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 찌질 유럽

1492년 이전의 유럽은 참 많이도 미화되어 있습니다. 이는 마치 가난뱅이가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 상황입니다. 이제는 떵떵거리며 잘 살게 되니 그 이전에 못살았던 때가 미화된 것이지요. 1492년 이전의 유럽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유럽보다도 훨씬 암울한 곳이었습니다.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종교적인 모든 면에서 그랬습니다.

정치 군사적으로 유럽은 몽골에 시달리며 큰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몽고의 칭기즈칸이 얼마나 유럽 사람들에게 큰 트라우마를 남겨 줬는지는 여러 정황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최정예 부대들을 격파한 테무진의 군사들은 자국의 상황으로 인하여 자진해서 물러갔고 더는 기댈 곳이 없었던 유럽은 기적적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아랍사람들에 대한 군사적인 실패도 유럽에게는 항상 열등감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요소였습니다. 그 유명한 십자군전쟁을 통해 유럽은 모든 군사력을 총동원하고도 뼈아픈 패배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럽 기독교의 성지이자 무역의 관문인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함락은 십자군과 유럽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깁니다. 군사적인 면에서 몽고, 아랍 등의 동양과 대결해서 번번히 고통을 겪었던 것이지요. 그나마 이베리아 반도에서 에스빠냐가 수백년에 걸친 항쟁을 통해 이슬람 사람들을 몰아낸 것이 자신감을 조금 아니마 회복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기술적인 분야는 더욱 할 말이 많습니다. 이미 앞에서 마야 문명의 과학에서 ‘0’의 개념을 이야기하며 로마숫자와 아라비아 숫자의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에 이르는 십자군 전쟁을 통하여 유럽은 과학기술면에서 미개함을 벗어날 수 있는 단초를 만들게 됩니다. 항해술과 관련하여 기존까지 사용해 오던 사각돛의 한계를 이해하게 되고 처음으로 삼각돛을 아시아로부터 배워오게 됩니다. 삼각돛은 동양에서 이미 10세기 이전부터 사용하였습니다. 반면 사각돛은 많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빠른 방향 전환 불가능, 역풍에서의 사용 불가능과 같은 한계를 가졌죠. 그런데 삼각돛을 사용함으로써 극적인 변화가 생긴 겁니다. 항해 분야에 있어서 가히 게임체인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동양으로부터 삼각돛의 원리를 배워오기 전의 유럽은 인력에 의한 노젖기에 의존였습니다. 순풍이 아닌 경우 아예 출항조차 못 하는 경우도 있었죠. 그런데 삼각돛을 알게 되면서 노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배를 더욱 빠르고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이죠. 노를 질 사람이 필요하지도 않았으며 노를 거치하고 운영할 공간도 필요가 없었습니다. 노를 질 사람들이 먹을 식량 등과 같은 것까지도 다 따져보면 이것이 얼마나 획기적인 변화인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황이 이러니 그 이전의 유럽이라는 곳의 항해 기술이 얼마나 열악한 것이었는지를 쉽게 짐작해 볼 만 합니다. 사실 대항해를 가능하게 한 건 유럽의 개척 정신이니 뭐니 이런 것보다도 동양에서 그들에게 전해준 항해술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이제까지 단 한 개의 돛대를 사용하던 유럽의 선박이 다수의 돛대를 사용하는 방법을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터득하게 됩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돛을 매다는 돛대가 하나인 배와 몇 개인 배의 속도와 조타 능력이 얼마나 차이가 날지는 충분히 짐작이 갈 만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나침반, 해도, 조선 등의 기술을 동양에서 배워옴으로써 그야말로 미개하다는 말이 가능할 정도로 수준 이하이던 유럽의 항해 도구와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한두 가지 더 말해볼까요. 해도와 나침반이 없던 유럽에는 대서양으로 계속 나가면 세상의 끝이 나오고 거기에 큰 괴물이 입을 벌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망망대해에 나가서 해도도 없고 나침반도 없는 상황에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도 없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올 방법 자체를 몰랐습니다. 하늘에 별이나 태양이 뜨는 지점을 보고 방향을 알 수는 있지만 구름이 낀 날은 난감한 일이지요. 그래서 이전까지 유럽 사람들은 육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항해 자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바로 방향을 잃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육지가 보이지 않는 곳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런 미개한 유럽에 다양한 동양의 획기적이고 수준 높은 기술들이 들어오게 된 것이지요. 그야말로 센세이션했습니다.

이렇게 찌질한 유럽의 현실은 음식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동양의 향신료는 당대 유럽의 최고 상품이었습니다. 로마가 이집트를 정복한 이후부터 후추와 계피가 사용되어 상당히 대중적으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1세기 로마의 박물학자인 플리니우스Plinius후추같이 영양도 아무것도 없는 것 때문에 매해 5,000만 세스루티우스의 돈을 유출하고 있다라고 개탄할 정도였습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마른고기 등을 그냥 먹기에는 맛이 없었는데 후추와 같은 식품은 썩은 냄새를 없애 주는 등 약품의 효과와 미약으로써의 기능을 주었던 것입니다. 유럽은 육류 소비가 많았는데 프랑스 지역만 하더라도 1년에 양 20만 마리, 2만 마리를 소비하였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이들이 동양과 무역을 하고 싶은, 동양의 것을 배우고 싶은 욕망이 얼마나 컸을 것이냐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찌질한 유럽이 동양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거둘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1492년 지리상의 발견이라고 하는 사건의 큰 배경이 됩니다.

 
반응형

콘스탄티노플 1492가 되다

이렇게 찌질 찌질한 유럽이 멋진 동양을 한없이 흠모했는데 그 사랑에 방해물이 생겨났습니다. 교통에 필요한 무역로를 이슬람이 점령하게 된 것이죠. 14세기부터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 오스만 제국은 지금의 터키, 헝가리, 폴란드,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집트, 알제리 등의 넓은 지역에 세력을 뻗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동양과 서양의 무역 중심지인 이스탄불이 점령되게 됩니다.

원래 이름이 비잔티움이었는데 이곳은 기원전 512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에게 점령당했다가 이후 로마의 속주가 되어 기원후 330년에 그 유명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도읍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콘스탄티노플이라 명명하게 됩니다. 그 이후로 로마 제국 분열 이후 동로마의 수도가 됨으로써 유럽의 상징적이고 실질적인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동서양을 연결하는 무역의 허브가 됩니다. 그런데 이곳이 오스만 제국에 의하여 위협을 받습니다. 그러자 십자군이 소집되어 유럽이 이곳을 점령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스만 제국은 결국 1453년 이곳을 손에 넣습니다. 유럽 각지에서 모인 최정예 병사들도 이곳을 지키는 데 실패하게 된 것이죠. 결국 이것이 동로마 제국의 멸망이 되는 것입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지금의 이름인 이스탄불로 이름도 바뀝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우리의 찌질 유럽은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렇지만 깊어진 사랑은 어쩔 수가 없었던 겁니다. 즉 다른 방도를 동원해서라도 사랑하는 동양에 가서 향신료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물자도 가져오고 기술도 배워오고 싶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게 바로 1492년 무모한 항해의 직접적 배경이 됩니다.

 
반응형

인류 역사 최고의 사건: 1492

군사, 기술, 경제, 등등의 모든 분야에서 너무나도 찌질해서 동정심 마져 일으키게 하던 유럽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유럽처럼 세계에서 가장 멋있고, 힘센 세상이 된 사건이 바로 1492입니다. 그래서 1776년 아담 스미스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일이 신대륙의 발견이다.’라고 역설하였고 미국의 타임지는 서기 1000년 이래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1위 구텐베르그의 금속 활자 발명을 그리고 2위에 지리상 발견을 꼽았습니다. 역시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1위 에디슨, 2위 꼴론을 꼽았지요. 이것은 유럽이 전 세계의 주도권을 장악한 시발점 즉 서양 중심 세계 구도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소위 대항해 시대가 열리고, 전통적인 신분 제도가 붕괴하기 시작하였으며, 부르조아가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였고, 기술혁신이 시작되는 한편, 식민지 경영을 통해 서양이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되었고, 전쟁과 군대는 탐욕을 채워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서구 문화 중심의 정치, 경제, 사회, 예술, 종교 등의 시발점이 됩니다. 서방이 세상의 패권을 잡고 그 영향력을 우리나라를 포함한 온 세상에 뻗친 시작점이 바로 1492입니다. 우리가 쓰는 달력, 우리가 쓰는 도량형, 도구, 우리의 의복, 교육제도, 학문, 정치체제, 경제 원리, 의술, 문학, 언어. 종교, 음식, 음악, 예술, 과학, 철학 ... 등등등등 입니다.

 
반응형

후추 팔아 부자되고 싶어요

1492년의 원인으로 새로운 팽창에 대한 갈망, 즉 찌질한 유럽을 탈출해서 새로운 세상을 살아보고 싶은 욕망을 지적했습니다. 대항해 시대 이전 유럽은 지중해 중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그런 상태에서 새로운 동양의 기술과 문화 생산품들을 접하면서 유럽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싶은 욕망을 꿈꾸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였지요.

그런데 사실 말이 그렇지 그렇게까지 모든 유럽사람들이 동양의 문물을 접하면서 이것들에 대한 꿈을 꾸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니 그럴 만큼 잘 알지도 못했었지요.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동양으로 가는 길이 막히자 새로운 항로를 통해 동양으로 가는 길을 뚫어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만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것은 바로 후추였습니다. 저는 만일 1492년의 사건을 한 단어로 정리하라고 한다면 “1492는 후추다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후추는 대표적인 향신료로서 이스탄불의 함락과 함께 유럽으로 들어가기 힘들어지게 됩니다. 사실은 못 들어간 것은 아니고 더욱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이에 따라 당시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였던 헤노바(Genova)의 상인들이 동방 루트의 본거지였던 에스빠냐의 세비야나 포르투갈의 리스보아로 모여들어 새로운 무역의 활로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동안 후추로 쏠쏠하게 재미를 보며 중세의 영주나 기사보다도 더 많은 돈을 벌어 인생역전을 하게 된 지중해 연안의 상인들은 상업자본을 형성해 그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들에게 부귀영화를 가져다주었던 무역을 하지 못하게 된 겁니다.

혹시 최초의 은행이 어쩌구 저쩌구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으신가요? 미켈란젤로에게 돈을 주어 성당의 벽화를 그리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하십니까?, 십자군 전쟁의 막바지에 전쟁 승리를 위해 돈을 대던 사람들이 누구였지요? 정답은 모두 이태리의 상인입니다. 즉 그들은 최초의 부르조아 즉 상업자본가의 탄생으로 소위 돈맛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맛을 본 이들에게 동양과의 무역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지요.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지도 않았지요. 그들의 열망은 후추 팔아 부자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반응형

1492년의 사회적인 배경

아무리 이들의 찌질로부터의 탈출 욕망이 컸다 하더라도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가히 엄두를 내기도 힘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가능성을 열어준 사회적인 분위기가 생기게 됩니다. 십자군을 통해 동양의 문물에 접하는 사람이 많게 되면서 신비하고 막연하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동양과의 사회 정신적인 거리가 가까워진 것입니다. 여기에 마르코 폴로(1254-1324)의 동방견문록이 큰 몫을 합니다. 유럽 이외 지역에 대한 인지와 동경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유럽 사회에 동양 사회를 실존,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죠. 동방견문록에 자세하게 쓰여있후추에 관한 이야기가 신분 상승을 노리는 유럽의 상인들에게 구미를 당기게 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요. 사실 동방견문록이 그 당시에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도 따지고 보면 새로운 세계에 대한,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동양에 대한 유럽사람들의 동경과 흠모 그리고 욕망 때문이었습니.

마르코 폴로는 이탈리아 상인으로 베네치아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일단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였던 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점이 범상치 않습니다. 그는 1271년에서부터 129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유럽에서 아시아까지 여행했으며, 17년 동안 중국에 머뭅니다. 그는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여행담을 글로 남기게 되는데 그것이 세계의 묘사(Divisamentdou Monde)라는 책인데 우리는 이것을 흔히동방견문록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책의 상당 부분이 동양에 있는 후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당시의 중요 관심사였던 후추와 동방무역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새로운 무역로 개척의 열망에 불을 지핍니다. 마르코 폴로가 진짜 동양에 가보기나 한 것이냐 아니냐 혹은 그 내용이 맞냐 안 맞냐 여러 가지 논쟁이 있기는 합니다만 어찌 되었건 이 책은 당시 유럽을 뒤흔든 베스트셀러였고 그 내용은 새로운 세계를 열망하던 유럽에게는 큰 사회적 촉매제가 됩니다. 1492년의 사회 문화적인 배경이 된 것이지요.

 
반응형

새로운 무역로를 찾아서

새로운 무역로를 찾아서 제일 먼저 발 빠르게 움직인 사람들이 바로 포르투갈 사람들입니다. 바르똘로메 디아스(Bartolomeu Dias)1488년 희망봉(폭풍의 곶)을 발견하였는데, 부정할 수 없는 그 최고의 동력은 앞에서 구구절절이 이야기한 것처럼 요것입니다.



새로운 인도 항로를 개척하여 무역을 하고 싶어요

 

그렇게 새로운 항로를 통해 동양에 도착하는 가능성을 연 포르투갈은 쾌재를 불렀습니다. 우리가 드디어 동양에 가서 무역을 할 수 있겠다는 희망에 들떠 있었던 거죠. 그런데 이 상황을 수수방관하면 무역의 주도권이 모두 포르투갈에 가게 되니 뭔가 다른 수단을 세워야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 우리가 콜롬버스라고 부르는 꼴론이 하고 등장을 하게 됩니다. 사실 꼴론은 탐험가라기보다는 야심 있는 상인(비단과 향료무역), 또는 무모한 벤처 기업가 혹은 사기꾼이라는 표현이 더 적당한 인물입니다. 아시아까지의 거리가 실제로는 17,000km에 달하는데도 이것을 4,000km 정도로 계산 착오를 하였습니다. 혹은 일부러 거짓 계산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새로운 무역로를 자기가 개척하겠다는 허황한 꿈을 꾼 것이지요. 기술적으로 보면 4,000km 정도가 당시 유럽의 낙후한 배들이 항해 가능한 최대 거리였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계획은 그들의 찌질 탈출의 욕망이 낳은 무모한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반응형

무식해서 용감했다.

꼴론은 17,000km에 달하는 거리를 무식하게도 4,000km로 계산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무식함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그가 1492년에 가져간 배 가운데 가장 큰 배인 산따마리아 호의 길이가 30미터가 채 안 됐습니다. 다른 두 척의 배도 20미터 전후 정도로 추정하고 폭도 7미터 정도로 각 선박의 규모가 200톤 정도 수준입니다. 사실상 이러한 배로 동양에 이르는 항해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동안의 항해에 필요한 식량을 적재할 공간조차 없었습니다. 우연히 풍랑을 만나지 않아 순조롭게 항해한다 해도 오랜 항해 기간을 견디지 못하고 목말라 죽거나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당대 유럽의 선박 건조 기술로는 그 긴 항해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단순히 당시 동양에서 만든 선박과 비교해 봐도 유럽의 배 만드는 기술은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신라 장보고 시대에 만들어진 배의 규모가 꼴론이 사용한 가장 큰 배인 산따마리아 호와 거의 유사합니다. 임진왜란때 사용된 중간 크기의 배인 거북선만 하더라도 산타마리아보다도 큰 배였습니다. 꼴론의 항해가 있기 이전인 1400년대 초에 활약한 정화라고 하는 명나라 탐험가의 배는 길이만 해도 44장으로 우리의 미터법으로 계산했을 때 140미터에 달하며 폭도 56미터 정도로 추정됩니다. 결국 1492년 꼴론의 항해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무식해서 용감했다.

 

이 말이 거칠기는 하지만 이 상황에 가장 적절한 표현일 수밖에 없는 거 같습니다.

 
반응형

꼴론 결국 사건치다

꼴론이 원래 태어난 곳은 이탈리아의 제노바Génova입니다. 그곳이 동서양 무역의 중심지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직물업자인 아버지와 함께 직물이나 포도주 등을 운반하며 뱃사람으로 지중해를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콘스탄티노플을 거점으로 하는 유럽의 지중해무역이 점점 위축되었지요. 또한 그의 배가 해적의 습격을 받아 고생을 하는 과정에서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가기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 와중에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같은 책을 접하면서 서쪽으로 항해하면 동양에 도달하리라는 망상(?)을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483년과 84년을 거치며 포르투갈의 왕 주앙2João II 에게 자신의 계획을 제안합니다. 포르투갈은 당시 희망봉을 발견하고 동양무역의 거점을 마련한 최고의 해상국가로서 그의 계획을 실현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당시 최고의 항해술과 과학을 겸비한 포르투갈에서 이런 허황한 계획을 승인할 리가 없었지요. 굳이 오늘날과 비교한다면 지금 우주선을 타고 안드로메다 성운에 가서 금은보화를 캐서 올 테니 나에게 우주선을 내어 달라는 정도의 무모한 계획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당대의 과학자들이나 항해가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에스빠냐 국왕에게 청원하게 됩니다. 14861월 에스빠냐의 이사벨 여왕을 처음 만나서 자신의 벤처사업이 엄청나게 수익성이 좋은 투자라고 설레발을 치게 됩니다. 포르투갈보다 상대적으로 후발 국가인 에스빠냐로써는 나름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에스빠냐의 모든 과학자와 항해가들이 다 말리고 나섭니다. 계획의 타당성에 대하여 심사를 하고 여기에 꼴론도 참여해서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워낙 말이 안 되는 계획이라 다들 반대를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여왕이 덜컥 허락하게 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뒷말이 무성합니다만, 여왕이 꼴론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는 설이 상당히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자신이 아끼던 금은 보화를 팔아 꼴론의 항해비에 보태기도 했으니 사실 좀 여러 가지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기는 합니다.

하여간 14922월에 항로 개척에 따른 무역 수익의 10%를 꼴론이 가진다는 파격적인 내용의 산따페(Santa Fe)조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그해 833척의 배는 에스빠냐 남서부의 시골 작은 항구인 빨로스(Palos)를 출발합니다. 실로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