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부 밀림속의 피라미드
21세기의 현대는멕시코와 중미의 밀림 속에서 경이로운 마야의 고대도시를 발견하게 된다.
제 26 장
마야의 도시들
이번 장에서는 마야유적지를 멕시코의 경우 각 주(州)별로, 과테말라와 온두라스, 벨리스의 경우는 각 나라별로 구분하여 정리하였다. 개략적인 설명과 함께 가능한한 사진, 지도 등을 첨부하여 현장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본격적으로 각 도시들의 특징들을 보기에 앞서 먼저 마야유적지들을 살펴보는 데에 필요한 주의점과 중요한 사항들을 간단히 알아보자.
마야유적지는 고대 마야가 발전했던 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있다. 멕시코와 과테말라, 벨리스, 온두라스, 엘살바도르의 전 지역에 걸쳐 수천 개의 크고 작은 유적지들이 존재한다. 이 중에 많이 알려져 있는 일부 유적지만이 일반에 개방되어있고 다수가 방치되어있다. 따라서 여기에 소개하고 있는 마야의 도시들은 현재 많이 연구되고 개발되어있는 것의 일부라는 점을 먼저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 앞으로의 연구발전에 따라 새로운 마야도시가 발견되거나 기존 도시들의 기능, 역할 등이 변화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여기에 소개하고 있는 도시들이 고대 마야시대의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고 생각하는 것에도 분명 무리가 있다.
마야의 도시를 이해하는 데에 주의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점으로 도시의 규모를 꼽을 수 있겠다. 실제로 마야의 도시에 가 보거나 지도, 혹은 사진을 접하게 되면 발굴복원작업이 이루어진 곳만이 주로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도시의 규모는 그보다 훨씬 크고 복잡했다는 점을 고려하면서 당시의 모습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서울의 경우에도 유적지로 관리하는 지역만을 가지고 당시 도읍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에는 한계가 많다. 경복궁 바깥쪽에 행정관서 및 생활구역 등이 많았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마야의 경우에는 이 점이 더욱 중요하다. 대부분 마야의 도시들에는 울타리가 없었다. 따라서 특정지역까지 편의에 따라 한계지어 지도로 표시하거나 유적지로 규정하고 있지만 사실 실제 도시는 이보다 훨씬 더 넓은 지역에 걸쳐 분포되어있었다. 마야도시의 광장이나 시장자리에 탐방객들을 위한 주차장, 기념품상가 등의 편의시설이 들어서 있는 것이 예사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여기에 소개하고 있는 지역은 마야도시의 극히 일부분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모습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다는 점을 알고 볼 필요가 있겠다. 오늘날 만나게 되는 마야유적지들의 모습은 당연히 당시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대부분의 지역이 열대성기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종 식물들이 주변에 많이 자라고 당시의 광장이었던 곳에는 잔디가 넓게 깔려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당시의 모습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다. 그래서 당시 유적지의 모습을 좀 더 많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머릿속에서나마 재현해 볼 필요가 있겠다. 지금은 건물벽면이 풍상에 많은 손상을 입어, 건축 내부자재였던 크고 작은 돌들이 노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먼저, 이러한 돌의 표면을 회반죽으로 덮고 이곳에 다양한 색깔이 입혀져 있거나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던 것을 상상해 보자. 도시의 광장도 지금의 잔디가 아니라 흰색포장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던 점 역시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는 데에 필요한 중요한 요소이다. 즉 현재 보이는 초록색의 잔디나 잡초 등의 부분을 여러 가지 색깔로 대치해야 한다. 또한 지금은 무너져버렸거나 도굴되어 없어진 마야문자로 장식된 비석, 건물벽면, 화려한 조각이 촘촘히 들어서 있던 당시 신전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한편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대부분의 마야도시들이 신전지역을 중심으로 복원되어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이곳에서 제사를 준비하거나 향을 피우는 모습이 일 년 내내 끊임없이 있었던 것도 알 수 있다. 제사장들이 여기저기 분주히 돌아다니고 신전 앞에서는 향이 피어나고 있으며 신전지역의 작업장에서는 중요한 공예품등이 만들어지고 있고 한쪽에서는 새로운 건물이나 비석을 세우기 위해 작업을 하는 사람들도 만나게 될 것이다. 또 재수가 좋다면 신성한공놀이장에서 유고(Yugo)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도구를 허리에 차고 연습을 하는 선수 - 이 사람들을 선수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좀 애매하지만 - 도 만나게 될 것이다. 중앙광장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서는 도시의 주변, 혹은 먼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물물교환을 하고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겠다.
이상과 같이 여기서 소개하고 있는 마야의 도시들은 당시에 발전했던 도시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과 그나마 도시도 전체가 아니라 일부 지역에 한정된다는 점을 전제로 당시 모습을 상상 유추해 볼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다양한 요소들을 염두에 두고 상상의 이미지를 만들어 가면서 각 도시들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과 특징적인 요소들을 살펴보자.
멕시코 깜뻬체(Campeche)주
1. 베깐(Bec뇆)
이 유적의 가장 큰 특징은 전고전기 때 건설된 주변을 둘러싼 수로이다. 기원전 100년 ~ 250년경에 건설된 것으로 약 1.9km가량 된다. 그 용도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방어용 해자가 아니었는가 하는 입장이 많다. 그러나 근처의 다른 도시들에서는 이러한 것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즉 주변에 적들이 있었다면 역시 그들도 이러한 성(城) 형태의 구조물들을 만들거나 해자와 같은 방어용 구조물을 가지지 않았겠는가 하는 추정이 가능하고 이렇게 볼 때 베깐의 도시외곽수로를 방어용으로 보기에는 설득력이 약해진다. 더군다나 이 도시가 건축물들을 집중적으로 건설하는 등 발전기를 맞이한 시기는 수로를 건설한 연도와 수백 년의 차이가 있다. 즉 수로가 건설될 당시 이 지역은 주변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을 때였다. 또 한 가지 수로의 성격을 방어용으로 단정 짓기 어려운 점으로 그 깊이를 들 수 있겠다. 가장 넓고 깊은 부분이 5m정도의 깊이와 16m가량의 폭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이보다 깊이와 폭이 적었다. 아직까지도 쉽게 이러한 수로를 방어용으로 국한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여진다. 이 베깐의 수로는 상당히 예외적인 형태로 그 기능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이 유적에서 현재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건축물들은 고전기 후반인 기원후 550년 ~ 830년에 건축되었다.
건물 I과 건물 IV가 가장 규모가 크다. 그 중에서도 건물 IV는 특수한 미로(迷路) 구조를 가지고 있다. 지금은 비록 많은 부분이 손상되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이 건물 안쪽에 창문 하나 없이 거의 폐쇄된 8개의 방이 좁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종교적인 의식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지하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장소가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2. 깔락물(Calakmul)
이 유적지에 대한 연구는 1990년대에 가장 관심을 모은 분야 중의 하나였다. 1990년에 행해진 폴란(William J. Folan)의 연구에서는 근방 30여㎢ 부근지역이 표면 조사를 통해 기록되었으며 여기에서 약 6000개의 건축물이 발견되었다. 중앙신전지역을 중심으로 화려한 마야 아치를 가진 건물들이 모여 있고 그 주변으로 점차 화려한 건축물들이 감소하는 추세를 보인다. 그러나 중앙신전지역 외곽의 부심에서는 중요한 씨족 단위들이 돌로 된 벽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을 중심으로 밀집하여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플레처(Fletcher)와 간(Gann)의 연구에서도 중앙신전지역에 중요한 건축물이 집중되어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부심과 같은 다른 지역도 두드러지게 발달하여 전체적으로 중심과 부심의 중요성이 균형있게 강조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Fletcher, 59~60쪽). 이러한 부심의 발달은 마야인들의 정치, 사회구조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이용된다.
발굴을 하면 할수록, 연구를 하면 할수록 이 곳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결국 이 깔락물이 가지고 있었던 당시의 정치적 위상이 주변의 강력한 중심지였던 빨렝께나 띠깔에 버금간다는 결론이 무리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외형적으로 이 유적지는 다른 어떤 마야의 유적지보다도 그 규모가 크다. 인구 면에서도 이제까지 띠깔(Tikal)이 마야의 도시 중에서는 가장 큰 것으로 생각되어져 왔으나 깔락물에 대한 연구의 결과가 속속 발표되면서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고대마야도시의 인구를 정확히 계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여러 사람들이 각기 다른 방법으로 인구를 계산하고 그 수치도 천차만별이다. 쿨버트(Pat Culbert)와 그의 동료들의 인구계산 방식을 보면, 먼저 그 도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모든 건축물의 수를 센다. 거기에 발견하지 못한 건축물이 존재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10%를 더해주고 같은 시대의 것이 아닐 수 있는 건축물을 감안하여 5%를 빼준다. 또한 16.5%는 주거용 건축물이 아닐 것으로 간주하여 빼준다. 즉 처음에 10%를 더해주고 나서 다시 21.5%를 빼주는 것이다. 이 수치에 최종적으로 5를 곱하여 주는데 이것은 동일한 건축물에 사는 한 가족의 수를 고려한 것이다(Culbert, P.y D., 1990). 이러한 방식으로 한 도시에 살았을 것으로 예상되는 인구를 대략적으로 계산한다. 그런데 이것은 그야말로 대략적인 인구이다. 따라서 이러한 고고학의 연구결과발표를 인용하여 고대도시의 인구를 마치 상당히 정확한 수치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고고학에서 일반적으로 이용되는 계산 방식에 따르면 띠깔에는 120㎢에 걸쳐 58,995명의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그러나 실제로 계산의 정확성이 높은 도시 중앙의 인구는 띠깔의 경우 16㎢에서 13,175명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반면 깔락물은 21.25㎢의 지역에서 4,863개의 건축물들이 계산됨으로써 - 위에 말한 공식대로 - 여기에 5를 곱하여 보면 24,315명이라는 수치가 나온다.1)(각주1_ 네롤의 계산 방식에 따라 변수를 고려하면 26,424명, 고려하지 않으면 28,826명이라는 깔락물의 인구가 나온다(Santley, Robert S., “Demographic archaeology in the Maya Lowlands”, en Culbert).) 여기에서 이 두 지역을 비교해 보기위해 띠깔의 21㎢에 해당하는 인구를 계산해보아도 대략 15,475명이라는 수치가 나온다. 결국 이러한 것들이 완전할 수 없는 계산이라는 점을 전제한다 하더라도 띠깔의 인구는 깔락물에 비하여 30%이상 낮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인구는 깔락물의 중앙 지역에 국한한 계산이다. 따라서 도시 외곽 지역까지 표면 조사가 이루어지면 실제 수치에 더욱 근접한 인구 계산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러한 계산이 건축물의 숫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인구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도시의 밀집이나 발달 정도를 예상하는 요소로도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구와 비례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위상 면에서도 깔락물이라는 도시의 중요성은 현재 이 도시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인지도에 비하여 상당히 높았을 것이라는 점을 예측해 볼 수 있다.
이 도시에서 조각된 비석수는 106개로 현재까지 발견된 다른 어느 마야의 고대 도시에 비하여 그 수가 많다. 대부분의 비석에서 고전기 후반인 기원후 500년에서 850년에 해당하는 마야달력 기록이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당시에 제작된 것이라 여겨진다. 이중에는 신성한공놀이장뿐만 아니라, 건물 II와 같이 마야지역에서 가장 크다고 이야기하는 건물도 있다. 최근 들어서는 이곳에서 발견되는 많은 부장품을 가진 무덤들에 관한 연구가 초점이 되고 있다.
3. 치까나(Chican?
치까나유적지에는 리오 벡양식의 대표적인 특징인 신의 입 모양을 한 건물의 입구가 잘 보전되어 있다. 건물 II에 나타난 “이참나(Itzamn?”라고 일반적으로 명명되는 신의 부조 조각을 보면 건물의 입구가 입에 해당하며, 그 위로 두 눈이 있고 좌우측으로는 갖가지 장식물들이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으로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는 파충류의 이빨, 뱀의 몸통과 입 등 다양한 마야의 상징적인 종교 문양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 지방에서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치까나의 건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신에 의하여 먹히는 것이라고 전해진다. 즉 이 건물에 들어가는 행위는 인간이 신의 세계, 종교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4. 스뿌힐(Xpujil)
베깐과 인접한 이 유적지 역시 고전기 후반에 발달하였다. 우리가 특히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건물군 I에 있는 건물 1이다. 이것들은 다른 지역의 건축물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특징적인 것으로 세 개의 탑 모양을 가진 피라미드가 한 건물에 모여 있는데, 모두 계단과 신전을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신전과 계단이 모두 실용적인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것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인간이 오를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른 계단의 위에 있는 신전은 실제의 실내공간이 없고 마치 모형처럼 건물의 꼭대기를 장식하는데 쓰였다. 결국 이 건물을 만든 사람들은 건물위에 올라가 제사를 지내던 전통적인 방법에서 변화를 주어 계단과 신전을 모형으로만 만들어 놓고 그 대신 건물이 장엄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외형적인 효과만을 강조하였다. 과연 왜 그랬을까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고전기 후반이 되면서 점차 건물자체의 외형이 제사 지내는 기능보다도 종교적인 상징성을 더욱 중요시하게 된다는 점에서 종교적인 의식의 개념이 변해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고전기의 후기에 이르러서는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건물, 그러나 신전에 들어가 제사를 올릴 수 없는 건물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대표적인 예를 이곳 스뿌힐유적지에서 만날 수 있다.
멕시코 치아빠스(Chiapas)주
1. 보남빡(Bonampak)
보남빡이란 유적지는 다른 그 어떤 곳보다 벽화로 유명한 도시로서 기원후 600년에서 800년 사이에 전성기를 맞았다. 마야뿐만 아니라 세계의 고대문명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 벽화는 그 역사적인 가치와 예술작품으로서의 높은 완성도로 인하여 지금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현재 주변에 발달한 도시들이 거의 없이 밀림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어 이곳을 보기 위해서는 밀림을 수 시간씩 걸어야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 물론 그곳을 왕복하는 경비행기가 있기는 하지만 - 인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실상 모든 마야의 유적지에는 대부분 이곳 보남빡과 마찬가지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기후적인 조건과 오랜 시간의 흐름은 이러한 벽화들을 파괴시켜 버렸다. 따라서 그 형태가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된 것은 극히 일부이다.
이 벽화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46년이다. 작은 구릉의 중간에 위치한 세 개의 같은 모양의 입구를 가진 건물에 벽화가 나뉘어 그려져 있다. 수많은 마야의 벽화와 마찬가지로 원색의 화려한 색채감이 돋보인다. 빨간색, 파란색, 녹색의 조화가 특히 다채롭다.
많은 마야의 벽화 중에서 보남빡 벽화만이 거의 원형을 유지한 채 지금까지 남아있을 수 있었던 원인은 지형적인 접근의 어려움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은 1700년대까지도 마야의 마지막 저항 세력들이 주변 지역에 있었기에 식민지 정복의 손길이 늦어진 곳이었다. 또한 열대우림의 기후적인 조건과 빽빽한 밀림이 독립 이후에도 현대화의 영향을 더디게 만들었다. 이러한 이유로 하여 다른 마야지역에 비하여 사람들의 발길이 적었고 상대적으로 최근에 들어 우리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만일 이곳이 좀 더 문명의 중심지에 가까웠다면 오늘날과 같은 벽화의 모습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식민지시대에는 정복자들이 이러한 벽화를 우상 숭배의 상징물로 여겨 파괴했을 것이고, 그 이후의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19~20세기의 그야말로 발견되는 모든 문화재가 전부 외국으로 반출되던 시대를 온전히 견디어냈을 가능성은 적다. 부분 부분이 잘려 한쪽은 유럽의 모 박물관에 다른 한 쪽은 미국의 모 박물관에 가 있을 신세가 되었을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다. 그러고 보면 앞서 말한 보남빡의 그러한 지형적인 위치가 어쩌면 큰 행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2. 빨렝께(Palenque)
빨렝께는 현재 전 세계의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고 있는 마야유적지 중의 하나로 멕시코 독립이 있었던 19세기 이전부터 세간의 관심 대상이 되어왔다. 최초로 이 지역이 서방세계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식민지시대의 에스빠냐 사람들에 의해서이다. 1746년 이 유적지 근방에 있던 마을의 한 신부가 밀림 속에 있는 돌로 만들어진 집들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정부에게 조사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보고는 40여 년 후인 1785년에 가서야 최초로 조사원을 파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1786년 안또니오 델 리오(Antonio del R뭥)라는 에스빠냐의 군인 장교가 이곳에 머물며 조사를 하고 이곳은 유까딴에 있는 다른 유적들과 마찬가지로 에스빠냐 사람들이 들어오기 이전의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1832년에는 진 프레드릭(Jean Fr럅럕ic)이라는 사람이 66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찾아와 6개월간을 머물며 유적의 중요한 건물들의 그림을 그렸으며 그의 그림은 이후 브라셔(Brasseur de Bourbourg)라고 하는 마야 학자의 손을 거쳐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빨렝께의 최고 전성기는 기원후 600년 ~ 800년이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이 도시국가 형태를 갖추고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원년을 지나면서부터로 추정된다. 그리고 고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다양한 건축물과 예술품들이 만들어진다. 이곳의 예술적인 감각은 다른 지역과는 많은 차이를 보여 미술과 건축양식으로 볼 때 독자적인 빨렝께양식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주변의 산악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건축물들을 설계하고 배치하였다. 그 중에서도 빨라시오라고 말하는 건물은 대칭과 비대칭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관측소라고 불리는 높은 탑은 기능과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이곳에서 발견된 다량의 조각품들은 기술적인 면에서도 높은 완성도를 보인다. 또 다른 특징으로 모든 학계뿐만 아니라 일반의 지대한 관심을 모으게 한 피라미드 안에서 발견된 최고지도자의 무덤을 들 수 있다. 빠깔(Pakal)이라고 불리는 이 최고지도자의 무덤은 멕시코의 고고학자 알베르또 루스(Alberto Ruz)에 의하여 마야문자의 신전 아래 있는 비밀 통로가 개봉되면서 1952년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의 무덤이 알려지면서 오늘날까지도 여러 가지 역사, 고고학적인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관을 덮고 있는 커다란 돌 뚜껑에 부조가 새겨져 있는데 이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였다. 우주인이 비행기를 몰고 있는 장면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곧 이러한 추측은 빨렝께의 최고지도자인 빠깔은 외계인이고 이 도시 역시 그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하는 생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관뚜껑에 있는 문양과 문자의 대부분이 이해되었으며 그가 이 곳의 최고지도자 중의 한사람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는 의문은 그의 생존기간이다. 미국 측에서는 마야문자의 기록에 근거하여 69년(기원후 615년 ~ 683년)을 살았다고 말하는 반면, 멕시코 측에서는 형질인류학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그의 생존기간이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신성한 달력과 맞춰지기 위하여 마야문자를 통한 기록에서 조작된 것이라는 반론을 펴고 있다. 어찌되었거나 그가 7세기경에 살았으며 이 도시 대부분의 건물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등 그의 아들 참박룸(Chambakrum)과 함께 많은 공헌을 한 것만은 사실이다. 이 밖에도 빨렝께의 십자가 신전 등에 조각되어있는 많은 부조와 문자들은 이 지역뿐만 아니라 전체 마야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3. 또니나(Tonin?
해발고도 900미터의 오꼬싱고(Ocosingo)고원에 위치해있다. 고전기 후반에 발전하였던 도시로 대략 기원후 600년 ~ 900년경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다른 유적지와 마찬가지로 전고전기때부터 일정한 도시구조를 이루었다. 건축물의 특징으로 자갈을 건축재료로 쓴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건물을 만드는데 일정한 규격이 엄격하게 적용된 것이 아니라 도시의 주변 환경에 따라 융통성과 다양성이 고려된 것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자연적인 구릉을 이용하여 그것의 기초위에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따라서 이 유적지에는 큰 산과 같은 피라미드가 여러 개의 단(Terraza)을 이루어 형성되어 있다.
4. 약실란(Yaxchil뇆)
고전기 후반에 발전한 마야 최대 유적지 중 하나다. 마야문명이 발전하였던 지역의 중앙부를 관통하는 우수마씬따강(R뭥 Usumacinta)을 끼고 있어서 내륙 수상교통의 중심지로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발길이 미치기 어려운 열대의 밀림 한가운데 위치해 있어 상대적으로 다른 유적지에 비하여 그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따라서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이 유적지를 중심으로 하여 조각들에 새겨진 마야문자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연구를 토대로 약실란 역사의 상당부분에 종합적인 해석이 가능하였다. 현재까지 마야문자 연구에 의하여 밝혀진 이 유적지의 연대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 726~742년: “방패재규어(Escudo Jaguar)”가 최고지도자로 통치하였다.
◎ 742~752년: “방패재규어”의 부인에 의한 수렴청정(垂簾聽政)이 이루어졌다.
◎ 752~770년: “새(鳥)재규어(Pajaro Jaguar)”의 통치기간 - 많은 건축물들을 만들었다. 또한 자신들의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은 수의 기념비에 기록하였다.
◎ 770~810년: “방패재규어”의 직계후손이 통치하였으며 그 이후로 더 이상 문자 기록을 하지 않았다.
멕시코 낀따나루(Quintana Roo)주
1. 꼬바(Cob?
최근 들어 마야의 유적지들에 대한 연구가 다양한 방식으로 폭넓게 진행됨에 따라 지표조사가 확대되는 한편, 건물들에 대한 발굴복원이 가속화되면서 각 도시의 규모를 포함한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된다. 이 꼬바유적지 역시 이러한 새로운 면모가 속속 드러나는 곳 중의 하나이다. 이 고대 도시가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이전까지만 하여도 이곳은 항간에 그다지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으나 점차 주변지역에 대한 지표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그 규모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광범위하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6500여개 정도의 건물과 유구(遺構)2)(각주2_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이다.)가 현재까지 보고되었으며 그 중에 노호츠 물(Nohoch Mul)이라는 피라미드는 높이가 42m나 된다. 한편 이 도시를 중심으로 주변도시와 연결되는 도로망이 200km에 달한다는 것도 특이할 만한 점이다. 이 도로는 삭베(Sacbe)라고 불리는 길로써 상업과 종교, 그리고 정치적인 모든 기능을 다 가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최초의 도시 건축가들은 기원후 100년 ~ 250년 사이에 도시형태를 만들고 건축을 시작하였다. 전성기는 기원후 600년 ~ 900년 사이였던 것으로 보이며, 잠시의 공백기간을 거쳐 기원후 900년 ~ 1200년간 걸쳐 또 다른 부흥기가 있었다.
2. 산 헤르바시오(San Gervasio)
멕시코 유까딴반도의 동부해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현재는 관광의 중심지가 된 꼬수멜(Cozumel) 섬에는 마야의 크고 작은 도시가 30여 개 정도 있다. 그 중에서도 산 헤르바시오가 가장 규모가 크다. 이곳은 후고전기의 유적지로서 에스빠냐 사람들이 침략해 올 당시 꼬수멜(Cozumel) 섬의 중심지였다. 익스첼(Ixchel)이라 불리던 달의 여신을 주신으로 모셨고, 기원후 800년부터 도시의 형태를 일부 갖추어 나가기 시작하였으며 최대의 융성기는 15세기이다.
3. 뚤룸(Tulum)
멕시코정부에서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고 보존 관리하고 있는 천여 개가 넘는 고대유적지 중에서 방문하는 관광객의 수가 가장 많은 유적지이다. 물론 세계적인 휴양지인 깐꾼(Canc쐍)이라는 곳에서 가깝다는(131km) 지리적인 이점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유적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하여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카리브해의 아름다운 물 색깔과 어울려 해변절벽에 우뚝 솟은 천년고도인 이곳 뚤룸은 그야말로 자연과 고대유적의 조화가 절묘함을 이루는 곳이다. 에스빠냐의 침략자들도 이곳 앞바다를 지나가면서 경탄을 아끼지 않았다. 최초로 유까딴반도를 돌아보게 된 유럽인 중의 한 사람인 에스빠냐의 정복자 그리할바의 기록에 이곳 뚤룸에 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하루 낮밤을 이 해안을 따라 항해하여 다음날 새벽 무렵에 먼발치에 있는 큰 마을을 발견하게 되었다. 마을의 규모는 거의 세빌야보다 크거나 비슷해 보였다. 높은 탑도 보인다. 해안가를 따라 많은 원주민들이 양손에 깃발을 들고 올렸다 내렸다 하며 우리들의 배를 인도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선장인 그리할바는 상륙하기를 꺼려하였다(Morley, 116쪽).3)(각주3_ Corrimos el d뭓 y la noche por esta costa, y al d뭓 siguiente, cerca de ponerse el sol, vimos muy lejos un pueblo o aldea tan grande, que la ciudad de Sevila no podr뭓 parecer mayor ni mejor; y se ve뭓 en 럏 una torre muy grande. Por la costa andaban muchos indios con dos banderas que alzaban y bajaban, haci럑donos se뻕l de que nos acerc뇋emos; pero el capitan [Grijalva] no quiso. Este d뭓 llegamos hasta una playa que estaba junto a una torre, la m뇋 alta que hab뭓mos visto... Descubrimos una entrada ancha rodeada de maderos hecha por pescadores.)
발전 시기는 상대적으로 늦다. 기원후 1200년경에 도시구조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하여 에스빠냐 사람들의 침략과 함께 멸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대영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출처가 명확치 않은 비석이 원래 이 유적지에 있었던 것이라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곳은 이미 고전기때부터 상당한 규모를 가지고 있는 도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가장 큰 신전인 엘 까스띨요(El Castillo)에는 한 인물이 거꾸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상이 있는데 몸은 땅을 향해 거꾸로 내려오고 있는 형상을 가지지만 얼굴은 쳐들어서 정면을 보고 있다. 이 인물을 보통, 금성의 신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또한 여기서는 비록 보존 상태가 좋지 않지만 벽화가 발견되었으며 도시 주변을 둘러싼 담장도 특징적이다. 바다를 끼고 있는 점이라던가 주변에 선착장이 발견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해상교통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던 도시였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멕시코 따바스꼬(Tabasco)주
1. 꼬말깔꼬(Comalcalco)
꼬말깔꼬의 중요한 특징으로 제일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이 건축에 벽돌을 이용하였다는 점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마야건축 중에 벽돌을 이용한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주변환경이 다른 지역과는 달라 충분한 양의 돌을 주변에서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위한 자연적인 대안으로 독특한 벽돌 건축을 하였다. 예술적인 기교나 장식 면에서는 직선거리로 150여 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는 빨렝께와의 상호 영향이 깊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 유적지가 처음으로 학계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보고된 것은 1925년 프랑스 브롬(Frans Blom)이라는 사람에 의해서이다. 1966년에는 - 보고서는 1967년에 발간된다 - 조지 엔드류스(George F. Andrews)에 의하여 처음으로 지표 조사가 이루어져 111개의 건물과 유구가 보고 되어졌다(Andrews, 1967).
1972년에는 뽄씨아노 살라살 오르떼곤(Ponciano Salazar Orteg뾫)과 루르데스 마르띠네스 구스만(Lourdez Mart뭤ez Guzm뇆)에 의하여 282개에 달하는 건축물들이 6.750㎢의 지역에서 조사 기록되어졌다(Mart뭤ez, 1973).
멕시코 유까딴(Yucat뇆)주
1. 치첸이차(Chich럑 Itz?
7~12세기에 걸쳐 - 중간에 침체기간이 10세기를 전후하여 있기는 하였지만 - 꾸준히 발전하였다.
전에만 하여도 치첸이차를 구(舊)치첸과 신(新)치첸으로 나누었다. 이렇게 나눈 배경은 7~10세기의 기간에는 전형적인 마야양식이 발전하였고, 10~12세기의 기간에는 똘떼까(Tolteca)족의 침입으로 모든 것이 똘떼까양식으로 바뀌었다는 가설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러한 학설이 근거 없다는 것이 다양한 연구를 통하여 입증되었다. 따라서 신치첸과 구치첸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방식은 이미 사용하고 있지 않다. 똘떼까족이 세웠다고 하는 뚤라(Tula)라고 하는 멕시코 수도 북쪽에 자리한 유적지에서는 이곳 치첸이차와 비슷한 예술, 건축양식을 많이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들로는 착몰(Chac Mol)이라고 하는 제단, 기둥을 많이 이용한 건축양식, 쏨빵뜰리(Tzompantli)라고 하는 연속된 해골 장식, 뱀을 형상화한 기둥 등을 들 수 있다. 사실상 뚤라와 이곳 치첸이차를 비교해보면 유사한 점이 많이 발견된다. 더욱이 고대 메시까 전설중의 하나인 퀘잘꼬아뜰(Quetzalc뾞tl)의 전설이 이 두 유적지의 연관성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뚤라를 떠난 퀘잘꼬아뜰이 동쪽 바다를 향해 갔다는 전설이 뚤라에 있으며, 치첸이차에는 꾸꿀깐(Kukulcan)이라는 신이 서쪽에서부터 배를 타고 왔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란다의 사료에도 이 도시의 가장 중요한 건축물 중의 하나인 엘 까스띨요(El Castillo)가 이 꾸꿀깐을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이러한 정황들이 맞아 치첸이차를 마치 뚤라의 유민들이 만든 국가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뚤라의 영향이었다고 하는 많은 미술양식들이 뚤라의 건립 이전부터 이곳에서 유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마야인의 설화에 나오는 전설의 도시 뚤란(Tulan), 똘란(Tolan), 혹은 뚤라(Tula)4)(각주4_ 사료에 따라 알파벳 표기가 다르다.) 가 멕시코 고원에 위치한 현재의 뚤라가 아니라 치첸이차라는 도시이거나 혹은 전설상의 이상적인 가공의 장소라는 역사적인 해석이 더욱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점들로 볼 때 치첸이차의 후고전기 문화가 멕시코 고원지방, 더 정확히 말해 뚤라의 군사적인 지배나 정치적인 통치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기존의 역사 해석은 재고되고 있다. 그러나 상호간의 지대한 영향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과 건축에서 보여주는 상호 유사성은 두 장소의 깊은 인연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을 굳이 정복이나 우열의 관계로 보기는 힘들다.
이 유적지에서 눈길을 끄는 장소로 쎄노떼(Cenote: 자연적인 지하 연못의 일종)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란다(Diego de Landa)는 이곳에서 많은 제물들을 신에게 받쳤다고 적고 있다. 그 중에는 물론 인간도 포함되었으며 특히 어린 처녀들이 많았다. 사료의 내용을 직접 들어보면: “가뭄이 들면 이 연못에서는 신을 위하여 산 사람을 그대로 연못에 던져버리는 인신공양 행사가 벌어졌는데 그렇게 제물이 된 사람들은 비록 다시 볼 수는 없지만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믿었다. 또한 귀중한 물건을 비롯해서 각종 보석류에 이르기까지 다른 많은 물건들도 연못에 바쳤다(Landa).” 인신공양의 형태는 수십 가지에 달하며 그 중의 하나가 산 사람을 이렇게 연못에 빠뜨리는 것이었다. 19세기 초 미국의 카네기재단의 지원을 받은 고고학자들이 이곳을 파내어 많은 뼈와(두개골 50여 개) 유물들을 건져 올렸으며 그 당시에 사용하였던 발굴도구들이 아직도 유적지 입구의 한쪽에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이곳의 공놀이장은 길이가 166m, 폭이 66m에 이른다. 현재까지 메소아메리카에서 발견된 공놀이장 중 제일 규모가 크다. 양쪽 벽면이 부조로 장식되어 있고, 끝 부분은 닫힌 형태이며 공놀이에 사용하였던 고리가 양쪽 벽면 윗부분에 배치되어 있다.
2. 찌빌짤뚠(Dzibilchalt쐍)
멕시코 유까딴(Yucat뇆)주의 주도인 메리다에서 12km가량 북쪽에 위치한 이 유적지는 오랜 역사적 전통을 자랑한다. 기원전 600년 정도부터 이미 사람들이 도시의 형태를 이루고 살았으며 전고전기 말기인 기원전 50년경에 융성기를 가졌다. 그 이후로 상당기간 특별한 변화가 없다가, 기원후 600년에서 1000년 사이의 기간에 다시 한번 고전기의 융성을 보여준다. 고전기에는 유까딴의 마야지역에 소금을 보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이 시기의 인구는 이만오천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기원후 1000년을 전후로 급속히 인구가 줄고 더 이상 새로운 건축물을 만들지 않는다. 그러다가 1200년을 바라보며 조금씩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비록 많지는 않지만 일정한 규모이상의 인구를 유지한다. 에스빠냐의 정복과 함께 정복자들은 고대의 건축물들을 이용하여 교회를 세웠고 이곳은 새로운 식민 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이곳에서도 비록 규모는 크지 않지만, 고대유적과 식민지시대의 건축이 나란히 공존하거나 피라미드위에 건축된 식민지 건축물들을 볼 수 있다. 고대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2600여년의 장고한 기간동안 다양한 역사, 문화, 정치, 사회의 양상을 보여주며 꾸준히 쇠퇴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3. 까바(Kab뇀)
욱스말(Uxmal), 랍나(Labn?와 함께 뿌욱(Puuc)건축양식의 대표적인 유적지 중의 하나이다. 뿌욱양식이 가지는 특징 중에 가장 화려하고도 대표적인 것이 꼬즈-뽑(Codz-Pop)이라 불리는, 벽면을 입체적으로 가득 채우는 착(Chac)이라고 하는 비의 신 장식이다. 보통 30여 개 정도의 돌로 이루어진 하나의 착 상이 건물전체에 300여 개나 장식되어 있다. 불쑥 솟은 코와 푹 들어간 눈, 귀걸이가 항상 빠지지 않는 귀 등이 돋보이는 이 착의 장식이 건물전체를 반복적으로 덮고 있는 모습은 장관을 이룬다. 이러한 장식들이 건물의 입구와 같은 기능을 가진 부분과도 잘 조화를 이루어 “ㄱ”자 형태를 가진 메부리 코가 건물 입구의 계단이 되기도 한다.
4. 롤뚠(Lolt쐍)
이 유적은 도시가 아니라 동굴이다. 이 동굴에는 구석기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많은 벽화와 함께 다양한 시대의 인간이 살았던 흔적 등이 있으며 고전기 때에는 물을 얻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또한 근대에 들어서는 유까딴 농민반란의 마지막 항거지로 이용되는 등 세파의 소용돌이를 그대로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장소이다. 따라서 동굴 안에는 원시사회의 벽화에서부터 마야의 유물뿐만 아니라 19세기 전투의 흔적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문화유산이 열대 동굴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5. 마야빤(Mayap뇆)
이 유적지의 이름에서 마야문명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유적지는 설화에 의하면 기원후 1250년경에 꾸꿀깐(Kukulc뇆)이라는 신에 의하여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불과 200여 년 만에 멸망하게 되는데 그것이 1450년의 일이다. 결국 에스빠냐 사람들이 침공을 해오기 80여 년 전에 이미 이 도시의 인구는 급격히 줄어들었던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치첸이차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꼬꼼(Cocom)집안의 후낙 첼(Hunac Ceel)의 후손들에 의하여 이곳이 통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우(Xi?집안의 공격에 의하여 결국 종말을 맞았는데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그때까지도 자신들을 마야빤의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마야라고 불렀다. 대부분의 이곳 건축물들은 치첸이차의 것과 흡사하여 마치 치첸이차의 축소판을 보는 듯하다. 주변을 둘러싼 성벽도 이곳의 주요 특징 중 하나다.
6. 욱스말(Uxmal)
주변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뿌욱(Puuc)양식이 돋보이는 곳이다. 그 규모 면에서 유까딴반도에서 손꼽히는 중요한 도시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시기적으로는 기원후 600년에서 1000년 사이에 가장 융성하였다. 욱스말과 까바유적지는 18km에 달하는 삭베(Sacbe)라고 하는 교통로로 연결되어있었다. 마법사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건축물은 많은 전설을 간직한 만큼이나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35m나 되는 타원형의 기단(Base)부위는 근처의 다른 유적지와 대조를 이룰 정도로 그 규모가 돋보인다.
마법사의 피라미드, 빨라시오(Palacio del Gobernador)와 저택(Cuadr 뇆gulo de las monjas)들이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특히 이곳 욱스말 유적을 둘러보다 보면 장식적인 마야 뿌욱양식에 자연히 눈길이 가게 된다. 또한 건물 윗부분의 장식인 끄레스떼리아(Crester뭓)문양에서 마야인의 독특한 건축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욱스말 유적 중에서 가장 많이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 곳은 마법사의 피라미드이다. 다섯 차례에 걸쳐 재건축이 이루어져 지금의 모습을 하고있는 이 피라미드는 이곳 원주민들에게 구전으로 이어지는 오래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19세기의 신부였던 에스따니스라오 까릴요(Estanislao Carillo)라고 하는 사람이 듣고 적은 이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서 남동쪽으로 22km떨어진 까바(Kab뇀)라고 하는 곳에 한 늙은 여자 마법사와 그 손자인 난쟁이 마법사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린 손자는 할머니 마법사가 아궁이 곁을 떠나지 않고 그곳을 열심히 지키는 것에 대해 항시 궁금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어느 날 손자는 꾀를 내어 할머니의 물동이에 구멍을 내고 할머니가 물을 뜨러 갔다 오는 사이 아궁이에 숨겨진 것을 찾아내게 되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뚠꿀(Tunkul)과 쏘옷(Soot)이라고 하는 북과 나팔이었다. 그래서 이 손자는 그것을 두들기고 불어 봤는데, 그 소리가 천지 사방에 메아리쳐서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가 있었다. 마침, 당시 욱스말의 최고지도자는 그들의 전설에 이 나팔을 부는 사람이 장차 최고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터라 욱스말과 까바를 연결하는 도로를 놓고 그 난쟁이 마법사를 모셔 와서 최고지도자가 되기 위한 시험을 하기에 이르렀다. 여러 가지 시험과 음모를 잘 넘긴 난쟁이 마법사가 드디어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금의 마법사의 피라미드를 단 하루 만에 지었다고 하는 내용이 이 전설의 골자이다.
벨리스(Belice)
1. 알뚠 하(Alt쐍 H?
이 유적지는 기원후 300년 ~ 900년 사이에 최대 융성기를 맞이하였다. 다른 지역에서도 나타나는 건물 덧 씌우기 기법이 이곳에서도 많이 이용되었다. 초록색 무덤의 신전(Templo de la Tumba Verde)이라 불리는 건물 A-1은 최소한 7번 이상의 덧 씌우기가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이런 덧 씌우기 기법은 전통적인 메소아메리카 건물들의 특징인데 이미 전고전기 시대 이전부터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유적지에 있는 무덤에서는 상당량의 고급 부장품들이 발견되었다. 캐나다 온타리오 로얄 박물관(Ontario Royal Museum)의 지원하에 1964년부터 1971년까지 발굴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
2. 라마나이(Lamanai)
누에보 강(R뭥 Nuevo)옆에 위치한 유적지로 6㎢의 면적에 718개의 건축물들이 보고 되었다. 전고전기 후반과 고전기 초반에 가장 융성한 문화를 꽃피웠다. 일부 건물은 30여 미터의 높이를 가지고 있다. 이 도시는 현재 일반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건물이 지어졌던 당시에는 주변지역의 행정과 종교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었다. 전고전기에 지은 건물들치고는 상당히 화려하고 그 규모도 크다. 정복 이후 에스빠냐 사람들이 이곳에 교회를 지었으나 1644년을 기점으로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버려졌다. 원주민들은 이곳을 조상의 혼이 있는 곳이라고 믿어 아직까지도 죽은 사람의 시체를 부장품과 함께 여기에 묻는 풍습이 남아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부장품들이 마야 정복 이전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오래된 그들의 생활 전통이 바뀌지 않고 꾸준히 내려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3. 수난뚜니츠(Xunantunich)
과테말라와 벨리스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유적지이다. 3개의 광장 주변에 만들어진 20여 개의 건물들이 도시의 중심을 이룬다. 자연적인 구릉을 잘 다듬어서 그 위에 건물들을 세운 것이 이 유적지의 중요한 건축적인 특징이다. 건물군 주변으로 많은 수의 비석과 조각품들이 발견되었다. 1959년 에반 멕키(Evan Mackie)는 건물의 일부분이 고전기 당시에 있었던 지진에 의하여 무너진 흔적을 발견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과테말라(Guatemala)
1. 엘 미라도르(El Mirador)
전고전기 말기에 융성한 유적지다. 전고전기 당시에는 주변지역에서 행정과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던 큰 도시였으나 기원후 150년을 전후하여 점차 쇠퇴하였다. 면적은 16㎢에 달하지만 아직까지 발굴복원 작업이 이루어진 곳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2. 끼리구아(Quirigu?
온두라스만(Golfo de Honduras)으로 나있는 모따구아 강(R뭥 Motagua)은 중부 마야지역의 생활 터전이 되는 중요한 수상교통로 중 하나였고 이 강을 중심으로 펼쳐진 모따구아 평원지역은 이러한 지리적인 이점을 발판으로 전고전기 때부터 마야 사람들이 터전을 이루고 살던 지역 중의 하나였다. 그 중에서 현재까지 많은 유물이 발견되는 비중있는 유적지로 끼리구아를 꼽을 수 있다. 마야문자로 쓰인 이곳의 역사 기록에 의하면 끼리구아는 이웃 꼬빤과 경쟁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후 738년, 끼리구아의 최고지도자인 “하늘천둥(Cauac Cielo)”이 꼬빤의 최고지도자인 “18토끼(18 Conejo)”에게 잡혔던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이곳에서는 높이가 11m에 이르는 마야의 비석 중에 가장 규모가 큰 것이 발견되었다. 기원후 771년이라는 날짜가 새겨져 있는 비석 E(Estela E)가 그것인데 과테말라의 지폐에도 이 비석의 모습이 새겨질 정도로 규모뿐만 아니라 정교한 조각이나 균형미가 돋보이는 유물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3. 띠깔(Tikal)
현재까지 조사된 마야의 가장 큰 고대 도시 중의 하나이다. 고전기 후반기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 시기에는 120㎢의 지역에 약 5만 명의 상주인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조사된 것만으로도 3000여개의 크고 작은 건물과 유구들이 보고 되어지고 있다. 최초로 이곳에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900년경이며, 기원후 900년을 전후하여 급작스런 의문의 몰락을 하였다. 200여개에 달하는 비석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29번 비석은 기원후 292년이란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역사적인 연대를 표기한 마야의 달력 연대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히고 있다. 건물 IV는 기원후 741년에 공사를 시작해 10년 후인 751년에 끝났는데 높이가 70m에 이른다. 열대우림 지역의 무성한 숲 위로 우뚝 솟아있어 이 신전의 위에 올라 주변을 바라보면 마치 초록색 나뭇잎사귀로 만들어진 구름 위에 떠 있는 것과 같은 장관을 볼 수 있다.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교(Pensilvania University)에서 1956년부터 발굴복원 작업을 시작하였으며, 1970년에 들어서는 과테말라의 학자들이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다른 유적지와 마찬가지로 꾸준히 발굴과 복원,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주변의 뻬뗀지역(Zona Pet럑)과 함께 현대화의 물결이 미치지 못한 지역이 많아 열대우림의 자연경관과 원주민의 삶이 잘 조화되어 나타나는 대표적인 곳이기도 하다.
4. 우악샥뚠(Uaxact쐍)
우악샥뚠이라는 말은 마야어로 8개의 돌이라는 뜻이다. 띠깔에서 30km정도 남쪽으로 떨어져 있다. 띠깔이나 우악샥뚠으로 대표되는 뻬뗀지역의 유적지 중에 상대적으로 일찍 그 전성기를 맞은 도시이다. 이곳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마야 긴달력의 날짜는 기원후 889년이다. 1926년부터 1937년에 걸쳐 미국 카네기재단(Carnegie Institute)에 의하여 대대적인 발굴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
온두라스(Honduras)
1. 꼬빤(Cop뇆)
이 고대의 도시가 스티븐스(Stephens)와 카터우드(Caterwood)라고 하는 영국의 탐험가에 의하여 서양 사람들에게 최초로 소개된 것이 1841년의 일이다. 그러나 1885년에야 비로소 세상에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온두라스의 꼬빤 평원에 위치해 있으며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도시중앙과 여러 곳의 부심구조를 가지고 발전하였다. 주변지역에서 3500여 개의 건물과 유구들이 발견되었으며 전성기 때에는 약 2만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많은 수의 조각과 비석도 발견되었다. 마야문자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는 곳인데 특히 그 중에서도 1250개의 마야문자로 이루어진 72개의 계단이 유명하다. 이 계단은 “조개(貝)연기(煙氣)”라는 최고지도자 시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역사 기록에 의하면 이곳의 마지막 최고지도자는 “새벽의 빛(Primer Amanecer: Yax Pac)”으로서 기원후 763년 자리에 올라 820년경에 그의 시대가 끝났다. 그 이후로는 급격한 인구의 하락을 보이며 어떠한 건축물이나 조각, 비석 등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1980년 이후 윌리암 산더스(William Sanders)가 지휘하는 발굴단에 의하여 대규모의 발굴복원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현재는 그 연구의 성과로 도시중앙뿐만 아니라 외곽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주는 자료들이 많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마야의 도시들을 이야기할 때 “처음으로 발견되었다”는 표현을 하지 않고, 꼬빤을 설명했던 부분에서처럼 “서양 사람들에게 소개되었다”는 표현을 하였다. 도대체 무엇이 다른 것인가? 마야의 원주민들에게 고대유적의 존재는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농사를 짓기 위해 가는 길목에 피라미드의 토대가 있었고, 심지어는 유적의 위나 주변에 소나 말을 방목하고 직접 농사를 짓는 경우도 허다하다. 워낙 많은 유적들을 정부에서 일일이 다 조사하기도 힘들고 보존 관리하기란 더더욱 힘든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대부분 우연한 기회에 서양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고나면 이후 새로운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말로 흥미진진하게 포장되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필자가 마야 공부를 하였다는 것을 아는 주변사람들이 가끔씩 해외화보에 나왔다며 새로운 유적에 대한 정보를 주곤 하는데 조사해보면 결국 기존에 보고된 것이 발굴 작업에 들어가면서 새롭게 발견된 것인 양 보도되었던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것이 과장과 포장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마야문명의 유적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식의 화제거리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원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새로운 발견일 수 없다. 다만 새롭게 재조명된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따라서 다른 서적에서는 “발견”되었다는 표현을 그야말로 많이 “발견”하게 될 테지만 이 책에서는 이러한 용어의 사용에 필자의 고집(?)이 들어가 있음을 밝힌다. 따지고 보면 신대륙의 발견이라는 말도 결국 이러한 맥락과 그 배경을 같이한다. 그래서 필자는 유럽과 아메리카의 만남, 혹은 서양의 마야 정복이라는 말을 굳이 사용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