물이 닿을 수 있구나하는 것을 본 것이지요.

이제까지 몇백 년간 계속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에서 민중을 향한 획기적 발상의 전환이 에비따와 뻬론에 의해 시도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도 에비따가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입니다. 뻬론이즘이 오늘날까지도 아르헨티나 정치의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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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아르헨티나의 국모 에비타

저는 아르헨티나를 여행하면서 만나는 사람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에비따에 대해 다양한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각기 다른 평가를 합니다. 당연한 거지요. 이승만에 대한,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가 한국에서 갈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세대 차이가 큽니다. 에비따는 50~60 이상의 사람들에게 훨씬 더 많은 사랑을 받는 것으로 보입니다.

에비따는 못 가진 자에게 - 이들을 뻬론 당에서는 웃통을 벗고 일하는 노동자라는 뜻을 가진 데스까미사도Descamisados라고 불렀죠- 처음으로 희망을 준 사람입니다. 정치에 대한 평가와 비판은 일단 이러한 배경을 이해한 이후에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당시의, 그리고 오늘날의 에비따에 대한 애정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니까요.

평생을 하인으로 살아 온 한 여인의 아들은 엄마가 일하는 주인집의 아들이 타는 자전거가 너무도 부러웠습니다. 그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에게 자전거 하나 사주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자전거는 엄청나게 비싼 물건이라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지요. 평생 그런 부러움을 가지고 살아온 어머니는 운명과도 같은 자신의 처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에비따가 그 아들에게 자전거를 보내온 것입니다. 학교도 가게 해 주고 무료로 여름 캠프를 보내 주기도 하였습니다. 몇백 년간 그녀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 때부터 당연히 자신과 주인집 어른과는 다른 사람이었는데 말입니다. 그야말로 언감생심 그들과 비슷해질 수도 있다는 상상을 단 한 번도 할 수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던 사람들에게 보여준 변화의 가능성은 에비따 시대를 산 민중들의 횃불이 되었습니다.

저는 에비따를 생각할 때마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평가서를 읽거나 토론할 때마다 스스로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에비따의 정책을 뽀뿔리스모(포퓰리즘, 대중 인기 영합주의)Populismo라고 비하합니다. 저도 일정 부분은 공감합니다. 자전거 사주고, 학교 만들어 주느라 정부의 재정이 바닥나고 경제가 어려워져서 결국은 나중에 더 힘들게 되었다는 비판 역시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득권은, 권력자는, 돈 많은 기업가들은 항상 지금은 때가 아니니 나중을 위해 참으라고만 해왔습니다.

지금은 어려우니 회사를 위해서 좀 희생해라, 나중에 회사 잘 되면 월급 올려줄게.”,

지금은 일단 돈을 벌어야 할 때니 허리띠 졸라매고 희생해라. 그래야 희망이 있단 말야!”

우리는 이런 말을 참으로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순진한 우리 국민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열심히, 그야말로 충성을 다해 일했습니다. 그런데 회사가 발전해도 항상 아쉽고, 한국 최고의 기업이 되면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되어야 하고,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되면 경쟁자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또 다른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고…….

언제 말단 사원들에게 혜택을 베푼 적이 있나요? 이런 질문을 아르헨티나의 현실에서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이 이제는 배곯지 않고 살지만, 허리띠 졸라매야 한다고 강조하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민중들이 허리띠 졸라맨 덕택에 훨씬 더 잘 먹고 잘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노동자들에게 지금 회사가 어려워서……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사장님이 오늘 최고급 스포츠카 타고 오셨다.
: 와 우~~ 사장님 끝내주는 차네요
사장님: 끝내주지 ㅋㅋㅋ, 만일 네가 진짜 정성껏 일을 열심히 하고, 잔업도 마다하지 않는다면, 내가 약속하겠는데, 내년에 내가 이런 차 하나 더 살 수 있을 거야.

제가 이렇게 한국까지 들먹거리는 것은 아르헨티나, 라틴아메리카의 역사가 그렇게 500년이 넘게 흘러왔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지배 계층은 항상 이들에게 약속만을 해왔습니다. “너희들도 조금만 참으면 이렇게 잘 살 수 있어라며 지키지 않을 약속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희생을 강요해온 것입니다. 장장 500년 동안 말입니다. 만일 에비따나 뻬론 정부 없이 아르헨티나의 경제가 잘 되었다면 -물론 그 가정에 대한 결과도 논란의 대상이지만- 이제는 진짜 민중들에게 혜택이 골고루 돌아갔을까요? 가난한 사람도 자전거를 살 만큼 국민 개개인의 사정이 나아졌을까요?

그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입니다. 즉 에비따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하는데, “만일 그들이 없었다면 나라가 더 발전을 하였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그 시대에 정권을 잡았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라는 것도 의문입니다만, 그보다 하나 더 나아가서 비록 경제가 나아졌다 해도 대다수 민중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나마 에비따와 뻬론이 있었기에 아르헨티나 국민은 수백 년간의 거짓된 약속의 반복을 처음으로 깨고 인간다운 대접을 받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처음으로 열심히 일한 사람이 자전거를 탈 수 있었습니다. 결국 에비따는 성녀인가 악녀인가 하는 문제와 맞물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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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뻬론이 나라 경제 말아먹었다고?

 

뻬론과 에비타가 펼쳤던 페로니즘과 관련하여 한국에서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평가는 포플리즘’, ‘망국’, ‘경제 파탄과 같은 혹독한 것들입니다. 아예 아르헨티나라고 하는 나라의 가장 대표되는 이미지가 이런 것들이니 말입니다. 보통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보수계열의 언론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주로 생산해 냈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좀 더 따져보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하는 의문이 들게 됩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뻬론과 에비타 정권이 자신의 정치적인 인기를 위해 국가 경제를 걱정하지 않고 무책임한 정책을 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부자, 기득권 중심의 정책으로는 국가의 발전을 담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진보적 경제학자들의 고민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운 건 좌파와 진보 정책을 무조건 폄하하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겪고 있는 아르헨티나 경제의 문제는 오히려 뻬론 정권 이후의 군부독재 세력이나 반 뻬론이즘을 부르짖는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에 기인합니다.

뻬론정권이 들어섰을 당시 국가가 주도하는 경제개발 정책은 전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경제 육성정책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새마을 운동이나 경제개발계획혹은 미국의 마샬플랜이나 대공황 시대에 후버댐을 건설하는 것과 같은 것들은 시장경제가 가진 한계를 국가 주도로 극복해 보자는 노력의 일환이지요. 즉 뻬론이 내세운 국가 주도형 경제정책이 애당초, 근본적으로, 아무 생각 없는, 자신의 인기를 위한, 그리고 등 등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멍청한 시도라고 하기는 힘듭니다. 국가는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중산층을 부양하거나 인위적으로 소비시장을 진작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독점체제를 단속하는 등 다양한 개입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만 봐도 뻬론의 경제정책이 아르헨티나를 말아먹었다고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은 억지 주장입니다. 뻬론이 통치하던 시기의 국민총생산은 계속해서 늘어나서 130%에 달하는 성장을 보입니다. 개인소득 역시 200% 이상의 성장률을 보입니다. 아래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플레이션은 떨어지고 실질임금은 올라가면서 국민들의 삶은 점차 나아지게 됩니다.

한편 경제의 구조 면에서도 기존의 농업 중심의 국가 경제 체제를 벗어나 공업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됨으로써 구조적인 변화에도 성공합니다. 더군다나 경제를 이끌어가는 기반과 기초체력 면에서 뻬론의 빈민구제 정책과 소수자에 대한 배려는 빈곤층을 감소시키고 중산층을 탄탄하게 유지하게 함으로써 전체 국가 경제의 체질을 개선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합니다. 아래의 도표는 뻬론이 정권을 잡고 있던 시대에 어떻게 빈곤층의 비율이 지속적으로 줄면서 관리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즉 국민 개개인의 경제를 개선하여 향후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기초를 만든 것입니다.

멀쩡한 아이 바보 만들기 쉽습니다. 멀쩡한 정권 쓰레기로 만들기도 쉽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도 그러한 사례가 충분히 나타나지 않습니까.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엉터리 논리를 만들어내고 언론이 그것을 받아 적어줌으로써 사실을 왜곡하거나 아예 역사 전체를 뒤집어 놓는 현상이 아르헨티나건 오늘날의 우리에게서건 일어나는 거지요.

아르헨티나의 경우 그들 경제 침체의 원흉은 뻬론 정권을 무력으로 무너뜨린 군부입니다. 1976년 군사 쿠데타에 의하여 비델라와 군부 세력이 경제를 주도하면서 그동안 뻬론이 힘들여 만들어 놓은 아르헨티나 경제의 기반이 무너진 것입니다.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빈곤층은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그 당시의 군부독재가 인권이나 문화 등의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경제에도 엄청난 악영향을 입혔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팩트입니다. 영국과 전쟁을 일으켜 패전함으로써 국가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경제에까지 악영향을 미치는 등 수많은 만행을 저질렀어요. 불법과 무능의 끝판왕입니다. 뻬론 이후의 독재자 비델라 시절 아르헨티나의 빈곤율이 4%에서 38%까지 폭등하는 일이 벌어지고 이에 대하여 불만을 말하는 사람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습니다.

뻬론은 외환 관리, 무역 보호, 산업 보조금 장려, 관세를 통한 경제성장 도모 등과 같은 정책을 병행하였고 수입대체와 국내 생산품 육성을 통한 국가 소비시장 활성화와 같은 정책을 펼쳐 국가 경제의 체질을 개선해 보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물론 많은 부분 실패를 한 것도 있고 선진국과의 경쟁에서 역부족이었다는 점 또한 비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뻬론 정권이 자신들의 개인적인 정권 창출과 개인의 탐욕을 위해 아무런 계획 없는 인기영합주의를 채택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평가는 뻬론을 깎아내리기 위한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림 1945~1955년의 실질임금과 인플레이션. 빨강 실질임금, 연두 인플레이션. 출처: Didáctica de la Historia
그림 1965~2005년까지 절대 빈곤 비율. 출처:INDEC para Gran Buenos Ai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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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다섯: 엄마 찾아 삼만리

아르헨티나는 아메리카 대륙에 18세기에 세워진 4개의 부왕청 중의 하나가 있던 장소일 정도로 교통과 상업이 발전하였던 곳이었습니다. 물론 전 지역이 다 고르게 번성한 것은 아니고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 주변 지역에 국한된 발전이었습니다. 남미 지역에서 포르투갈이 지배하고 있던 브라질과 더불어 대서양을 통해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중요한 해상교통의 요지였어요. 그래서 일찍부터 유럽사람들이 많이 건너와 살았습니다. 거기에 원주민들의 숫자도 적었고 그나마 있었던 원주민마저 백인들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나니 인구 구성면에서 백인의 숫자가 높았어요. 1778년의 인구 분포를 보면 백인 38%, 원주민 22%, 혼혈 3%, 흑인 37%로 유럽에서 온 사람의 비율이 높았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인구 구성은 둘째치고, 절대 인구 자체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독립이 이루어지던 1800년대 초의 인구가 기껏해야 40만으로 다른 주변 국가보다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같은 시기의 멕시코가 대략 600만 정도였으니 그 차이가 느껴지실 겁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르헨티나에서는 적극적으로 외국인들의 이민을 장려하게 됩니다. 그래서 유럽에서 대규모로 사람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이러한 유입은 인구 구성에도 영향을 줘서 독립 이후 100년 정도가 흐르고 난 후인 1940년의 인구 구성 분포를 보면 백인이 전체인구의 94%로 대다수를 차지하고 원주민은 이미 정벌과 인종청소를 거치는 과정에서 1% 미만의 소수민족이 됩니다. 여기에 혼혈이 5% 정도였고 흑인은 15,000명 정도로 비중이 급격히 줍니다. 대부분 유럽사람입니다. 이탈리아 44%, 에스빠냐 31%, 프랑스 4% 정도이고 나머지 폴란드,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아랍 등에서도 일부 인구가 유입됩니다. 그래서 아르헨티나를 가리켜 백인의 나라, 남미의 유럽이라고도 하고, 백인 거지가 있는 유일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라는 타이틀까지 따라다니는 거지요.

유럽 사람과 유럽의 제도, 유럽의 건축양식과 유럽의 학문 등등의 모든 유럽의 것들을 들여와서 서양처럼 발전하겠다고 생각합니다. 라틴아메리카의 유럽을 지향합니다. 그냥 유럽이 되고 싶었던 거죠. 그러나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유럽처럼 되는 것이 녹록지 않습니. 물론 한때 세계의 어떤 나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잘 살며 떵떵거린 적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영광은 잠시고 대부분의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겪은 독립 이후의 혼란과 저발전의 양태가 아르헨티나에도 나타나게 됩니다.

로사스Juan Manuel de Rosas라고 하는 인물의 철권 정치를 통해 19세기 중반까지 그나마 정치는 안정시킵니다. 그러나 독재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미뜨레Bartolomé Mitre에게 정권을 양도하게 되는데 미뜨레는 사실상 아르헨티나의 19세기 후반 경제 번영의 기반을 만든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그리고 1868년 사르미엔또Domingo Faustino Sarmiento에 의한 최초의 민간정부가 출현하게 되고 아르헨티나 경제 번영의 기반이 이때 이루어집니다. 이 당시 교육 개혁을 통해 서반구 최고 수준의 교육 역량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는 현대화되고 경제적으로는 자유무역이 활성화됨으로써 활력이 생겨납니다. 정치적으로도 공포 정치가 종식됨으로서 형식적이나마 민주주의가 안정화됩니다.

이러한 상황에 맞추어 아르헨티나의 경쟁력 있는 중요 산업인 농축산업이 활성화되고 여기에 세계 시장에 육류를 수출할 수 있는 냉동선이 개발되면서 아르헨티나는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서게 됩니다. 유럽 사람과 돈이 아르헨티나로 흘러 들어오게 됩니다. 이때 우리나라에 엄마 찾아 삼만리라는 만화를 통해 소개된 아르헨티나의 부유한 상황이 펼쳐지게 되는 겁니다. 이탈리아의 가난뱅이들이 아르헨티나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일을 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부유한 나라 아르헨티나에서 식모로 일하고 있는 엄마를 보고 싶어 마르코라는 어린 소년이 엄마를 찾아 아르헨티나까지 여행하는 기막힌 이야기가 나온 것이지요. 하여간 그 당시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세계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발전하였습니다.

한편 이러한 발전은 진보적인 노동운동의 싹을 틔웁니다. 경제 발전과 사회적인 안정 등을 배경으로, 이민 중산층을 중심으로 소수의 엘리트 귀족 정치를 타파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납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한 투쟁, 사회적 정의 구현 등의 선진적인 고민이 이어집니다. 이후 정치적으로도 서민 출신의 대통령이 탄생하게 됩니다. 1912년 보통 선거법이 제정되고 1916년에는 최초의 서민 대통령인 이리고옌Hipólito Yrigoyen이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됩니다. 즉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서 볼 때 아르헨티나의 뻬론과 페로니즘의 등장은 한 개인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역사적인 축척의 과정을 거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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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여섯: 뻬론은 누구?

아르헨티나의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뻬론의 정식이름은 후안 도밍고 뻬론Juan Domingo Perón입니다. 뻬론은 아버지의 성이고 후안이 이름이고 도밍고는 엄마의 성입니다. 그는 1895년에 태어나서 1974년에 돌아가셨어요. 한국 나이로 80세까지 산 거니 나름 장수를 한 셈입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사실 좀 남다른 면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된 사람이니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남다른 면을 보였다느니 뭐 그런 빤한 말들을 하지 않습니까. 근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의 어머니가 원주민이었다는 사실이 좀 특이합니다. 보통 그 당시에는 아르헨티나의 정치, 사회적인 특성으로 볼 때 원주민 엄마와 백인 아버지와의 결합은 상당히 특이한 사례인 거죠. 정식결혼에서 생겨난 아이가 아닙니다. 그의 출생신고서 원본에 보면 어머니 이름은 없고 아버지 이름만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9살의 어린 나이에 엄마를 떠나 그의 출신 성분을 숨긴 체 아버지 집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부분에서 어린 뻬론의 마음고생도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그의 출생과 관련한 배경으로 인하여 그가 엘리트나 주류보다는 비주류와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들에 관한 관심과 배려를 키우게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뻬론은 16살의 나이에 아르헨티나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군인으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합니다. 그렇게 군인으로 승승장구하던 그가 1943년 군사 쿠데타에 참여하며 군인에서 정치가로 변화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후 에비타를 만나게 되고 정치적으로도 성공을 거두며 노동부 장관을 거쳐 1944년부터 ~ 1946년까지 부통령을 그리고 결국에는 1946년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반뻬론주의 군인들의 쿠데타에 의해 1955년 축출되어 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귀국하여 1973년에 다시 대통령이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그는 오늘날까지도 아르헨티나의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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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일곱: 에비타는 누구?

에비타는 뻬론 대통령의 부인으로 퍼스트레이디였지만 단순히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실질, 상징적인 정치,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아르헨티나 현대사의 불멸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본명은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 데 뻬론María Eva Duarte de Perón으로 1919년에 태어나 1952년에 사망, 33세라는 짧은 인생을 불꽃같이 살다간 사람이지요. 일반적으로 애칭인 에비타Evita로 불립니다.

그녀는 남편인 뻬론만큼이나 출생과 성장 과정에서 많은 아픔을 겪습니다. 페론이 백인 아빠와 원주민 엄마 사이에서 혼외자로 태어난 것과 비슷합니다. 에비타의 엄마는 본처가 아니었어요. 유부남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에비타는 정식으로 아버지의 딸로서 인정을 받을 수 없었고 첩의 딸이라고 하는 열등감과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아버지의 많은 사랑을 받기는 했지만, 가족적인 상황이 만든 불편함이 성장 과정에서 그녀를 힘들게 했어요.

그러한 그녀가 자신의 인생을 바꾸기 위하여 소위 무작정 상경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행을 결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펼쳐지게 되지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그녀는 모델, 영화배우, 성우와 같은 연예계 일에 종사하며 그 방면에서 사회성을 인정받게 됩니다. 그런 과정에서 후안 뻬론이라는 정치인을 만나게 되어 결혼하게 됩니다. 둘의 나이 차이가 크다(24살 차이), 에비타가 후안의 권력을 보고 정략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에비타가 결혼 전에 남자 친구가 많았다 등등의 여러 가지 에비타를 비하하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은 사실 그녀를 죽도록 꼴보기 싫어하는 극우 엘리트주의자들이 많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에비타는 뻬론이 대통령 선거 유세를 하기 위하여 다니는 곳마다 같이 다니며 유세를 도왔고 그렇게 뻬론이 대통령이 되는 데에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뻬론이 대통령이 되고서도 그녀는 단순히 영부인으로서 남편을 보조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민중을 위해 실천하는 적극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에바 뻬론 재단을 만들어서 사회취약계층을 위한 사업을 펼칩니다.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운동을 진보적으로 전개합니다. 특히 여성, 장애인, 어린이, 노약자 등의 복지에 큰 노력을 쏟아붓습니다. 그녀는 곧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됩니다. 대통령인 뻬론과 함께 영부인의 자격으로 유럽을 순방할 때조차 대통령 남편보다도 더 큰 유명세를 치릅니다. 물론 여기에는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신여성으로서의 활약 등도 한몫을 했습니다. 그녀의 올백 헤어스타일이 세계적으로 유행을 할 정도니까요.

그러나 운명은 그녀를 가만 놔두지 않네요. 1950년 그러니까 그의 남편 뻬론이 대통령이 되고 4년이 지나, 이제 막 그녀의 활동이 무르익을 무렵 자궁암 진단을 받고 투병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19527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녀를 애도하는 물결은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수많은 곳에서 긴 행렬을 만듭니다. 그녀는 살아생전 자신의 몸과 마음을 모두 바쳐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인 여자들, 노인과 가난한 노동자와 같은 사람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데에 온 힘을 다했어요. 그리고 그만큼 엘리트나 부자들과 같은 사회 기득권세력과 척지게 됩니다. 에비타에 대한 평가를 보면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 저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성녀로 그리고 기득권 엘리트들에게는 창녀로 불리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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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여덟: 뻬로니즘 version 2.0

오늘날의 아르헨티나 정치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뻬론주의를 빼놓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이미 앞에서 했습니다. 이 뻬론주의는 아르헨티나 좌파의 진보적 정치성향을 집약적으로 설명할 때 유용합니다. 아르헨티나 좌파 맥락의 중심에 놓여 있으니까요.

1951년 에비타가 죽고 1955년에는 군사 쿠데타에 의하여 뻬론마저 망명길에 오릅니다. 그러나 뻬론과 에비타가 가진 강력한 대중적인 기반은 아르헨티나 좌파의 아이콘이 되어 진보 정치운동을 집결하게 만듭니다. 결국 수년간의 혼란을 극복하고 아르헨티나 국민은 다시 뻬론을 대통령에 앉힙니다. 1973년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도 일 년 만에 병으로 세상을 뜨게 됩니다. 그런데 그와 그의 부인이었던 에비타에 대한 지지는 뻬론의 재혼 부인인 이사벨 뻬론Isabel Perón 에게까지 이어집니다. 그래서 뻬론이 1973년부터 1974년까지 그리고 이사벨 뻬론이 1974년부터 1976년까지 대통령을 하게 됩니다. 뻬론과 뻬론으로 대표되는 아르헨티나 좌파가 정점을 찍는 시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군사독재의 망령이 다시 덮쳐옵니다.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고 이사벨 뻬론은 하야합니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군부 통치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렇게 칠 년간의 군사독재를 경험하며 영국과의 전쟁을 치르는 등 국력은 쇠잔해지고 다시 민간정부로 전환됩니다. 그리고 등장한 인물이 1989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어 10여 년간 집권한 뻬론 당의 까를로스 메넴Carlos Menem입니다. 그는 뻬론의 후예라는 수식어가 붙는 사람으로, 뻬론을 쿠데타로 몰아낸 군사정권에 저항하다 감옥살이와 고문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 정치적 안정과 경제 발전을 이루어 948월의 개헌을 통해 재선되어 99년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합니다.

이후 뻬론주의가 잠시 주춤하는가 합니다만 실제로 내용을 들여다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991024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연합의 대표 데 라 루아(De la Rua)49%의 지지를 받아, 38%의 지지를 받은 뻬론당의 두알데 후보에 승리합니다. 이렇게 뻬론당에 맞선 야당이 승리를 하게 되는데, 재미난 것은 이 야당도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정당으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소속입니다. 즉 진보 성향의 정당으로 페로니즘과 맥락을 같이 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한편 대통령 선거에서는 졌지만 뻬론당은 상원의원 선거에서 35석을 차지함으로서 여당 연합 21, 기타 16석을 차지한 상황으로 볼 때 뻬론이즘이나 진보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뻬론과 에비타로 대표되는 정당이 이러한 역사 과정에서 아르헨티나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축이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어서입니다. 이렇게 페로니즘은 2001년 이후 다시 정권을 잡아 2015~2019년 사이의 4년을 제외하면 아르헨티나의 집권 여당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즉 그만큼 아르헨티나의 정치에서 뻬론과 에비타는 여러 가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가장 사랑받는, 가장 지지받는 정치적인 인물 중 하나라고 하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즉 우리가 아르헨티나에 가서 만나게 되는 아르헨티나 사람 중에 최소 반 정도는 뻬론과 에비타의 정책이 무책임한 대중영합주의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포풀리즘을 이야기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혹은 부정적인 정치인의 대표적인 인물로 거론되는 아르헨티나의 페로과 페로니즘은 사실 실체가 그런 것도 아닐뿐더러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정치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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