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 연대

1492: 끄리스또발 꼴론의 아메리카 대륙 도착

1521: 에르난 꼬르떼스 멕시코 정복

1524: 삐사로의 잉까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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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

149283일 에스빠냐 남부에 있는 로스 빨로스(Los Palos)라는 작은 항구를 출발한 산타 마리아(Santa Maria), 라 니냐(La Niña), 라 삔따(La Pinta) 라는 이름의 세 척의 배가 88명의 선원과 항해하여 우여곡절 끝에 기적처럼 구아나하니(Guanahani)라는 작은 섬에 도착하게 됩니다. 14921012, 어슴푸레한 새벽안개를 뚫고 망루에 올라 있던 선원의 눈에 육지가 보입니다. 띠에라!(Tierra!, 육지다!), 띠에라!, 띠에라!

이곳의 원주민들은 처음 보는 새로운 사람들을 극진히 맞아 주었고, 에스빠냐 사람들은 자신들을 죽음에서 구한 섬이라는 뜻으로 이 섬을 산 살바도르(San Salvador)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이것이 훗날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일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 사건은 아메리카 대륙의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재앙으로, 그리고 유럽 사람들에게는 신의 축복으로, 세계의 주도권을 쥐는 계기가 됩니다. 이를 가리켜 우리는 신대륙 발견이라고 배워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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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륙 발견, 뭔 *소리

그런데 신대륙 발견이란 무슨 뜻인가요? “1492년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였다.” 우리들은 내내 그렇게 알아 왔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입에 뱄습니다. 저만해도 그러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쓰는 이 말은 명백한 역사 왜곡으로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 또는 좀 양보해서 완곡하게 표현한다 해도 유럽과 아메리카의 만남이라는 말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완전히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멀쩡하게 살고 있는 땅을 신대륙이라고 왜곡하였고, 우리는 서양 사람들에 의해 이렇게 왜곡된 역사를 아무런 비판 없이 그냥 그대로 교과서에 싣고 가르쳐 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역사 왜곡에는 항상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한일 관계 역사 왜곡이 분명한 원인과 의도가 있듯이 1492년의 역사 왜곡에도 그 원인과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이러한 역사가 왜 그리고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왜곡된 역사가 어떻게 바로잡아져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역사 왜곡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원인과 의도에 따라 1492년 사건의 의미를 다시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공부하는 라틴아메리카 역사에서 이 사건이 갖는 오늘날의 의미와 성격이 올바로 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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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세계화

1492년의 사건은 지난 1000년간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1492년을 계기로 인류는 커다란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됩니다. 1492년 이전에는 세계적인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지구에 사는 인류에게 인위적인 공통의 사건이나 공통의 문제 등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유럽인은 유럽인 대로 살고, 아프리카 사람들은 아프리카 사람들 나름대로 살았습니다. 서로 간섭이나 영향 관계가 미미했습니다. 동양도 별반 다를 게 없었습니다. 실크로드니 뭐니 해서 가끔 서양과 무역을 하긴 했지만 간섭을 하거나 지대한 영향을 주거나 할 정도의 수준은 못 되었지요. 몽고사람들이 서양을 박살 낼 뻔한 사건도 있기는 했지만 긴 역사의 시간으로 본다면 에피소드에 불과했었으니 말이지요. 아메리카 대륙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동서양 사람들은 아메리카 대륙이 있고 거기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조차 몰랐습니다, 아메리카 사람들도 다른 대륙에 큰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듯 1492년 이전에는 서로 단절된 각각의 개별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1492년의 사건을 통해 이른바 대항해 시대로 식민지 개척 시대가 도래하면서 단순히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만남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 모든 인류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됩니.

그동안 잘살고 있던 아프리카 사람들은 대항해 시대를 맞아 서구 열강들의 침입을 받으면서 노예로 붙잡혀가는 엄청난 수난을 겪습니다. 피식민지 국가의 역사를 가진 오늘날의 많은 나라들, 즉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호주 등이 서구 열강의 땅따먹기 게임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등을 쓰는 나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당시의 치열했던 변화의 양상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에스빠냐의 식민지 지배를 보고 자기들도 그렇게 하고 싶어서 군침을 흘리던 유럽 제국들에 의하여 세계 전체가 식민지 쟁탈전에 휩싸이게 됩니다.

필리핀은 나라 이름 자체가 펠리페(Felipe)라는 에스빠냐 국왕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지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에스빠냐의 국왕인 펠리페에게 정복당해 300여 년에 걸친 에스빠냐 식민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인도차이나의 기구한 외세 침탈의 역사도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이른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등의 말들이 생겨납니다. 배를 타고 전 세계를 휘젓고 다니며 식민지를 건설하여 자국의 깃발을 꽂은 나라가 세계의 주도권을 쥐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이렇게 세계사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이 1492년에 일어났고, 그 사건을 계기로 대항해 시대와 식민지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개항을 안 해 영향을 매우 늦게 받긴 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음으로 양으로 세계 조류의 파장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 사람들이 사용한 조총은 포르투갈 사람들이 전해준 것이고, 외국인 선원들이 표류하다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서양 사람들에게 그렇게 중요한 나라로 인식되지 않은 덕택에 그나마 조용했지만 영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백김치만 먹던 우리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건너온 고추를 알게 됩니다. 오늘날과 같은 빨간색 김치를 먹게 된 것도 이런 세계적인 움직임의 영향입니다. 이렇듯 1492년의 사건은 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실질적이고 상징적인 계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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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기는커녕 킁킁

말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딴죽을 걸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엉터리 소리가 그런대로 설득력을 갖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입니다. 1492년 이전에는 각 대륙 간 상호 영향 없이 살았는데 한 군데로 통하는 길이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겠습니까? 서양 사람들이 자기네 역사를 치장하기 위해서 유럽 일부의 길이 로마로 통한다는 사실을 세계의 길이 로마로 통한다라고 과장한 겁니다. 오히려 1492년 이전의 세계 중심은 동양이었다는 사실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1492년의 사건을 통해 진짜 모든 길이, 비록 로마는 아닐지언정 세빌야나 파리나 런던이나 뉴욕 정도로 통한다는 말이 가능해집니다. 그 시작점을 만든 인간이 바로 무식한데다 용감하기까지 했던 1492년의 주인공 끄리스또발 꼴론(크리스토프 콜럼버스)입니다. 이 인간이 왜 무식한데다 용감했는지는 차츰 설명하겠습니다.

경제면에서도 겨우 지중해 안에서 행해지던 유럽의 경제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돌아다니며 무역을 펼치는 식민지 무역의 시대로 바뀌게 됩니다. 사회 제도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때를 계기로 봉건적인 사회 신분 제도가 본격적으로 극복되기 시작합니다. 무역을 통한 상업 자본이 발달하고 이 자본을 바탕으로 한 돈 많은 놈들이 등장합니다. 소위 이러한 부르주아의 등장과 더불어 전통 신분 제도가 급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변화들이 사회 전반을 총체적으로 바꾸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는 물론이고 종교, 문화, 인구, 의식주 등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적든 많든 혹은 빠르든 느리든 많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1492년의 사건은 인류의 역사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단순히 아메리카 대륙의 변화만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 전 세계 변화의 촉매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가 16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세계사의 중요한 맥락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1492년에 일어난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이라는 사건을 이해하는 것은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또한 세계의 역사, 나아가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이해하는 데 더없이 중요한 요소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때 세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유럽이 지금까지도 그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492년 이후 지구가 최초로 상호 영향권 안에 들어가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유럽이 제일 힘이 센 대장노릇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대장 노릇을 오늘날까지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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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발견~~ 지랄하고

유럽사람들은 왜 멀쩡하게 많은 사람들이 잘살고 있는 곳에 와서는 사람들이 없는곳, 신대륙이라고 말했을까요? 그 점부터 먼저 따져봐야겠습니다. 그다음에는-사실 이게 더 중요할 수도 있는데- 신대륙 발견이라는 말이 아직도 우리들 사이에서 친근하게 들리는 이유와 배경에 대해서 살펴봐야겠습니다. ‘왜 처음에 신대륙 발견이라고 말한 걸까? 그리고 그것이 잘못된 것인데도 계속 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두 가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일단 이해를 돕기 위해 신대륙 발견이란 말의 허구를 좀 극단적인 방법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한 가지 가정을 해보죠. 프랑스 사람이 한국에 와서 우리나라 전체를 식민지화하고 이곳이 신대륙이었다고 말했다면, 그리고 아직도 그 식민지의 정치, 경제의 기득권이 그대로 한반도에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당연히 병인양요라는 말은 무언가 긍정적인 문구로 바뀔 겁니다. 프랑스의 한반도 발견 기념일 이런 정도로 표현되려나?^^ 그리고 그 역사에 대한 시각은 계속 이어져서 오늘날까지도 당시 프랑스 사람들이 들어온 건 정말 좋은 일이었다고 합리화시키고 있겠죠.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도 이러한 장면이 있죠? 뭐겠습니까? 신라의 백제 침공, 신라의 고구려 침공, 그게 성공을 하고 나니 우리는 화랑이 어떻고 김춘추가 어떻고 하며 그들의 무력 행사를 당연한 것처럼, 훌륭하고 용감한 것처럼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프랑스가 우리나라를 점령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면 우리는 아마도 프랑스의 침공을 미화시키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또한 일본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한국의 처지에서는 경술국치가 일본의 입장에서는 한일합방이 되는 것이죠.(그런데 왜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한일합방이라는 일본 입장의 용어가 그대로 쓰이기도 할까요?!) 만일 일본이 세계대전에서 지지 않았고, 우리나라가 계속해서 일본의 식민지로 남아있다면 유관순 누나와 윤봉길, 안중근 의사는 테러리스트가 될 테고, 독립군은 반정부 게릴라가 되지 않겠습니까. 아마 이순신이라는 이름을 생전 들어 보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공식 역사, 즉 교과서는 승리한 자가, 기득권자가 쓰는 것이니까요. 여러분 스스로 이러한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는 데 실패했다면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 반란 사건정도로 기록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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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놈이 쓴 역사

아무튼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침공을 신대륙 발견이라고 기록한 것은 정복자 입장에서 침략이라는 부당한 행위를 합리화, 정당화시키려는 수작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명백히 잘못된 것인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배워서 알고 있는 이유는 그러한 결과를 통해서 이득을 본 집단이 그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그리고 세계의 가장 힘 있는 사람들이 멀쩡한 땅을 빼앗은 장본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도둑질 한 도둑놈들이 역사를 쓴 것입니다. 이거 빼앗은 게 아니고 주인이 없는 신대륙이었어”.... 그리고 직접 연관이 없는 우리나라에서까지도 침략자 중심의 식민지 역사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유는 그러한 세계 구도를 인정하거나, 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인디언들을 다 죽이고 북미 대륙을 정복한 것을 그거 나쁜 일이네라고 말하면 지금 미국의 기득권 세력들이 좋아하지 않겠지요. 미국의 주류사회가 싫어하는 말을 하면 우리나라에도 별로 좋은 것이 없겠다고 생각하겠죠. 이런 학문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입니다. 이런 역사 왜곡을 당연한 것으로 교육받아 온 서양 시각 중심의 학자와 학계가 한 몪을 합니다.

이와 관련된 역사 다시 보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니 여기서는 간단히 문제 제기만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우리의 주 관심사는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 또는 아메리카와 유럽 만남의 과정을 통해 라틴아메리카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화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는가?’에 있으니까요. , 이 사건이 갖는 라틴아메리카적인 의미는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세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이런 영향 관계로 변화된 세계와 라틴아메리카와의 상호 관계가 어떠한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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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놈이 주인이 되어

이번 장의 중심 구도는 아메리카와 유럽의 만남을 통해 맨 처음에 형성된 라틴아메리카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배경이 무엇인지를 이해해 보는 것입니다. 처음에 형성되어, 변화를 거쳐, 발전된 다음에 이후 갈등의 국면을 거치는 계기가 애당초의 처음에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책에서, 이번 장에서 모든 것을 한꺼번에 풀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차근차근 보아갈 것이지만 지금은 그 첫 단추가 어떻게 끼워졌는가를 보는 거예요.

제가 아메리카와 유럽의 만남을 통해 맨 처음 형성되었다고 말했는데, 이게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가 앞 장에서 다룬 1492년 이전의 가치와 구조 등이 유럽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철저히 부정되고 새롭게 유럽의 것이 이식되어 결국 유럽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곳 아메리카 원주민의 것도 아닌 제3의 라틴아메리카 사회가 만들어진 계기가 바로 지금 우리가 공부하려는 아메리카와 유럽의 만남이라는 사건을 통해서입니다.

그 당시 정복을 한 백인들이 오늘날까지도 기득권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중남미에 가보십시오. 백인 거지가 있나요? 없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하게 사는 사람 중에 백인은 거의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된 극단적이지만 분명한 이유가 1492년에 최초로 형성된 사회구조에 있습니다. 그때의 지배자들인 백인들이 지금까지도 지배세력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이 가난할 일이 없습니다. 거지가 될 일은 더욱 없구요. 물론 백인 거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피부의 하얀 정도와 경제력을 조사해서 그래프를 그린다면 분명히 비례 관계입니다. 그런 연구를 아직 발견하지 못해 여기에 인용할 수 없음이 애석할 따름입니다만, 과연 그런 연구를 할 사람이 있을까 싶습니다. 인종 갈등을 조장하는 결과가 될 테니까요.

아무튼 오늘날의 라틴아메리카 사회 계층 구조에 1492년의 사건이 핵심에 있습니다. 오늘날 정치 갈등의 배경에 직간접으로 1492년의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좀 극단적으로 보면 오늘날의 라틴아메리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라틴아메리카의 갈등, 대안, 고통과 그들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492년 사건의 이해가 필수입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1492년 사건의 구체적인 면들을 살펴보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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