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3114년 8월 13일
기원전 3114년 8월 13일에 마야의 역사가 시작된다.
제 6 장
마야역사의 시대구분
아메리카대륙의 인류 조상들이 베링 해협을 건너온 후 각 지역에 흩어져 살기 시작하면서 차츰 일정한 문화적 기반이 만들어진다. 여기서는 이런 문화발전의 흐름을 시대별로 구분해 보려한다. 그런데 문화발전의 형태가 동서양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까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서양식 문화발전 단계를 이곳의 연구에 억지로 맞출 수 없다는 점에 제일 먼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특히 그 중에서도 석기, 청동기, 철기로 이어지는 일반적 역사 발전 단계에 관한 모델은 아메리카대륙의 고대사에 비판이나 수정 없이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 청동기와 철기의 문명단계를 거치지 않은 돌도구 이용의 단계에서 과학적, 문화적 수준이 이에 뒤지지 않는 독특한 발전 형태로 아메리카대륙의 고대문명들에서 나타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문명”이라는 말을 정의하고 구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이것을 내용적인 면에서 파악하여 기술적인 발전과 연결시키는 방법이 있는데 이것은 문명을 직선적으로 발전, 누적되어 무한하게 진보하는 것의 총체로 보는 시각이다. 한편 외형적인 규모를 중시하여 국가보다는 크지만 전체 인류가 살아가는 세계보다는 작은 덩어리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굳이 이러한 학술적인 접근을 나열하지 않아도 통상적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문명이라는 단어는 학술적인 정의와 비슷하게 내용적인 측면과 그 규모의 양면에서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 즉 큰 규모를 가지고 기술적인 발전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단위, 혹은 이러한 단위가 만든 총체적인 양상과 결과물이라는 대략적인 정의가 가능할 것이다. 한편 이러한 점이 어떻게 독창적으로 만들어졌는가 하는 점 역시 중요시 된다. 그래서 보통 이집트 문명이니, 마야문명이니 하는 말을 사용할 때는 그 내용의 독창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문명은 기술의 축적과정을 거쳐 일정한 형태의 규모를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문명과의 연관관계가 거의 없이 만들어진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볼 때 마야문명 역시 다른 유럽이나 아시아 문명의 영향 없이 독창적으로 인간들의 사회 활동을 통해 집단적으로 기술을 발전시켜 축적하면서 정치경제, 사회문화의 단위들을 구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은 것이 바로 그 독창성의 문제이다. 과연 마야문명은 다른 문명의 영향 없이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인가?
지금까지의 어떤 과학적인 연구에서도 아메리카 고대문명이 구대륙과의 연관이나 영향하에서 생겨났다고 하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결국 아메리카대륙의 문명은 완전히 독자적인 문명인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인종의 기원은 아시아 계통이다. 그러나 몽골리안 계통의 사람들이 아메리카대륙으로 건너온 시기에는 그 어떤 인류도 발달된 문명을 이루지 못하였다. 따라서 메소아메리카와 아시아의 연관관계는 형질인류학적인 점(신체적인 동일성) 이외에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신체적인 동일성에는 정서적인 면까지 포함하고 있다. 소위 같은 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삶을 살아가는 근본적인 접근방식의 동일성 등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정서적인 동일성이 그 문화의 모든 부분에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이것은 한 부모 밑에서 자란 두 형제의 자손들이 교분 없이 한쪽은 미국에서 몇 수 십대를 살았고 다른 한쪽은 한국에서 그만큼 살았다고 할 때 이 두 형제의 자손들의 삶의 모습이 비슷한 부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그 양편의 자손이 비록 문화적으로 같은 점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민족적인 동일성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양쪽 사람이 다 농사를 관장하는 수호신을 믿는다고 한다면 이는 같은 인종이기 때문에 가지는 공통점으로 보기보다는 - 물론 그런 면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 - 농경을 중심으로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었던 특징으로 미루어 볼 때 모든 인류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징으로 보는 것이 좀더 타당할 것이다. 동굴이나 높은 산 등을 숭상하고 제사를 지내는 풍습 역시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감이 있었을 것이고 이는 같은 몽골리안 계통으로서의 마야와 한민족의 공통점이기보다는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민족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내향적인 정서, 한(恨)의 문화 등은 아메리카대륙의 고대문화와 상당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실제로 한국과 마야, 혹은 다른 아메리카대륙 원주민들의 전통이나 문화간의 정서적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이들과 같이 생활해보면 많이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한민족 문화와 마야문화에 나타나는 유사한 점들을 이해하는 데에는 같은 인간이라는 점에서 나타나는 공통점과 인종적인 동일성으로 인해 나타나는 공통점을 구분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한계를 규정하기는 힘든 일이다. 그러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일방적으로 한편의 입장에서 문화적인 공통점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점들을 보다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일 역시 향후 학술적인 과제 중의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문명의 발전단계를 도구의 사용에 따라 구석기와 신석기 그리고 청동기와 철기시대로 구분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학교의 정규교과서에 그렇게 쓰여 있고 이를 읽고 공부하는 학생들은 이러한 시대의 구분이 마치 인류 문명 발전의 일반적인 과정이라고도 생각하기 쉽다. 즉 모든 인간 사회는 돌을 주 도구로 사용하였던 석기 시대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하여 청동기를 알게 되고 이후에는 철기를 사용함으로써 점차로 발전해 나간다고 여겨진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많은 인류 문명의 형성과 발달 과정에 나타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 사회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한 것은 아니다. 일정부분 비슷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위에 말한 바와 같은 서양문명의 발전 단계로서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는 인류의 문명들이 많다. 그 중의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이 책에서 살펴보고 있는 마야를 비롯한 고대 아메리카의 문명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여기에 먼저 언급하는 것은 아메리카대륙의 역사를 보는 데에 있어서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역사 발전의 틀로 바라봄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오해를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더욱이 역사 발전에 따른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변화 양상이라는 더욱 세분화된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더 많은 차이점이 있고, 이는 아메리카 고대문화를 근본적으로 잘못 이해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따라서 아메리카대륙의 인류 역사를 정리함에 있어서 이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다른 기준을 가지고 시대를 구분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 단계를 구분해야 하는가? 우리나라와 같이 구석기와 신석기시대 이후 정치적인 면을 중심으로 왕조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삼국시대, 남북조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등으로 나누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주체의 변화는 마야의 경우 중요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상의 변화를 제공하지 못하였다. 즉 역사상 별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이에 대하여는 마야의 정치를 설명하는 곳에서 더욱 자세히 다루겠다. 다만 이곳에서는 왕이니, 왕조니 하는 요소들이 마야사회에서 그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변화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마야의 특수성을 이해하고 넘어가는 정도로 충분하겠다.) 그러므로 이와는 다른 더욱 의미 있는 중대한 사건이나 사회 변화 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기준을 정해야 할 것이며, 이를 가지고 시대적 발전 단계를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위에 설명한 것과 같이 정착 생활을 시작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있어 서양의 석기, 청동기, 혹은 철기의 발견에 따른 사회의 변화에 못지않게 중요한 변화를 가져다준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이 바로 마야의 시대구분을 하는 기준점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서양 문화 발전단계의 일부와 마야적인 독특한 변화양상을 중심으로 구석기, 신석기, 전고전기, 고전기, 후고전기로 구분해 보고 그 변화의 양상과 특징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시대구분이 가능한 이유 등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아메리카대륙에서 일어난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이어지는 변화는 많은 부분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서양의 변화 양상과 비슷하다. 구석기시대와 신석기 농업혁명을 거치면서 집단생활과 사회가 형성되었던 점 등은 이곳 아메리카대륙에서도 그 형태가 유사하다. 그러나 본격적인 문명의 융성단계, 그리고 그 이후의 사회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야기하는 석기와 청동기, 철기로 이어지는 발전단계 모델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동서양의 경우 석기와 청동기, 그리고 철기로 이어지는 문명의 발전에 따른 분명한 사회적인 변화와 이에 수반되는 기술의 진보가 나름대로 평행하게 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마야를 포함한 아메리카대륙의 고대문명들은 유럽과의 만남 이전까지 도구의 발달 면에서 본다면 돌도구 이용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도구이외의 사회나 과학기술의 발전에서는 동서양의 철기 시대보다도 더욱 앞서 가는 부분이 많다. 이러한 점을 무시하고 단순히 아메리카의 고대문명은 석기 시대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카문명을 동서양과 비교하여 원시적인 문명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기원후 1400년대의 마야문명이 돌도구를 사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과학기술이 - 물론 부분적인 차이점이 많다는 전제하에 - 당시의 어떤 구대륙과 비교하여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 또한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게다가 원주민들의 문화를 저급한 것으로 치부하려는 식민사관에 의하여 이들의 고대 문화가 의도적으로 평가 절하되는 데에 이러한 역사 발전의 단계에 대한 고정인식이 이들을 미개한 원시인으로 여기게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사용되었고, 이러한 시각이 아직까지도 일부 남아 있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잘못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하여 마야 사람들의 문화적인 특성을 살린 일반적 아메리카 역사 구분단계에 준하여 마야의 시대구분을 구석기와 신석기로 나누고 그 이후 시대를 전고전기와 고전기 그리고 후고전기로 나누겠다. 상대적인 이해를 돕기 위하여 굳이 비교를 하자면 마야의 전고전기, 고전기, 후고전기는 동서양의 청동기 이후의 문화적인 발전단계와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가늠할 만하다.
구석기와 신석기의 구분은 농업의 시작이라는 가히 혁명이라 말할 수 있을 만한 사건을 통해서 구분되는데 농업의 시작과 더불어 일어난 인류 사회의 변화는 단순히 도구의 질적인 면에서의 변화만이 아니라 도자기의 사용, 정착생활의 시작 등 실로 의미 있는 인류발전의 전기를 만든다. 이러한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의 전환을 통해 농업의 발전, 도구의 개량, 기술의 향상 등 문명발전의 기본 틀을 꾸준히 준비해오던 아메리카대륙 원주민들은 신석기시대를 마감하고 전고전기를 맞이하는 초기단계의 도시국가를 기원전 2000년을 지나면서 이루어낸다.
신석기에서 전고전기로의 전환은 국가 형태의 출발과 더불어 일어나는 일련의 문명화 단계의 시작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찾아 볼 수 있다. 전고전기에는 씨족국가들이 그 모습을 갖추어 정치 체제가 정립되며, 각 지방간의 상호 교류가 활발해지고, 대단위의 건축과 다양한 예술 활동이 이루어진다. 또한 종교가 틀을 갖춤으로써 갖가지 제례의식이 정비되는 한편, 기술과 과학지식 역시 괄목할만한 성장을 한다. 최초의 문자들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마야와 더불어 이때의 대표적인 문화는 메소아메리카에서는 올메까(Olmeca), 안데스문명에서는 차빈(Chav뭤)을 들 수 있겠다. 신석기를 마감하고 전고전기로 전환되는 시기는 대략 기원전 2000년경으로 볼 수 있는데 이 때에 씨족국가 체제가 만들어지고 다양한 생활의 변화가 본격화되어 위의 각종 문화 현상들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고전기이다.
최초로 국가 형태의 틀을 완성한 전고전기가 기원후 300년을 전후하여 서서히 쇠퇴하고 본격적으로 아메리카대륙 문명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고전기가 도래한다. 고전기에는 가히 아메리카대륙문화 최대의 융성기라고도 말할 수 있을 만큼 화려한 문화를 꽃피운다. 대단위 건축물들이 밀림의 한가운데 빼곡히 들어서 도시를 형성하고 천문학과 수학 등 다채로운 과학이 절정을 이루는 한편, 문자가 발전하여 축적된 지식들을 기록하는 출판사업도 눈부시게 융성한다. 고전기에는 마야지역 이외에도 아메리카대륙의 중요한 문명의 발상지와 그 주변에서 문화를 꽃피웠는데 그 중에서도 멕시코 고원지방의 떼오띠우아깐(Teotihuacan)과 안데스의 띠아우아나꼬(Tiahuanaco, Tiwanaku)가 두드러진다. 마야 역시 고전기를 맞이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과학기술 등 문화의 전반적인 면에서 최고의 융성기를 맞이한다. 이때 이후의 문화들 중에는 고전기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거나, 기술적으로 더 떨어지는 것들마저 있다. 이렇게 발전했던 고전기문화는 지역에 따라 기원후 700년 이후부터 1000년 사이의 급격한 의문의 몰락과 더불어 마감된다. 그리고 이러한 급격한 몰락의 이유를 밝히려는 학자들의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아메리카 고대문명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의문이라 할 수 있는 고전기의 급작스런 몰락 이후에 생겨난 것이 후고전기이다. 이 시기는 고전기의 화려함에 미치지 못하는 요소가 있지만 고전기 이후의 공백을 깨고 과거의 전통을 계승한 나름대로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다. 고전기의 몰락 이후 여러 군소 부족공동체들이 발전과 침체를 거듭하다가 13, 14세기를 전후하여 많은 지역에서 새롭게 정치, 경제, 사회, 건축 등의 활동이 왕성해진다. 마야 외부 지역에서도 역시 이러한 현상은 비슷하게 일어나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잉까(Inca)와 메시까(Mexica)가 이때에 탄생한다. 그러나 이 문명의 전신들은 이미 그 훨씬 이전인 기원후 900여 년 때부터 시작되었다. 따라서 후고전기의 시작을 기원후 900년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한편 후고전기의 마지막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콜럼버스라는 이름으로 더욱 잘 알려진 끄리스또발 꼴론(Cristobal Col뾫)에 의한 아메리카대륙과 유럽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졌다. 유럽 사람들의 침공으로 아메리카대륙이 서양인들에 의하여 군사적인 정복을 당하고 식민지화가 시작되면서 마야를 포함한 아메리카대륙의 고대문명은 내면적인 흐름은 그대로 살아 있지만 외적으로는 그 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따라서 유럽침공이 시작된 상징적인 연도인 1492년을 후고전기의 마지막이자 아메리카 고대문명의 공식적인 종식 연도로 삼는다.
이제까지 대략의 특징들을 들어 마야문명의 시대적인 구분을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구분은 학자에 따라 용어나 시대, 설정 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1) (각주1_ 고전기의 시작을 우리가 앞으로 배우게 될 마야 긴달력의 8.0.0.0.0 인 기원후 41년으로 보거나 8.14.0.0.0 인 317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제 21장 마야달력」 부분 참조).)또한 전고전기나 고전기, 후고전기도 각각 초기, 중기, 후기 등으로 보다 세분화된 시대 구분을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는 각 지방에 따라 그리고 각 유적지에 따라 개별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개괄적인 시각으로 마야문명의 시대구분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 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각각의 특징과 내용들을 다음 장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아메리카 대륙의 시대구분.
●구석기시대(Paleol뭪ico): 아메리카대륙 인류의 기원 ~ 기원전 7000년
●신석기시대(Neol뭪ico): 기원전 7000년 ~ 기원전 2000년
●전고전기(Precl뇋ico): 기원전 2000년 ~ 기원후 300년
●고전기(Cl뇋ico): 기원후 300년 ~ 기원후 900년
●후고전기(Poscl뇋ico): 기원후 900년 ~ 기원후 1492년
제 7 장
구석기시대
(~기원전 7000년 )
인류의 조상들이 아메리카대륙의 각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차츰 일정한 문화적 기반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최초 인류의 삶의 형태는 어느 다른 인류문명의 발전 형태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렵과 채집이라는 말은 어느 나라의 역사책에나 그 첫 장에 쓰여 있는 인류 조상들의 삶의 방식이었다. 마야 사람들 역시 수렵과 채집생활을 하며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을 하였다. 큰 의미에서 본다면 이때의 인간들은 동물과 비교하여 그렇게 큰 차이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적당한 표현일 것이다. 배가 고프면 과일을 따서 먹거나 동물을 잡아먹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생존의 방법이었다. 그렇게 자연적인 방법으로 사는 사람들의 단계를 가리켜서 말 그대로 수렵과 채집 단계라 말한다. 사실상 인간이 지구상에 살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한 시기가 요즘 같이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살았던 문명시기보다 훨씬 길다.
인간이 소위 말하는 문명을 이루고 산 시기는 인류 전체의 역사를 통해 볼 때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아직까지 인류가 어떻게 진화되었으며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갈라져 나왔고 오늘날과 같은 인간의 모습을 언제 가지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또한 종교적인 면에서 거론되는 창조설 등 실로 다양한 인류의 발생과 변화에 따른 학술적인 논의가 그칠 줄 모르고 제기되고 있다. 현재 논란의 수준으로 볼 때는 단정적으로 어떤 것이 옳다고 말하기 힘든 단계이다. 그러나 근자에 들어 유전자적인 조사에 근거하여 인류 최초의 조상은 500만~60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민꼬리원숭이(African apes)로부터 독립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춘 인간으로 진화해 나갔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굳이 인류의 기원을 이때로 보지 않고 더욱 늦추어 잡아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의 출현시기라고 생각되는 300만년전, 또는 더 양보하여 현생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인 호모사피언스가 활동하였던 중기 홍적세말과 후기 홍적세(약 1만 5000년~20만 년 전)기간부터 인간의 기원을 따진다 하여도 우리가 동물과 다른 문화적인 양상을 보인 시기는 길게 잡아도 불과 1만년이 되기 힘들다. 이렇게 볼 때 사실 인류가 동물과 다르다고 굳이 강조할 수 있었던 시기 역시 극히 제한적이다. 그 이전까지는 말이나 영양보다도 더 느리고 호랑이보다 힘도 약하고 새처럼 날지도 못하며 거북이처럼 튼튼한 천연갑옷도 없는 아주 연약한 동물(?)이었던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 당시만 해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문화라고 하는 것 자체가 존재하였다고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인간은 동물에 가까운 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당시의 인간은 이미 간단한 도구들을 사용할 줄 알았다. 그리고 이러한 도구의 발명은 인간이 해낸 가장 위대한 업적이 되었다.
기술을 사용하여 도구를 만들어 썼다는 의미에서 호모하빌리스(Homo habilis: habilis는 손재주가 있다는 뜻)라고 불렸던 멸종한 것으로 보이는 초기 인류가 150~200만 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에 나타난 현생 인류의 조상들은 도구를 더욱 향상시켜 오늘날의 현대적인 발전된 문명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그런데 인간만이 도구를 사용한다는 생각은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꼭 맞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외의 동물들도 조잡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도구를 사용한다. 새들이 각종 나뭇가지 등을 날라다 둥지를 만드는 것도 일종의 도구의 사용이며 특히 지능이 높은 원숭이 등과 같은 동물들은 나뭇가지나 돌뿐만 아니라 뼈 등 자연의 많은 재료를 이용하여 상당한 수준의 작업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주제를 검증하기 위해 웨스터가드와 수오미는 동물원의 카푸친 원숭이를 연구했다(Westerguard and Suomi, 1994). 그들은 카푸친 원숭이가 뼈를 도구로 사용하고 변형시키는 행위를 실험했다. 즉 한 무리의 카푸친 원숭이에게 뼈와 돌을 넣어주자 그 중 한 카푸친 원숭이가 돌을 들어 뼈의 일부를 일정한 크기로 쪼갠 다음, 다시 이를 찌르개로 이용하여 시럽이 봉합되어 있는 통에 조그만 구멍을 내어 시럽을 먹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이와 비슷한 행동이 우리에게 보통 피그미 침팬지로 알려진 보노보(bonobo)에게서도 발견되고 있다. 동물원에 있는 보노보의 연구를 보면, 보노보가 돌도구를 제작하는데 있어 얼마의 크기로 어떤 모습의 돌도구를 만들 것인가를 스스로 디자인하고 실행하는 모습이 관찰되었다(Haviland, 1996).2) (각주2_ 유태용, http://www.culturepower.com/cp/cal/body_cal4.htm)이와 같이 인류의 가장 큰 발명이요, 위대성이라고 알려진 도구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그렇게 특출나게 우리들의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우리 인류가 도구를 좀 더 다양하게 그리고 빠르게 진화시킨 것만은 사실이다. 즉 인류의 위대함은 도구의 “사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구의 “효과적인 사용”에 있다고 하는 표현이 보다 적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인류가 만들어낸 첫 발명품은 무엇이겠는가? 자연적으로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이나 나뭇가지 등이 최초의 도구로 이용되었을 것이라는 상상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나뭇가지와 같은 식물재료들은 금방 썩어서 없어지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그 흔적이 남아있기 힘들다. 반면 돌은 오래된 것이라도 쉽게 없어지지 않아 아직까지도 당시에 사용하였던 돌중에 우리가 직접 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역사 교과서를 통해서 마치 돌도구들이 당시에 사용하였던 주된 도구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책에 그렇게 쓰여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밖의 다른 도구에 대한 언급이 적다보니 - 그 증거를 오늘날 만나보기 어렵기 때문에 - 그렇게 오해를 하게 되는 것이다. 나뭇가지와 같은 식물성도구들도 돌도구 만큼이나 많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특히 돌은 무겁고 다루기 어려워 사용하기 힘든 반면, 식물성도구들은 그 용이함으로 나무가 많은 지역에서는 여러 면에서 돌보다 더 많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다만 오늘날의 우리가 당시에 사용되었다고 확인할 수 있는 도구들은 그 보존의 문제로 하여 거의가 돌도구인 것이다. 사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지구상의 많은 돌들 하나하나도 수많은 인류가 살면서 한번쯤은 누군가에 의하여 사용된 유물들일 수 있다. 수 십, 수 백, 수 천 만년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땅을 거쳐 갔는가를 생각해보면 더욱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돌들은 특별한 단서가 있기 전에는 이것이 언제 누구에 의하여 어떻게 쓰여 졌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가 오늘날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유물들은 수렵채집을 하는 인류에 의하여 특별한 기능을 위해 다듬어진 돌들이다. 도망가는 토끼를 잡기 위해 던져졌던 돌 또한 인류조상의 유물이다. 만일 과학문명이 더욱 발달한다면 이 돌을 통해서 원시 인류가 가진 근력(筋力)의 정도, 이에 맞은 동물의 종류와 상태 등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단순히 거리에 놓인 돌 하나도 역사적인 도구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돌은 오늘날 우리들이 알아보기 힘들다. 당연히 그 돌에서는 지금으로부터 2만 년 전의 인간이 토끼를 잡았다라고 하는 것을 추정해 낼만한 단서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생각해볼 때 실질적으로 옛날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정보의 원천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그 당시의 사람은 토끼의 가죽을 벗기기 위해 무언가 필요했고 생각 끝에 돌로 돌을 내리쳐서 날카롭게 잘려진 날을 만들고 그것으로 토끼의 가죽을 벗겼을 것이다. 그렇게 해보니 토끼의 가죽을 벗기는 일이 훨씬 쉬웠고 그들의 동료나 자식들에게도 그렇게 돌을 잘라서 토끼의 가죽을 벗기는 것이 훨씬 용이하다는 것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들이나 손자에 이르러서는 돌을 어떤 모양이 나게 잘랐더니 토끼의 가죽을 벗기는 것이 더욱 쉬었다 하는 소위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로 인해 경험의 축척이 기술의 발달로 이어진다. 이런 식으로 인류가 사용하는 최초의 도구들은 하나 둘씩 발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만 하여도 먹고 남은 음식물을 장기간 보관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또한 계절에 따른 기온의 변화로 주거지를 옮겨 다니며 살았을 가능성이 높아 마을과 같은 형태는 훨씬 이후에 나타났다. 이 때만 하여도 주로 동굴 등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당시에 가능하였던 인류의 기술이나 도구가 너무나도 원시적이라서 그때에는 참 비참하고 힘들게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상대적인 가치로 보았을 때 가능할 수 있겠지만 절대적인 면에서 보면 꼭 그렇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다. 리모콘이 없었을 때 일일이 손으로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려 바꾸던 시대가 있었다. 그때에는 불편해서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당시의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큰 불편을 느끼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냉장고가 없던 시대에도 우리의 조상들이 여름에 다 상한 음식만 먹고 살았던 것은 아니며 핸드폰이 없던 시대에도 약속하고, 만나고, 장사하고 할 것은 다 잘하고 살아왔다. 앞으로 수 년 혹은 수십 년 후에 살게 될 사람들은 “야 2000년대 초만 해도 컴퓨터에 자판이라는 걸로 글자를 일일이 입력했단다. 글쎄 자동차라는 날지도 못하는 쇠붙이를 타고 다녀서 교통체증이라는 것도 있었다는데! 얼마나 힘들게 살았을까?”하고 생각하게 될 날이 분명 올 것이다. 기술의 발달에 따라 과거의 삶을 마치 상상할 수 없는 불편하고 힘들었던, 더 나아가 불합리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오늘날 우리의 모습처럼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그때의 기술수준이나 삶의 방식이 그야말로 그런대로 살아갈 만 했다는 점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새롭게 인지가 발달하고 서서히 수준 높은 돌도구들이 만들어지면서 도자기도 출현 하지만 이것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농사를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즉 신석기시대이후에 가서야 도자기와 같은 도구의 다양화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아메리카대륙에 도착한 마야인의 조상들은 조금씩 문명을 형성하기 위한 발전을 착실하게 준비해 나간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시대를 가리켜 석기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또한 이때에는 문자를 통해서 무언가를 기록하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이때를 역사를 기록하기 이전의 단계라는 뜻을 가지는 선사시대(先史時代)라고도 한다.
이러한 시대가 아메리카대륙에서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 가장 큰 원인으로는 기원전 1만 년에서 7000년까지 이어지는 급격한 자연 환경의 변화를 꼽을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아메리카대륙에서만 나타났던 현상이 아니라 지구전체에 걸쳐 점진적이지만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는 대사건이었다. 빙하기가 서서히 끝나가면서 지구의 온도가 상승하고, 빙하는 녹고, 해수면이 상승 하는 수천 년에 걸친 아주 느린, 그렇지만 큰 환경의 변화가 뒤따르게 된다. 이제까지 아메리카대륙에 살고 있었던 말, 순록, 매머드, 영양, 코끼리, 낙타 등과 같은 동물들이 이 때를 전후하여 모두 멸종하는 한편, 아마존정글이 형성되는 등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아메리카대륙의 자연환경이 이 시기에 만들어지게 된다.3) (각주3_ 이러한 변화의 원인에 관하여는 태양 광선의 강도변화, 우주 기체권의 변화, 지각의 변동, 지구대기권의 흡입 방출 체계의 변화, 대륙 단면 흐름의 변화 등의 가설이 있다.)
급격한 환경의 변화에 따라 말은 완전히 멸종하여 아메리카대륙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리고 유럽인이 아메리카대륙을 식민지화 시키는 과정에서 이곳의 원주민들에게 처음 알려지게 된다. 서부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북미의 수렵 인디언들이 말을 달리며 갖은 묘기를 부리고 활을 쏘는 등과 같은 모습을 통해 마치 말이 원래부터 이곳 원주민들의 생활에 이용되었던 동물로 보여 질 수 있다. 그러나 식민지시대에도 이곳 원주민들이 말을 타는 것은 금지되어 있어서 인디오들이 본격적으로 말을 이용하게 된 것은 아메리카대륙이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시기인 18, 19세기에 들어서이다. 아메리카대륙을 침략한 에스빠냐 군사들이 타고 온 말을 보고 이곳 사람들은 처음으로 보는 크고 빠른 신기한 동물에 두려움을 가졌다. 또한 사람이 말에 타고 있는 것을 보고 이를 마치 괴물로 생각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래서 아메리카 문명의 정복사에서 말이라는 동물이 차지하는 역할은 실로 지대하다. 중요한 전투에서 대포와 더불어 원주민들의 기세를 제압하는 데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전술적 용도로 그 진가가 발휘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기원전 7000년경에 살았던 말들이 아메리카대륙에 그대로 생존하여 유럽에서 건너온 말들과 대항할 수 있었다면 고대문명의 정복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을 여담으로 즐기는 원주민들에게서 역사의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인간 생활의 모습을 바꾸어 놓게 된다. 이때의 중요한 변화로는 식물 채집의 본격화와 정교한 돌도구의 제작, 그리고 초기 단계이기는 하지만 농사의 시작이다. 또한 더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이 가축을 기르기 시작한 것도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중에서도 새롭게 찌르개(Punta de lanza, Proyectil, Point)4)(각주4_ 창이나 화살 등의 앞에 붙이는 돌도구와 그와 유사한 형태와 기능을 가진 것을 일반적으로 찌르개라고 하는데,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양쪽 면이 전부 정교하게 가공된다. 따라서 단면을 사용하는 도구보다는 제작에 있어서 좀 더 높은 수준의 기술이 요구된다.)를 제작할 줄 알게 되었던 것과 기타 다른 돌도구들의 제작기술이 좀 더 고급화되는 것 또한 고고학적으로 볼 때 기술의 발전을 의미하는 큰 사건이다. 따라서 대략적으로 이 같은 일련의 변화를 기준으로 기원전 7000년 이전을 구석기시대(Paleol뭪ico), 그리고 그 이후를 신석기시대(Neol뭪ico)로 나누고 있다.
인류의 조상들이 남긴 유물들을 잘 보존해야 한다는 의식이 인간의 생활수준 향상과 더불어 더욱 힘을 얻어가고 있다. 새로 발견된 유적지가 도시개발과 연관되어 이것을 보존하느냐 아니면 지역 주민의 이익을 위해 개발되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들도 점차 중요한 사회적 쟁점이 되고 있다. 마야를 포함한 아메리카대륙에서도 고대 유물, 유적들과 관련한 이러한 문제들이 계속해서 대두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유물, 유적의 보존과 관련된 문제를 생각할 때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점 중의 하나로 지구상의 모든 것들이 유물이라는 점을 지적해 보자. 유물과 유적의 일반적인 규정에는 시간적인 문제와 공간적인 문제가 따른다. 먼저 시간적인 면에서 보면 과연 보존해야 할 유물을 어느 시기 이전의 것으로 하느냐는 판단의 문제가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이 사용하였던 칼이라고 한다면 일반적으로 이것을 우리는 유물로 생각하는 데에 별 반론이 없을 것이다. 동학농민운동 때의 것도 그렇게 받아들여지기 쉽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때의 총은 어떤가? 아니면 광주민주화항쟁 때의 것은? 더 나아가 미국과 이라크 전쟁 군인들이 사용했던 총을 유물이라고 해야 하는가에 이르고 보면 시기적으로 어느 한 시점을 정해놓고 이것 이전의 것은 유물이요, 그 이후의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하기 힘들게 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아메리카대륙의 경우 식민지시대를 겪으면서 고대의 유적지에 가톨릭 성당을 만들었으며 이러다보니 많은 성당들이 고대 피라미드 위에 지어지기도 하였다. 그래서 수백년 된 성당 건축물 아래에서 고대 유적이 발견되는 경우도 많다. 마야의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찌빌짤뚠(Dzibilchalt쐍)이라는 유적의 중앙에는 식민지시대에 세워졌던 성당이 있다. 성당을 부수고 마야도시를 복원하느냐 마느냐 하는 논란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조선총독부 건물을 없애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와 유사한 것이다. 결국 이 도시의 경우는 식민지시대의 성당을 그대로 놔둔 채 다른 부분만을 마야시대의 것으로 복원해 놓은 상태다. 이러한 점들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때 유물이다 아니다를 판단하는 시간적인 문제가 그리 단순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
공간적인 문제 역시 이와 비슷한 점이 있다. 우리가 밟고 있는 모든 땅은 이전의 어떤 누군가가 밟고 지나갔던 곳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것을 대부분 모르고 있을 뿐이다. 굳이 지질학적인 연구를 위해서 그것을 보존해야 한다는 점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공간은 이전의 수많은 인류가 살았던 공동의 생활공간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유적지가 단순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경복궁이나 몽촌토성(夢村土城)에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경복궁 앞의 광화문 세종로는 육조 관아가 있었던 곳이고 현재 멕시코 유까딴주의 주도인 메리다(M럕ida)는 토(T'ho)라는 마야의 도시가 있었던 곳이다. 우리가 밟고 다니는 거리가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모두 중요한 유적인 것이다. 즉 공간적으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유적으로 한계지어야 하는가 역시 쉬운 문제가 아니다. 결국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유물 혹은 유적으로 보전하느냐 아니면 개발하느냐는 오늘날 우리들의 가치 판단의 문제이지 절대적으로 이것은 유물이요 저것은 아니다, 또는 이 지역은 유적지고 저곳은 아니다 라는 엄밀한 학술적인 규정을 하기는 힘들다.
구석기시대 인간의 정주 흔적들은 과테말라의 뻬뗀(Pet럑) 지역, 멕시코 치아빠스주(Estado de Chiapas)의 떼오삐스까(Teopisca)와 아구아까뗑고(Aguacatengo), 떼끼스끼악(Tequixquiac), 발세낄요(Valsequillo), 뜰라빠꼬야(Tlapacoya) 니카라과에서는 엘 보스께(El Bosque) 그리고 벨리스(Belice)의 리치먼드 힐(Richmand Hill)등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이 당시의 사람들은 찍개(Tajador, Chopper, Chopping tool), 긁개(Raspador, Scraper) 등과 같은 조악한 돌도구들을 사용하였으며 찌르개를 사용할 줄 몰랐고 양면의 날을 가진 돌도구도 사용할 줄 몰랐다. 돌도구를 갈아서 쓴 흔적도 나타나지 않는다. 즉 단순히 가격에 의하여 어느 정도의 모양을 가진 돌들을 간단한 도구로 사용하였다.
제 8 장
신석기시대
( 기원전 7000년 ~ 기원전 2000년 )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것이 농사의 시작이다라는 말은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다. 아니 더욱 엄밀하게 말한다면 농경의 시작 시점에서부터 우리는 편의상 신석기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사실상 아메리카대륙에서 농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으며 본격화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에 대한 연구가 멕시코의 오아하까주(州) 떼우아깐(Tehuacan)에서 많이 진행되었다. 여기에서 발견된 일부 작물들은 기원전 8000년까지도 추정이 가능하였다. 그리고 비록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옥수수 등의 재배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약 7000년 전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아메리카대륙에서 가장 중요한 식용 작물인 옥수수가 최초로 재배되는 한편, 다른 작물들의 재배도 이루어지기 시작한 이 때를 신석기시대의 시작으로 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 시기는 농사의 개념을 이제 겨우 알게 된 시기로 농사와 이에 수반된 정착 생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훨씬 이후로 보는 견해도 있다. 따라서 기원전 5000년이나 혹은 기원전 3000년 전을 신석기시대의 시작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는 점을 밝혀 둔다. 이러한 논란은 과연 어떤 시기를 본격적인 생활의 변화가 이루어진 시기로 보느냐 하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회의 변화는 어떠한 경우에도 오늘날과 같이 그렇게 급속도로 진행될 수 없다는 점을 충분히 짐작해 볼 만하다. 따라서 농경 정착 생활의 보편화에 따르는 사회의 대단위 변화가 특정한 어떤 한 시점에 일어났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기원전 7000년에 갑자기 농사의 개념을 알았다고도 말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점진적으로 일어났다. 따라서 농경정착 생활에 따르는 사회의 변화가 보다 구체화된 시기는 기원전 7000년 훨씬 이후의 일이라고 볼 수 있지만 명확히 어떤 한 시점으로 고정시키기는 힘들다. 그래서 최초의 농경이 이루어진 흔적이 발견되는 시기인 기원전 7000년을 신석기시대의 시작점으로 삼는 것이 가능하다. 생활의 변화가 이전보다는 더욱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또한 그때를 기준으로 아메리카대륙의 자연환경이 빙하기를 끝내고 안정되면서 비록 초기형태이기는 하지만 농경을 통한 정착 거주지들이 만들어지게 되어 이에 따른 사회의 변화가 시작되었다.5) (각주5_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농사의 시작이 훨씬 이전이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들이 차츰 나오고 있다.)
농사의 시작이라는 것이 시대를 구분하는 요소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았는데 그렇다면 과연 그것이 당시의 사회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렇게도 중요시 되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농경의 시작은 단순히 식생활의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히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의 삶의 방식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필연적으로 정착 생활을 하게 되고 이제까지의 이동, 수렵, 채집 생활과는 전혀 다른 음식물의 보관과 이에 따르는 도자기의 제작과 이용, 공동체 사회의 형성, 사회의 분화 등 집단 주거 환경과 이에 수반되는 생활의 총체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에 발맞추어 돌도구의 발전도 두드러지는 등 사회의 모습이 구조적인 변화를 하는 계기가 마련되기 때문에 농사의 시작이라고 하는 사건이 인류의 시대구분에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여러 가지 변화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이 돌도구 제작 방식에 있어서의 다양한 시도이다. 신석기문화는 멕시코의 떼스빤(Tepexpan), 브라질의 라고아 싼따(Lagoa Santa) 등지에서 발견되는데 이러한 유적들에서는 구석기의 유물에 비하여 발전된 형태의 돌도구들을 만나게 된다.6) (각주 6_ 일반적으로 한국을 포함한 고고학계에서는 도자기의 제작을 시작으로 신석기시대를 보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이 신석기시대는 빗살무늬 토기로 대표된다.))돌날, 끌개 등의 제작이 본격화되었으며 그 공정과정의 부스러기(Lascas)들이 좀더 일정한 모양을 갖추게 되는데 이것은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단순한 형태에서 좀더 구체적인 기능을 가지는 한 차원 높은 형태로 발전함에 따라서 그 제작도 당연히 어려워졌을 것이다. 전처럼 대강 두들겨서 반 우연적으로 만들어지던 것들이 이제는 정확한 타격위치, 강도, 각도 등의 계산을 통한 보다 숙련된 작업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이러한 반복 숙련된 작업은 결국 잘려져 나온 부스러기들이 일정한 형태를 가지게 되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알 수 있게 된다. 일반적으로 돌도구들은 사용되다가 그 용도와 상황에 따라 여러 장소에서 버려지기 때문에 그것이 어디에서 만들어져서 어디에서 사용되었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 반면 그 부스러기들은 제작되는 곳 근처의 일정한 장소에 무더기로 버려지기 때문에 그것들을 통하여 그곳에서 제작되어 사용되었던 도구들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특히 이 부스러기들을 통하여 돌도구들의 제작 숙련도를 알 수 있다. 실질적으로 돌도구를 원시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제작해보면 그 만들어진 도구를 보지 않고도 단지 그 부스러기들의 동일성 여부를 가지고서 제작자의 숙련도를 가늠할 수 있다. 즉 같은 모양을 가지는 부스러기들이 많이 보인다는 것은 제작자의 의도대로 돌도구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뒷받침해준다. 만일 제작자가 숙련되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그 제작물이나 부스러기 또한 천태만상일 것이다. 좋은 예로 들 수 있는 곳이 아메리카대륙 최고의 흑요석 광산인 멕시코 이달고주(州)의 쎄로 데 나바하(Cerro de Navaja)이다. 이곳에서는 메소아메리카의 전고전기에서부터 후고전기에 이르는 다양한 고대 광산과 그 작업장들이 나타나는데 작업자들의 숙련도와 전문성에 따라 일정한 형태로 엄청난 양의 부스러기들이 발견된다. 한 작업자가 유사한 모양을 가진 돌도구를 만들기 위하여 동일한 형태를 반복적으로 만들었고 이에 따른 숙련의 결과로 잘라내고 남은 부스러기들도 동일한 형태를 가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숙련된 돌도구 생산의 전문화와 함께 돌도구 이용 상에 있어서의 재미나는 변화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손잡이나 보조막대 등의 출현이다. 돌도구들에 손잡이나 창의 막대부분과 같은 다른 것과 묶을 수 있는 부분 등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도 이 시대가 보여주는 커다란 기술적 발전이라 말할 수 있다.
신석기시대의 또 다른 혁신 중에서 도자기의 출현을 빼놓을 수 없다. 아메리카 최초의 도자기는 기원전 4000년경 에콰도르(Ecuador)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7) (각주7_ 이때의 도자기가 일본과의 인적 교류를 통한 규슈 지방의 호몬 도자기의 영향이라는 학설이 있었으나 이미 설득력을 잃은 지 오래다.)그러나 도자기가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000년 이후의 일이라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도자기는 가히 인간이 만든 최초의 예술품이자 도구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도 생활의 도구로, 예술작품으로, 인간의 삶과 친숙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최초의 도자기는 누구에 의하여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하는 의문을 석기시대를 공부하면서 한번쯤 가져보게 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불 주변에 모여 동물을 구워먹거나 추위를 달래다가 우연히 불을 지피고 남은 자리에 있던 흙덩어리가 딱딱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쳤을 것이지만 그 중에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무엇인가 담을 수 있는 것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최초의 도자기들이 만들어졌을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뜨거운 불에, 흙을 구웠더니 딱딱해지더라는 현상의 관찰을 통해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시기에 여러 가지 종류의 도자기들이 출현하게 된다. 이렇게 도자기는 인간의 창의적인 관찰과 실험정신을 통해 지구촌 전체에서 인류의 가장 중요한 도구로서 발전하게 된다.
도자기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생활 도구들이 신석기시대를 거치면서 좀 더 발전된 기술을 바탕으로 세련되게 만들어진다. 그 중에서도 음식물을 조리하는데 쓰이는 갈돌과 갈판이 이때에 출현하기 시작한다. 또한 여러 가지 도구들이 다양하게 제작되었는데, 식물성 섬유로 만들어진 광주리, 밧줄, 그물 등을 들 수 있다.
농사와 더불어 일어나는 일련의 변화는 새로운 돌도구들의 출현과 기존 돌도구들의 기술 향상과 더불어 도자기, 갈돌, 갈판의 제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을 통해서 구석기시대에는 인간이 주어진 자연에 어떻게 잘 적응하며 생활할 수 있는가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며 살았다고 본다면, 신석기시대에는 자연적 환경을 극복하고 변화시키는 방법을 알고 시도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자연을 둘러싸고 있는 관계의 근본적인 변화, 혹은 발전이라는 말이 가능하다.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축적된 인류의 자연에 대한 인지가 신석기시대를 통해 자연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전환되는 것이다. 식물을 자연의 상태로 채집하여 섭취하는 것이 아니라 한 장소에서 재배함으로써 인간이 더욱 쉽고 많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농사의 시작이 그것이요, 자연의 도구를 다듬어서 인간이 사용하기에 좋은 형태로 만드는 것, 흙을 가지고 도자기를 만들어 물건이나 음식을 담거나 조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등이 자연극복의 초기단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며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우리는 이해를 돕기 위해 신석기시대라는 말로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신석기시대의 변화는 다양하다. 단순히 생활의 일부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근본적인 원리나 유형이 변화하는 것이다. 5000여 년에 이르는 긴 시간동안에 이루어진 신석기시대의 변화를 일반화시켜 말하기는 힘들지만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과 기타 다른 중요한 사항들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은 특성들을 가진다.
● 더욱 발전된 형태의 화살촉, 찌르개, 찍개의 이용이 활발해 진다.
● 돌날, 끌개 그리고 그 공정과정의 부스러기(Lascas)들이 좀더 일정한 모양을 갖추게 된다.
● 도구들의 이용을 더욱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손잡이나 다른 나무 막대기 등과 묶을 수 있는 부분이 생겨난다.
● 식물자원 이용이 증가하여 갈돌이나 갈판과 같이 식물성 자원을 가공하는 데에 쓰이는 도구의 제작이 증가한다.8) (각주8_ 식물들은 금방 썩기 때문에 당시에 이용하였던 식물자원들이 오늘날 증거로 남아 있기가 힘들다. 물론 알프스의 빙하에서 발견된 원시인들의 잘 보존된 미이라와 소유품들에서의 경우처럼 특수한 상황에 처하여 오늘날까지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경우도 있으며 남미 잉까의 경우 페루의 아레끼빠(Arequipa)에서는 후아니따(Juanita)라고 명명된 미이라가 만년설이 덮힌 산에서 발견됨으로써 당시의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마야의 경우는 높은 습도로 인하여 알프스와 같은 사례를 기대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식물자원의 이용이 많았다고 하는 주장은 갈돌이나 갈판과 같은 곡식을 가는 돌로 된 도구의 다량 발견에 따라 유추하여 짐작해 볼 수 있다.)
● 광주리, 밧줄, 그물 등의 식물성 섬유로 제작된 용기나 기타 도구들이 생겨난다.
● 동물의 가죽이 본격적으로 의복으로 이용된다.
● 해변에서는 수산물자원 특히 조개 등을 많이 채집, 이용한다.
신석기시대는 -물론 각 지방마다 차이가 있지만- 기원전 2000년을 전후하여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이전까지 농업의 발전, 도구의 개량, 기술의 향상 등 문명발전의 기본틀을 꾸준히 준비해오던 아메리카대륙 원주민들은 신석기시대를 마감하는 씨족 중심의 부락을 형성하게 되면서 종교, 정치, 사회적 틀을 갖춘 전고전기로의 전환점을 마련한다. 즉 초기단계의 도시국가를 이루어낸 것이다. 농업이나 도자기의 제작 등이 이때를 즈음하여 보다 높은 생산력과 기술력을 보임으로써 잉여 노동력을 창출하고 이것이 도시국가를 형성하고 문명을 꽃피우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기술의 발전과 지식의 증대로 인간의 활동이 식량생산에 필요한 노동에서 점차 해방되면서 소위 말하는 “사회”의 구성이 본격화된다. 전에는 하루 종일, 일 년 내내 일해야지만 겨우 본인과 가족의 생계를 꾸려갈 수 있었으나 기술의 발달은 점차적으로 적은 노동으로도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한다. 속된말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인간들은 드디어 다른 문화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고 이는 곧 초기국가의 형성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은 신석기시대의 마감이라는 표현에 대하여 의문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서구적인 시각으로는 고대 아메리카대륙이 유럽 침략 이전까지 신석기시대를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에스빠냐의 정복시기인 1500년대까지도 이들은 돌도구를 주 도구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적인 면에서는 다른 어떤 대륙의 청동기나 철기 시대를 능가하는 발전을 보인다. 따라서 엄밀한 언어적 의미에서는 유럽 정복기까지의 시기를 가리켜 신석기 -개량된 높은 수준의 돌도구를 사용한 시대- 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의가 있을 수 없지만 상대적인 문화의 수준을 고려하여 전고전기, 고전기, 후고전기라는 용어9)(각주9_ 아메리카 고대문명이 최초로 문화의 꽃을 피운 시기라는 뜻에서 고전기(Cl뇋ico)라는 말을 사용하며 그 이전 시기를 전고전기(Precl뇋ico), 그리고 그 이후를 후고전기(Poscl뇋ico)라고 칭한다.)를 새롭게 적용하는 것이 오해의 소지를 줄일 수 있겠다. 이미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석기, 청동기, 철기로 이어지는 문화 발전단계와 그에 상응하는 정치, 경제, 사회, 기술적인 발달 정도는 이곳 아메리카대륙의 고대문명을 말할 때에는 적용할 수 없다. 가장 큰 문제는 용어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용어의 사용에서 발생하는 오해의 가능성이다. 우리가 고전기를 신석기시대라 말한다면 -그 말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학습되어 온 문화 발전단계에 따라 원시공동체 사회를 연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전기의 마야는 다른 어떤 동서양 문명의 사회, 과학적인 측면의 발달에 뒤지지 않는 국가를 건설하였다. 그래서 아메리카대륙의 시대구분을 하는데 있어서는 이러한 새로운 용어의 적용이 필요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이 시기의 유적지로는 멕시코 치아빠스주의 오꼬소꼬아우뜰라(Ocozocoautla) 지역의 데 로스 글리포스(De los Glifos)동굴, 유까딴주의 롤뚠(Lolt쐍)동굴, 과테말라 또또니까빤(Totonicap뇆) 지역의 로스 따삐알레스(Los Tapiales), 삐에드라 꼬요떼(Piedra Coyote), 끼체(Quich? 지역의 사까뿔라스(Sacapulas), 차흐발(Chajbal), 산따 로사 추후윱(Santa Rosa Chujuyub), 과테말라시 남부의 산 라파엘(San Rafael), 벨리스의 란초 로우(Rancho Lowe), 온두라스의 라 에스뻬란사(La Esperanza)등을 들 수 있다.
제 9 장
전고전기
(기원전 2000년~기원후 300년 )
석기시대와 전고전기를 구분하는 가장 큰 요인은 무엇보다도 정주 문화의 본격화에 따르는 대단위 공동체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대단위 공동체란 부족연맹 형태를 말하는 것으로 공동의 노력으로 정치, 경제, 사회, 종교적인 활동을 수행하는 단위이다. 그러나 아메리카대륙의 부족공동체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형태의 부족국가와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공동체 단위의 성격에서, 역시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마야문명은 세계의 다른 문명과는 구분되는 독특한 특징들을 보여준다. 결국 이 말은 우리가 역사교과서에서 배운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부족국가와는 다른 형태와 구조, 그리고 원리를 가진 부족국가를 마야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부족국가라고 하면 부족국가 성립이전의 원시공동체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인 사회관계의 구심체로서의 혈연성이 배제되고 지리적인 환경과 경제 요인들에 기반을 둔 2차적 사회관계에 의해 확립된 공동체를 의미한다(모건 2000). 다시 말해 부족국가는 이제까지의 가족 중심적 혈연관계를 벗어나 같은 핏줄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끼리 같은 지역에 살고 있다는 점에서, 또는 경제적인 상호 보완관계를 동일한 공동체 속에서 같이 이루어간다는 공통점으로 하여 하나의 국가, 혹은 이와 유사한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혈연의 중요성이 감소함에 따라 가족 관계를 벗어나 정치 권력을 필연적으로 만들어 내고 이러한 권력의 형성은 자연스럽게 권력을 가진 자와 가지지 않은 자를 만들어 냄으로써 이것이 사회 계층분화의 토대를 마련한다. 따라서 이러한 부족국가 형태가 발전하여 보다 복잡한 국가 체제가 이루어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회의 계층분화는 더욱 분명해지고 다양해진다. 그러나 국가 체제 형성의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이 부족국가는 혈연적인 관계를 완전히 극복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불완전한 형태일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가리켜 부족국가라기보다는 성읍국가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원시 공동체 사회에서 국가로의 전환에 따르는 변화는 일반적으로 인류의 발전사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형태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모델이 마야의 사회 분화와 발전에서는 동서양의 과정과 똑같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까지 마야는 서방의 역사발전과 다른 형태로 발전되어 나갔다는 말을 하였고 서방의 부족국가가 어떠한 것인가를 보았다. 그렇다면 마야의 초기국가 형성의 차이점은 과연 무엇일까? 위에서 말한 서방의 초기국가 형태를 부족국가라고 부르건, 아니면 성읍국가라고 부르건 간에 마야의 경우는 서양과는 다른 방향으로 다른 발상을 통해 국가체제를 완성해 나갔다. 서양의 경우 부족국가는 완전한 국가체제를 형성하는 중간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마야의 경우에 있어서는 부족국가체제가 독특한 “가족민주주의(Familicracia)”의 바탕 하에 혈연을 구심점으로 하는 거대 연합국가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러한 다른 형태로의 발전의 출발점이 바로 이 전고전기에서부터 비롯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가족민주주의체제에 대하여는 앞으로 마야의 정치체제를 설명하는 장에서 더욱 자세하게 다루겠지만(제 13장 정치와 사회 참조), 이는 서양과 달리 거대 국가체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혈연적인 관계가 중앙 정치체제의 가장 중요한 운영의 구심점이자 의사결정 수단으로 작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부족국가의 형태가 단순히 본격적인 국가 형성의 과도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위 “국가”라고 말할 수 있는 단계에서도 부족국가적인 특징과 구성을 통해 새로운 국가 형태를 만든다는 것이 마야 국가발전의 중요한 특징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독특한 상이점을 지닌 마야의 공동체를 부족국가와 구분하기 위하여 이 책에서는 이것을 “부족공동체”로 부르고 있다. 마야사회의 개성적인 정치 운영의 발달과 그 역할을 이해하기 위하여 부족공동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그들 국가 발전 모델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용어로 적당할 것이다. 그리고 아메리카대륙의 국가 발전 모델과 정치, 사회 모델의 출발점이 국가 형태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바로 이 전고전기에 형성된다.
한편 마야지역에서는 부족공동체 체계의 시작과 함께 비록 초기 단계일지라도 문자들이 발명되고 이것을 가지고 역사에 대한 기록이 시작된다. 마야 사람들의 기록에 의하면 긴달력의 13.0.0.0.0, 짧은달력의 4아하우 8꿈후에 해당하는 날인 기원전 3114년 8월 13일에 이들의 역사가 열렸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10)(각주10_ 마야달력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제 21장 마야달력」 부분 참조.) 이것이 구체적인 역사사실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상징적인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정당화일지라도 어찌되었거나 극히 초기 단계이기는 하지만 전고전기에 들어서 문자가 점차적으로 발전하여 온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을 감안해 볼 때 전고전기를 마야문명의 역사시대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마야 역사시대의 규정과 그 시대에 대한 특색들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에 앞서 오해와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먼저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마야역사의 시대구분과 그에 따른 연대와 관련한 여러 시각의 차이점이다.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학술서적이나 교양서적을 가리지 않고 그 연대를 나누는 방법이 다양하다. 그 용어의 사용도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고전기(Cl뇋ico)를 중심으로 전고전기(Precl뇋ico)와 후고전기(Poscl뇋ico)를 구분하지만 전고전기를 형성기(Formativo)로 나누는 사람들도 상당수 된다. 사실 그것은 단순히 용어 적용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것을 형성기로 부르느냐 혹은 전고전기라고 부르느냐하는 용어상의 문제가 아니고 시대를 나누는 연대에 있다. 즉 각각의 연대가 다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도 한두 해 정도가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200~300년 이상의 차이를 보인다. 일반적으로 많이 인용되고 있는 시대구분을 보면 몰리는 전고전기를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후 317년으로 보고 있는 반면(Morley, 54쪽), 코우는 기원전 2000년에서부터 기원후 150년까지를 형성기로 잡고 있다(Coe, 12쪽). 또한 가르사는 같은 이름을 가진 시기를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후 200년으로 생각하는 한편(Garza, 1996, 13쪽), 고전기의 시작을 더욱 빨리보는 경향도 있어 샤러는 기원후 100년을 그 분수령으로 보고 있다(Sharer, 71~72쪽). 그렇다면 이렇게 각 학계나 개인의 의견이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를 먼저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예로 들어본다면 고려의 시작을 918년으로, 조선의 시작을 1392년으로 보는 데에 이견이 있기 힘들다. 한국의 역사 기록에는 비록 왕조 중심적인 역사시대구분이라는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하나의 국가 체제가 다른 국가체제로 바뀌는 분명한 사건이 있었고 이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다음의 두 가지 요소가 정확하게 시대구분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는 구 왕조의 멸망과 새로운 왕조의 건립이라는 시대를 구분할 만한 중대하고 분명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연대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에는 이 시기를 분명한 시대 구분의 정점으로 삼기에 충분한 타당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유럽도 왕조의 변화와 흥망성쇠가 중요한 시대변화의 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렇다면 마야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점에 있어서 마야의 이야기를 하자면 좀 골치가 아픈 것이 사실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들 중 어느 것 하나 명확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먼저 첫 번째 요소인 시대를 구분할 만한 중대하고 분명한 사건이 있느냐를 살펴보면 마야의 경우는 왕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의 존재부터가 논란이 될 뿐만 아니라 그런 왕조의 흥망성쇠가 전쟁이나 정권탈취의 방법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아무런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치적인 분권체제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마야사회는 그 구심점에 권력의 집중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이 말은 지방자치적인 작은 소국가들의 자체적인 큰 변화는 있을 수 있다 하여도 전체 마야사회에 영향을 미칠만한 사회의 변화가 인위적인 요인으로 나타나기 힘들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앞으로 마야의 정치경제를 이야기할 때 자세히 말하겠지만 고전기뿐만 아니라 그 이후 유럽인들이 정복해 오기 전까지 이들은 큰 영토 전쟁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영토는 개인, 혹은 집단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토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그들의 발상 밖의 일인 것이다. 각 도시국가들이 광활한 지역에서 최소한의 전쟁을 치렀던 당시를 상상해 보자. 각 도시국가들은 부족공동체를 중심으로 해서 그 정치·사회 체계가 이루어졌다. 결국 이러한 주위 환경은 특별하고 급진적인 정치·사회적 변화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갑작스럽게 큰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발전이 전고전기와 고전기의 사이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전고전기까지 문화발전을 꾸준히 준비해오던 마야사회는 고전기에 이르러 그 발전의 모습을 완성해간다. 그러나 발전이라고 하는 것이 하루아침에 일어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시기를 잡아서 여기까지는 발전의 준비단계인 전고전기요, 그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발전이 이루어진 고전기라고 말하기 힘들다. 더군다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마야는 지역적인 자치 성격이 강했던 사회였기 때문에 각 지역마다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또 다른 어려운 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일반적으로 도시의 종교 중심적인 건축물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기,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마야문자로 역사 기록을 시작한 시기(이 시기는 최초의 문자 사용시기와는 다르다)를 대략적으로 고전기의 시작으로 잡는다. 그래서 몰리(Morley)의 경우 고전기의 시작을 상징적으로 마야의 달력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날짜인 기원후 317년으로 잡는다. 이 날짜는 마야의 기록에 의하면 8.14.0.0.0이다(뻬뗀지역의 비석). 이 때를 기점으로 더욱 많은 수의 마야 기념물들이 마야달력의 날짜와 함께 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전고전기와 고전기의 구분을 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날은 마야역사에 최초로 기록된 연도라는 상징적인 날짜일 뿐 정치·사회적으로 충분히 의미 있는 기점을 만들지는 못한다. 결국 전고전기와 고전기는 같은 발전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명확한 구분을 하기가 힘들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기원후 3, 4세기를 지나면서 여러 가지 문화적인 측면이 강조되어 건축과 예술 활동이 구체적으로 그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주게 되고 앞에서 말한 317년이란 해에 가까운 기원후 300년을 - 일반이 이해하여 사용하기 쉽게 - 대략적으로 전고전기와 고전기를 가르는 시기로 이 책에서는 보기로 하겠다.
이러한 기본적인 개념을 전제로 두고 전고전기의 각 세부 시대별로 그 특색들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전고전기 초기(기원전 2000년 ~ 기원전 800년)
Precl뇋ico Inferior (Formativo Temprano)
전고전기 초기의 가장 중요한 변화라고 한다면 역시 농경문화의 안정적인 정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냥, 낚시, 채집 등의 이제까지 가장 중요한 식량조달 방법들도 병행되어 사용된다. 그러나 기원전 2000년경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농경이 중심이 된 경제 기반이 완성되어 이에 따른 사회 경제구조가 자리를 잡는다. 마야의 사회, 경제 구조의 근간에는 아메리카대륙 역사발전의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가족 중심적인 사회구성이 주를 이루며 서서히 그 뼈대를 갖추어 간다. 또한 이러한 구조들이 일정한 정치 체제로 발전한다. 즉 부족공동체가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단위가 되는 국가의 모습을 준비한다. 또한 각종 기술의 발전도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농업기술이 더욱 향상되고 건축에서도 대단위 건축물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축적된 지식을 전수하게 된다. 기술적인 면에서는 음식물의 보관과 요리를 위한 도기의 제작이 눈에 띄게 세련되어진다. 이때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대표적인 도자기로는 현재의 벨리스 북쪽과 유까딴반도 지역에서 발달한 스와데시 브라덴(Swadesh-Bladen) 도자기를 들 수 있는데, 이 도자기들은 이전의 것들에 비해 기교가 향상되는 한편, 장식기법 등이 등장하는 특징을 갖는다. 한편 미헤소께(Mije Xoque) 지역과 멕시코남부 태평양 연안에 걸쳐서는 바라(Barra)나 오꼬스(Oc뾱) 도자기가 많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아메리카대륙 최초의 대단위 문화유형의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는 올메까문화 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 이러한 변화들이 종교적인 면에서는 신성한 개념들이 만들어지는 형태로 발전한다. 풍요를 기원하는 등의 종교적 활동이 시작되고 내세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면서 죽은 이의 무덤에 부장품을 묻는 풍습 또한 생겨난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도시로는 현재까지 알려진 마야 최고(最古)의 도시로 꼽히는 라 빅또리아(La Victoria)가 있는데 과테말라의 태평양 연안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전고전기 중기(기원전 800년 ~ 기원전 300년)
Precl뇋ico Medio (Formativo Intermedio)
전고전기 초기의 특징을 농경 정착생활의 기반 확고로 든다면 전고전기 중기의 특징은 농업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의 증가와 기술적인 발전을 통한 농업생산력의 증대, 그리고 이에 따른 인구의 증가를 꼽을 수 있다. 이때의 농업생산물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는 옥수수 알의 크기가 종자개량을 통해 커진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식물을 식생활에 이용하고 사냥, 어로, 채집 등의 경제활동이 보다 전문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먹거리들이 많아지고 자연스럽게 인구가 증가하게 된다.
마야 사람들의 옥수수 종자개량
최초의 옥수수는 지금 우리가 일반적으로 대할 수 있는 그런 옥수수와 비교해 볼 때 먼저 그 크기 면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오늘날의 것이 작게는 3~4배, 크게는 10배가 넘게 크다. 옛날에 재배했던 옥수수가 얼마나 작은 것이었는지 대략 상상이 갈 것이다. 최초로 인간이 재배하였던 옥수수의 길이는 10여 센티미터에도 못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것이 종자개량의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종자개량이라고 한다면 거창한 과학적인 방법론을 통한 기술의 발전을 상상해 볼 수도 있겠지만 당시 아메리카대륙에 살았던 원주민들은 우연한 기회에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씨를 뿌릴 때 가지고 있는 씨앗 중에서도 좀 더 큰 것을 뿌리면 더 큰 옥수수가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다보니 수확량이 점점 많아지고 더 많은 양의 수확된 옥수수 중에서 씨앗을 고르게 되면서 평균 씨앗의 굵기가 커져갔다. 따라서 점차적으로 수확되는 옥수수의 크기가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향상되어 갔을 것을 예상해 볼 수 있다. 실질적으로 발굴현장에서 발견되는 흔적을 통해 볼 때 아메리카대륙에서 최초로 옥수수가 재배된 이래 수확되는 옥수수의 크기가 꾸준히 커져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종교와 정치가 분화되지 않은 신정일치의 정치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종교적인 활동은 더욱 활발해져 제례행사를 위한 대형 건축물들이 만들어진다. 마야 사람들이 농업 생산력의 증가로 서서히 먹고 사는 문제에서 벗어나 종교나 예술 등에 관심을 가지는 여유가 생기게 되고 다양한 관심을 구체화하기 위해 사람들을 동원하고 통제하는 일이 더욱 조직적으로 운영되면서 정치 단위와 기구가 체계화되어 나간다. 그리고 행정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전문화되어가면서 차츰 식량생산노동에 종사하지 않고 종교나 정치적인 활동에 전념하는 전문집단이 형성되게 된다. 또한 다른 일반사람들은 대단위 건축물들을 만들 수 있는 잉여 노동력으로도 활용되게 된다.
이 시대의 중요한 역사적 특징 중의 하나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올메까문화의 영향이다. 멕시코만 지역에서 꽃을 피운 올메까문화가 메소아메리카 전 지역에 걸쳐 영향을 준다. 전고전기 중기에 들어서면서 북미 전체 지역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그 정확한 경로가 명백히 밝혀지고 있지는 않지만 남미 지역에까지도 그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마야 지역도 예외 없이 당시의 문화적인 유행이었던 올메까적 특색들을 이때 받아들여 메소아메리카 달력의 사용, 문자사용의 시작, 재규어의 숭배 등에 있어서 공통적인 발전을 가져온다.
올메까문명이 마야문명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올메까문명을 말할 때에는 기원전 12세기에서 2세기경을 전후로 하여 멕시코의 동쪽 멕시코만을 중심으로 발달한 메소아메리카의 가장 오래된 문명을 일컫는다. 특히 천문학, 문자, 종교, 건축, 조형예술 등이 고도로 발달하여 그 이후 문명들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므로 올메까는 마야를 포함한 메소아메리카의 모태(母胎)문명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도시개념의 확립, 피라미드의 건설, 문자의 기원, 달력의 시작, 재규어 숭배, 두개골 변형 등은 메소아메리카의 중요한 문화적 요소로서 올메까문화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꼭 마야나 다른 문화의 발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전신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학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올메까라는 말은 넓은 의미에서 하나의 문화 형태를 가리키는 말로서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경우에는 올메까라고 하는 말을 하나의 국가나 민족이 아닌 마치 “르네상스”처럼 문화적 흐름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전까지만 해도 거대한 단일 국가형태를 가진 올메까가 존재하여 전체 메소아메리카 지역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이야기하였다. 심지어는 이러한 영향이 군사적인 정복의 결과였다고까지 말했다. 이는 올메까문화가 메소아메리카 지역 전반에 걸쳐 하나의 유형으로 많이 나타나는 것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시작되었다. 즉 올메까 특유의 문양이나 조각 등이 멕시코 고원이나 마야, 혹은 오아하까 등의 지역에 걸쳐 나타나는데 이것을 마치 올메까라는 나라의 중심지는 멕시코만에 있고 그 외곽지역은 그들에 의해서 복속된 국가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비롯되어, 멕시코만 지역의 올메까가 원형이고 나머지는 그들의 영향 하에 만들어진 올메까의 식민지 또는 아류(亞流)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마야 지역, 멕시코 고원지역, 혹은 오아하까 지역에 이르기까지 올메까문화는 서로가 같이 공유한 일반적 문화의 한 흐름이었다. 그러나 올메까문화가 나타나는 지역들이 정치적으로 주종의 관계, 혹은 식민지적인 성격을 가진 단일 국가는 아니었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로 볼 때 당시에 폭넓게 유행하였던 문화의 한 유형으로서 올메까라는 말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이 올메까문화가 멕시코만 지역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고 보면 그곳이 이 문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으며 제일 발전한 곳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11) (각주11_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한 문화가 가장 발전하였던 곳이 꼭 원형이라 말할 수 없다는 것과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항상 우열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른 많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확인하고 있다. 예를 들어 불교가 인도에서 시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중국과 한국 등 다른 지역에서 더욱 발전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영향관계가 인도의 중국이나 한국 정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우열의 관계 설명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올메까의 경우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그래서 이 올메까라는 말은 좁은 의미에서 보면 당시에 멕시코만 지역에 발전하였던 올메까문화를 강하게 가진 일부 부족공동체들을 일컫는 말로도 같이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올메까라는 개념을 넓은 측면에서는 당시의 전 메소아메리카 지역에 나타난 큰 문화·예술적 흐름으로, 좁은 측면에서는 멕시코만 지역의 올메까문화 형태를 지닌 부족공동체를 가리키는 말로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전고전기 말기(기원전 300년 ~ 기원후 300년)
Precl뇋ico Superior (Formativo Tardio)
전고전기 말에 접어들면서 마야 전 지역에 걸쳐 인구의 증가와 분산이 이루어진다. 그러면서 부족공동체 체계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으며 사회의 분화가 가속화된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각 기능의 분산이 구체화되어 그 지도자들의 중요성이 증대되면서 비석 등에 중요한 인물의 모습이 새겨지기도 한다. 또한 대규모의 종교중심지가 출현하고 제단, 비석 등 기념물들의 제작이 활발해진다. 앞에서 말한 바 있는 올메까문화의 영향이 정착되면서 당대의 유행이었던 올메까적인 요소가 마야식으로 재해석되어 특색 있는 공존이 이루어진다. 즉 마야적인 요소와 올메까적인 요소가 한 도시나 한 작품들 속에 공존하는 현상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대표적인 도시로 이사빠(Izapa)와 같은 곳을 꼽을 수 있다. 건축에서는 돌로 벽을 쌓는 방식이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좀 더 견고하고 큰 건축물들을 만들 수 있는 기술적인 발전이 이루어져서 이후 고전기에 꽃피우게 될 아름답고 웅장한 마야 피라미드 완성의 밑거름을 만든다. 그러나 이 시기가 마야 건축술의 완성단계는 아니다. 지붕은 계속해서 식물재료를 이용하는 등 초기의 형태들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양적인 면에서는 가히 도시라고 할 수 있을 만한 크고 작은 건축물들이 군락을 형성하는 변화가 전체 마야지역에 걸쳐 나타나게 된다.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는 고대인들의 무덤에도 변화가 찾아와서 전고전기 말기에 들어서면서 부장품 등이 점점 다양해지는 현상도 보인다.
이러한 사회 전반의 변화는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고 분업이 이루어짐에 따라 점차적으로 각 개인과 소규모 씨족의 역할이 그 단위의 특화에 따라 분화되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화가 서양의 경우처럼 사회 계급이나 계층의 분화로 나타났다고 말할 수는 없다. 특정한 개인, 혹은 집단이 정치나 행정을 담당하는 단위로 발전하고, 다른 개인 혹은 집단이 농사를 담당하는 단위로 발전할 경우, 정치를 담당한 단위가 사회적으로 더욱 많은 힘을 가지는 수직적인 사회관계의 형성이 마야의 경우는 수평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즉 정치인이나 농민이나 신분의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분은 동일하되 하는 일이 다른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마야사회는 부족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각 씨족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중요성이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보다 열등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또한 이는 구체적인 혈연관계로 이루어졌다는 각 씨족 집단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하여 계급의 분화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즉 친인척으로 구성된 사회 속에서 뚜렷한 계급이나 계층의 분화는 가능치 않았고 이런 씨족들의 연합체적 성격을 가진 부족공동체는 독립적인 중앙집권 국가권력의 발전을 가능하지 못하게 하는 주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정치·사회적인 분위기가 단순히 전고전기나 고전기를 통해 발전한 한 시대의 특징이 아니라 마야사회가 서방세계와 접촉하기 이전까지 계속적으로 그들의 중심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유지되었던 근본적인 정치의 원리라고 하는 점이다. 이 말은 결국 고대 마야인들의 정서와 민족성이 이러한 정치·사회적인 요소를 지향하였다는 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즉 마야인들의 생태적 정서가 만들어낸 독특한 정치, 사회적 분위기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야는 다른 서방세계와 비교하여 국가 형태의 시작, 과학 문명의 발달, 사회의 분화, 경제적인 체제 등 일련의 초기국가 성립의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지만 사회계층의 분화와 중앙집중적인 권력이 발달하지 못하였다는 중요한 부분은 다르다.
이러한 차이점은 여러 가지 제반 문화의 양상 면에서도 서방세계와의 상이점으로 진행된다. 특히 그 중에서도 헨리 모건(Henry Morgan)이 말하였던 서양식 부족국가 이론과 발전단계에 따른 국가를 형성하기 위한 지리적인 공동체의 발전이 이곳에서는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모건, 2000). 즉 지리적인 경계가 국가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국가라고 하는 단위가 한 장소에 있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마야의 부족공동체들 역시 특정한 한 장소를 매개체로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영토가 한 국가의 정체성 형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지 못하였다. 토지의 사유, 혹은 국경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이들은 토지를 통해 그들의 구심점을 찾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것들은 그들의 부족공동체를 상징하는 문장(紋章)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글리포 엠블레마(Glifo Emblema)라고 불리는 문장들을 이전까지는 지리적인 영토와 국경을 가진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國旗)나 이미지, 혹은 문자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장이 결국은 혈연관계를 가진 한 씨족이나 부족을 나타내는 문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까지 인류사 발전의 기본적인 형태로 생각하였던 서방세계의 국가 형성의 과정과는 다른 출발점을 가지는 마야의 전고전기 부족공동체는 다른 문화적인 화려함을 보여줄 고전기의 전성을 준비하며 새로운 양상을 띠는 변화의 시대를 맞이한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적지로는 멕시코의 이사빠(Itzapa), 찌빌짤뚠(Dzibilchalt쐍), 마니(Man?와 과테말라의 까미날후유(Kaminaljuy?, 띠깔(Tikal), 우악샥뚠(Uaxact쐍) 등을 들 수 있다.
제 10 장
고전기
(기원후 300년~기원후 900년 )
고전기를 가리켜 일반적으로 마야 최고의 융성기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오늘날 볼 수 있는 최대의 유적지들과 많은 수의 유물이 이 시기에 제작되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건축물이 나무와 같은 보존기한이 상대적으로 짧은 재료로 만들어진데 반해 마야의 도시중심은 대부분 돌을 이용하여 건축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유적들이 오늘날까지도 많이 남아 있으며 그 규모나 기술 등이 뛰어났던 것을 볼 수 있다. 마야인들의 높은 기술력은 심지어 외계인이 와서 건물들을 만들었다고 말할 정도로 경이를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건축물이나 기술력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앞에서 본 전고전기의 단계를 거치면서 서서히 발전되어 고전기에 이르러 꽃을 피운 것이다. 즉 외계인이나 외지인으로부터 급격한 기술의 이전이나 전파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수학, 건축학 등의 분야가 시행착오를 거치며 꾸준히 발전해 온 결실이라 할 수 있다.
마야 고전기의 찬란함이 그들의 건축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건축은 우리가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시각적인 감흥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건축과 더불어 천문학, 수학, 역사기록, 농업기술, 예술 등의 방면에서도 건축에 버금가는 찬란한 문화를 이 시기에 꽃피웠다. 이러한 융성은 마야 전 지역에 걸쳐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다. 대표적인 지역으로 온두라스의 꼬빤(Cop뇆), 과테말라의 띠깔(Tikal), 멕시코의 치첸이차(Chich럑 Itz?, 빨렝께(Palenque), 깔락물(Calakmul) 등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마야의 전 지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고전기의 문화가 융성해진 것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이 시대의 중요한 특징들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전기 초기(기원후 300년 ~ 기원후 600년)
Cl뇋ico Temprano
쪹 계단식 농경지, 인공수로의 건설 등으로 농업관련 기술이 증가한다.
쪹 인구증가로 도시내외에 촌락이 형성되는 등 계획적인 도시의 모습이 갖춰진다.
쪹 장·단거리교역이 발전한다.
쪹 건물전체가 돌로 만들어진다.
쪹 다양한 종류의 건물이 들어선다.
쪹 석조 기념물들이 다량으로 제작된다.
쪹 건물의 장식에 벽화가 즐겨 이용된다.
쪹 천문학, 수학, 달력, 문자 등이 발전한다.
쪹 신정일치의 정치형태 기반이 정립된다.
쪹 떼오띠우아깐문화의 영향이 마야를 포함한 전체 메소아메리카 지역에 미친다.
고전기 말기(기원후 600년 ~ 기원후 900년)
Cl뇋ico Tardio
쪹 넓은 지역에 자연조건을 최대로 이용한 농업생산력의 증대가 극에 이른다.
쪹 농업 생산성의 증대로 인한 잉여 노동력을 바탕으로 건축, 과학, 예술이 꽃피운다.
쪹 도시 건축의 최대 융성기를 맞이한다.
쪹 정치적으로 중앙집권적인 성격이 강화된다.
고전기 메소아메리카 중앙고원문화와 떼오띠우아깐
이 문화는 고전기 때 멕시코 고원지방에서 융성하였다. 그러나 그 원류를 살펴보면 기원 이전부터 현재의 멕시코 수도 주변에는 전고전기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 멕시코 수도 북쪽에서는 올메까문화 양식을 지닌 뜰라띨꼬(Tlatilco)가 수준높은 도자기를 대량 제작하였으며 남쪽으로는 꾸이꾸일꼬(Cuicuilco)가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마야지역이 아닌 멕시코 고원지방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한다- 이 두개의 문화는 이후에 발전하게 되는 떼오띠우아깐이나 뚤라(Tula), 그리고 메시까(우리가 아즈텍이라고 알고 있는 문화의 바른 이름)에 이르는 멕시코 중앙고원문화의 원류가 되는 것으로서 우주관과 기술, 과학 등이 이곳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뜰라띨꼬는 도자기 제작기술에서 뛰어난 발전을 보여 후세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꾸이꾸일꼬는 종교관과 연관된 여러 가지 우주관과 의식용 공예품들이 만들어져 이것들 역시 이후 시대와 중요한 상관관계를 가진다. 꾸이꾸일꼬는 여러 신들의 할아버지 격이며 기원신이라 할 수 있는 허리가 꼬부라진 우에우에떼오뜰(Huehueteotl, 늙은 신)을 전파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꾸이꾸일꼬는 근처에 있던 히뜰레(Xitle) 화산의 폭발로 도시의 상당부분이 용암으로 잠기는 자연재해로 인하여 멸망하게 된다.
이 꾸이꾸일꼬는 멕시코 수도의 뻬리술(Perisur)이라고 불리는 대단위 쇼핑단지 건너편에 있는데 서울 사람이라고 경복궁을 잘 알거나 자주 가본 것이 아닌 것처럼 멕시코 수도에 사는 사람들도 이곳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지금은 주변에 대단위 영화관과 쇼핑단지가 들어서 있어 점점 유적지의 모습이 보잘 것 없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이런 쇼핑몰의 건설과 함께 유적지 훼손에 관한 논란도 많았다.
일찍부터 발달한 현재의 멕시코 수도 주변의 이러한 부족공동체들이 하나의 구심점을 가지고 뭉치기 시작한 것은 기원 원년을 지나면서부터이다. 멕시코 수도에서 불과 40여 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떼오띠우아깐이라는 곳에 당시 전세계를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큰 도시가 생겨나게 된다. 물론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지만, 보통 5만에서 전성기 때에는 2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떼오띠우아깐문화를 이야기할 때 무엇보다도 먼저 대표적인 특징으로 알아두어야 할 것은 대규모 장거리교역을 통한 왕성한 국제교류이다. 북으로는 현재의 미국 남부지역, 남으로는 과테말라와 온두라스를 연결하는 중미지역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여러 도시들이 떼오띠우아깐과 밀접한 접촉이 있었다. 이곳의 도자기류, 특히 얇은 아나랑하도 도자기(Anaranjado delgado)는 흑요석과 함께 멕시코 중앙고원에서 생산되는 중요 산물로서 각 지역에 넓게 퍼져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관계는 한 방향으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다. 떼오띠우아깐 역시 각 지방의 문화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다양한 물품을 수입하여 사용하였다. 그것을 보여주는 예로 외국인거주구역을 꼽을 수 있다. 떼오띠우아깐에서 가장 규모가 큰 피라미드인 해의 피라미드 뒤편에 있는 주거지역에서는 여러 지방의 특색과 전통이 그대로 나타나는 도자기와 생활용구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는데, 각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살았거나 그들의 영향을 받은 물건들이 이곳에서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각 지방 사람들이 이곳에 살았건 아니면 단순히 이곳에서 지방의 물건을 생산했건 간에 다양한 지방의 특징들이 존중되었고 마찰 없이 공유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러한 상호영향이 일방적이거나 우열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다른 여러 가지 제반 정황들로 미루어 볼 때 이 거대한 도시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국제도시로서 당시 중미와 북미의 많은 지역을 연결하는 중재자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떼오띠우아깐이 흑요석, 도자기 등의 교역품을 독점하려는 목적으로 다른 지방도시를 정벌하고 거기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다고 하는 이전까지만 해도 공공연하게 거론되던 설명에는 분명히 무리가 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전형적인 예로 잘 사용되었던 도시가 바로 과테말라의 까미날후유 유적이다. 지금 현재의 과테말라 수도 외곽지대에 있는 까미날후유(Kaminaljuy?유적을 가리켜 -이곳은 떼오띠우아깐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많은 건물들이 떼오띠우아깐의 건축물들과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가져온 도자기 등도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떼오띠우아깐의 식민지라고 말하였으나 이는 당시의 국제적 영향관계와 떼오띠우아깐의 성격과 역할을 오해한데서 비롯된 잘못된 해석이다.
떼오띠우아깐은 치밀한 계획에 따라 설계되어 아주 잘 정돈된 도시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도시 중앙을 가로지르는 길은 정북을 향하고 있으며, 이 도로를 중심으로 여러 방향으로 이어진 도로망은 배수나 편의시설들을 잘 갖추고 있다. 이 도시의 전성기를 기원후 3~5세기 정도로 본다면 당시 구대륙의 어느 도시와 견주어도 그 규모나 수준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장의 사료도 남겨놓지 않은 이 도시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너무도 미약하다.
과연 이 도시의 사람들은 어떤 종족이었으며 무슨 언어를 사용했는지 우리는 다만 추측할 따름이다. 현재의 멕시코 중앙고원에는 다양한 민족이 그만큼 다양한 언어를 사용한다. 그 중에서도 오또미(Otomi)어나 나후아뜰(N뇀uatl)어가 떼오띠우아깐 사람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유력한 언어이다. 즉 그 당시 이곳 떼오띠우아깐에는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같이 살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오또미나 나우아족이 중심세력을 형성하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말이다. 오또미족은 지금 현재 멕시코 수도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역에 널리 살고 있는 민족인데 메시까문화의 중심을 이루었던 나우아족에 비하여 변방에 위치하며 많은 수난을 받게 되는 역사적 불운을 가진 민족이었다. 아직까지도 멕시코 수도에 집 없이 돌아다니는 원주민들의 많은 수가 바로 이 오또미족이다. 반면 나우아족은 메시까의 수도인 떼노츠띠뜰란(Tenochtitl뇆)을 건설하여 메시까문화를 꽃피우는 공식적인 역사의 주인공 역할을 담당하는 민족이 된다.
주민과 언어에 대한 의문 말고도 떼오띠우아깐 멸망의 원인 역시 아직까지 풀리지 않고 있다. 이 문화는 전체 메소아메리카 지역에 달하는 막강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기원후 650년을 전후해서 급격하게 쇠퇴하게 된다. 그리고 떼오띠우아깐 주변 국가들이 떼오띠우아깐의 쇠퇴이후에 중앙고원 문화의 맥을 이어간다. 소치깔꼬(Xochicalco), 촐룰라(Cholula), 뚤라(Tula), 까까스뜰라(Cacaxtla) 등을 들 수 있겠다. 물론 이러한 도시들이 떼오띠우아깐의 멸망을 계기로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떼오띠우아깐의 몰락으로 좀 더 구심력을 받게 되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중에서도 북쪽 유랑민족이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였던 뚤라는 종교 문화적인 측면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는 국가로 성장하게 된다. 아즈뜰란(Aztl뇆)에서 나와 유랑을 하던 메시까가 이곳 뚤라에 와서 본격적으로 현재의 멕시코 수도인 당시의 떼노츠띠뜰란(Tenochtitl뇆)정착의 꿈을 구체화시킨 것뿐만 아니라, 메시까의 대표적인 전설이라 할 수 있는 퀘잘꼬아뜰의 전설 역시 이 뚤라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제 11 장
후고전기
( 기원후 900년~기원후 1492년 )
고전기 이후에 오는 시기가 후고전기이다. 고전기와 후고전기를 나누는 요인은 고전기 마야의 급작스러운 의문의 몰락에서 찾을 수 있다. 융성했던 마야의 대단위 건축과 과학 활동 등이 빠른 속도로 쇠퇴함에 따라 마야지역 전체가 작은 촌락단위로 흩어지는 것이 고전기의 말기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나 역시 이 점에 있어서도 문제가 없지는 않다. 수없이 많은 도시들이 같은 날 같은 시기에 망한 것이 아니라 빠른 곳과 늦은 곳의 차이가 200여 년이 넘을 정도로 넓은 시대적인 분포를 보인다. 또한 쇠퇴의 정도도 급작스럽게 도시 전체에 사람들이 살지 않게 된 곳에서부터 점차적으로 사람들이 줄어간 곳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차이가 나타난다. 이는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마야라고 하는 문명이 우리가 생각하는 중앙집권적인 한 국가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하나의 국가라면 그 국가의 정치적 구심체가 붕괴하는 한 시기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십 개의 다른 언어와 방언을 사용할 정도로 각자의 특색과 정치적인 독립성이 뚜렷한 부족공동체들을 문화적인 측면에서 마야라는 특색으로 묶고 있었기 때문에 마야문명의 멸망시기가 같을 수 없다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고전기 문화가 특별한 건축, 과학 등의 가시적인 활동을 멈추고 휴식기로 들어가는 기원후 900년경을 편의상 고전기 마지막 시기로 구분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구분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하나의 왕조나 국가의 몰락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함을 밝혀둔다.
전고전기에서 고전기로의 전환이 특별하고 급진적인 사건 없이 이루어졌다는 말을 앞에서 이미 하였다. 그와 비교해 본다면 고전기가 막을 내리고 후고전기로 들어가는 과정은 고전기 마야부족공동체의 붕괴라는 중대한 사건을 계기로 하고 있다. 고전기가 붕괴된 후 정체시기를 거쳐 탄생한 후고전기 문화는 고전기의 문화적인 바탕 아래 새로운 문화를 꽃피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많은 지역이 유럽의 침략이 있기 얼마 전 또다시 의문의 몰락을 하게 된다. 그 후 에스빠냐의 침략자들이 이 지역에 들어왔을 때에는 이미 옛날의 찬란했던 도시의 모습은 거의 다 사라지고 지방에 흩어져 사는 군소 독립 부족공동체들의 모습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마야몰락 - 후고전기의 몰락 - 의 시기는 언제로 해야 하는가가 또다시 문제가 될 수 있다. 먼저 다양한 사건들이 일어난 시기를 고려해 볼 수 있다. 제일 빠른 연도는 마야 후고전기에 가장 융성했던 도시 중의 하나요, 마야라고 하는 이름의 기원을 제공하는 마야빤의 몰락 시기인 15세기 중반이다. 이 도시는 유럽인들이 침략하기 이전에 역시 정확히 알 수 없는 원인에 의해 발전을 중단하였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본다면 자체적으로 한 문화가 멸망한 이 마야빤 몰락의 기점을 후고전기 몰락의 시기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마야지역은 이 시기에 몰락한 것이 아니라 에스빠냐의 침입과 함께 몰락하였기 때문에 지역적인 면에서 이 시기를 마야의 몰락시기로 보는 데에는 분명히 실질적인 대표성이라는 점에서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꼴론의 아메리카대륙 도착시기인 1492년과 에스빠냐함대가 처음으로 마야지역에 들어와 전투를 벌인 1519년도 다른 가능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일부 학자들은 유까딴 지역의 마야인들을 정복하기 시작한 몬떼호의 활동 시작연도인 1527년을 마야의 마지막 시기로 잡고 있다. 마야는 아메리카대륙에서 최초로 에스빠냐 사람들과 접촉을 하기는 하였으나 통과지에 불과하였고 본격적으로 정복이 시작된 것은 프란시스꼬 몬떼호(Francisco Montejo)장군이 1526년, 그 지역의 총사령관직을 맡고난 이듬해인 1527년부터이다. 일단 어느 것 하나도 완전히 만족스러운 시점을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실질적인 면에서 마야문명이 유럽인들에 의해 정복됨으로써 고대 마야의 전통적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에 걸친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이러한 변화의 구체적인 시점은 역시 유럽인들에 의한 군사적 침략이었다. 그러나 마야의 수많은 부족공동체를 하나하나 정복해 가는 과정에서 한 곳을 평정해 놓고 나면 다른 곳이 다시 독립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등 시기적으로도 200여년이란 세월이 걸릴 정도로 정복의 양상은 단순한 한 왕조의 항복이나 멸망과 같은 명백한 시기를 제시하지 못한다. 시점은 비록 1527년이지만 실질적으로 군사적인 영향력이 완전히 마야지역을 지배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또한 몬떼호는 유까딴 지역만을 정복하였고 과테말라 지역의 마야 정복은 다른 장군들에 의하여 다른 시기에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마야의 몰락 시기를 어떠한 방식으로도 완벽히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전제로 제시해 놓고 꼴론12)(각주12_ 「제 29장 마야와 유럽의 만남」에 나오는 꼴론에 대한 설명 참조.)의 아메리카대륙 도착 시기인 1492년을 상징적으로 마야의 몰락 즉 후고전기의 종결 시점으로 놓겠다.
1492년은 끄리스또발 꼴론이 쿠바(Cuba) 앞바다의 과나하니(Guanahani)섬을 발견한 해이다. 그러나 마야뿐 아니라 다른 아메리카대륙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대륙을 침략하기 시작하여 그들의 문화를 정복한 시기는 그보다 훨씬 이후의 일이다. 메시까의 경우가 가장 빨라 1521년, 잉까의 경우 1524년에 중심세력이 군사적인 정복을 당했다. 그러니 꼴론이 과나하니(Guanahani)섬에 도착한 1492년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메리카대륙의 발견연도라고 알고 있는 때- 다른 아메리카대륙의 원주민 문명 몰락의 실질적인 연도와 30년 이상의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아메리카대륙의 고대문명이 유럽의 “신대륙 발견”이라는 사건을 통해 끝났다고 생각될 수 있는데 이는 엄격한 의미에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가장 구체적인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아메리카 문명의 군사적인 정복은 훨씬 이후의 일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군사적인 정복의 과정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행된 것은 사실이지만 마야의 예에서 보더라도 1697년까지 정복과 이에 따른 저항이 계속되었다.
후고전기 초기(기원후 900년 ~ 기원후 1000년)
Poscl뇋ico Temprano
일반적으로 마야의 몰락이라고 이야기하는 급격한 사회의 퇴조가 일어나는 시기이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외형적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활동이 급속히 저하된다. 새롭게 신전을 건축하거나 비석을 세우는 등의 건축 활동이 줄어들어 기원후 90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마야의 어떤 지역에서도 신전 건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토건공사가 중단된다. 이러한 현상은 건축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기타 문화적인 현상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실제로 건축의 침체는 중심적인 원인이 아니라 부수적인 결과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마야사회는 아직까지 우리들이 정확히 알지 못하는 어떠한 이유로 인하여 상당히 빠른 속도로 구심점을 잃어간다. 그 동안 쉴 사이 없이 들어서던 온갖 화려한 건축물이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고 천문관측도 중단된다. 수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여러 지역의 특산물들이 교환되던 고도로 발달한 장단거리 교역이 쇠퇴하였을 뿐만 아니라 달을 거르지 않고 치러지던 제례의식과 축제도 끊기거나, 오늘날 그 흔적을 찾기 힘들 정도로 소규모화 되어간다. 많은 주민들이 도시를 버리고 흩어지기 시작하면서 상당수의 도시는 불과 몇십 년 만에 적막함만이 감도는 유령의 도시로 변해갔다. 이러한 현상은 다른 고고학적인 증거들도 뒷받침해주고 있다. 대부분의 고전기 마야 도시들에서 만들어지던 유물들의 제작이 700~800년대를 거치면서 줄어들어 800년대 말과 900년대에 만들어진 도자기의 출토는 거의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구의 급격한 감소를 알리는 지표중의 하나인 쓰레기양의 급격한 감소와 건축물의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잡풀과 나무들이 그 위에 자라나기 시작하는 현상 또한 이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몰락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직까지는 정확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여러 가지 학설들이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가지고 속속 제기되었지만 어느 것 하나 속시원히 이러한 현상 전부를 설명하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가장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되고 있는 것이 그나마 지력쇠퇴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마야 사람들의 농사형태와 연관되어있다. 고전기를 통해 급격히 증가한 인구에 비해 그 인구를 부양할 만큼의 생산력이 지력의 쇠퇴로 인해 땅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마야 멸망의 원인이라는 설명이다. 당시 마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화전농법을 주로 사용하였다. 마야지역의 땅은 열대기후의 높은 온도와 강렬한 태양으로 인하여 지표가 빠르게 유기성분을 빼앗기다보니 점차 황폐해져 일반적인 농사에 적합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 특유의 화전농법이 일찍부터 발전하였는데 이것은 배수가 잘되는 땅을 골라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벌목과 벌초를 하고 그것을 건기가 끝나갈 무렵에 태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온통 하늘이 숲을 태우는 연기로 가득하게 되는데 이러한 광경은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런 후에 이 잿더미 사이에 일반적으로 꼬아(Coa)라고 불리는 막대기로 구멍을 내고 씨앗을 뿌린다. 그리고 비가 오기를 기다려 파종을 하는데, 보통 이렇게 토지를 이용하면 약 2년간은 생산성 있는 수확이 가능하나 그 이후에는 지력의 쇠퇴로 인하여 생산성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 가야만 한다. 휴경기는 유까딴 지역은 15~20년, 과테말라의 뻬뗀 지역은 4~7년을 요하게 된다. 실제로 이러한 농업의 특수성은 비행기를 타고 이 지역을 바라보면 극명하게 관찰되는데 조각의 땅들이 휴경기의 땅, 현재 농사를 짓는 땅 등으로 구분되어 각기 다른 색깔을 가진다. 지력쇠퇴설에서 주장하는 마야 멸망의 원인은 마야의 전통적인 농사 방법과 그들의 문명 발달에 따른 식량 수요의 증가와 맞물리게 된다. 점차 고전기의 정치와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도시의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더 많은 식량이 필요하게 되고 이를 위해서 농사를 짓던 땅들을 완전히 놀리지 못한 채 무리하게 농사를 지었고 그렇게 하다보니 어느 순간 지력이 완전히 쇠퇴하여 이 도시주변에서는 어떠한 농사도 지을 수 없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결국 농경의 실패로 인해 자연히 도시의 사람들이 떠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것이 바로 고전기 마야의 몰락이라고 말한다. 이상과 같은 지력쇠퇴설의 중심이 되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 가설이 가지는 한계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제일 먼저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 마야인들의 농업지식에 관한 과소평가이다. 공학이나 천문학, 수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발달시킨 당시의 마야인들이 이러한 지력 쇠퇴의 결과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였거나 혹은 알고 있었다면 이것에 대하여 그렇게 안일하게 대응했을 것이라는 점이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또한 최근에 이루어진 마야 농업에 관한 연구에서 밝혀지고 있는 바와 같이 마야의 도시 중앙에는 유실수들이 심어져서 일정한 수확을 할 수 있었다. 급한 경사면을 이용한 계단식 농법의 흔적도 안정된 수확을 가능케 하는 요소이다. 멕시코 고원지방에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수경재배를 통해 일년 열두 달 3~4모작까지 가능했던 고도의 농사기법인 치남빠스(Chinampas) 농법이 마야 지역에서도 행해지고 있었다는 흔적이 멕시코 따바스꼬주(州)와 낀따나루주(州)의 경계부근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이는 다른 지역에서도 이러한 농법이 많이 이용되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결국 농업의 기술적인 붕괴에 따른 생산력 저하로 마야의 도시들이 빠른 속도로 버려졌다는 주장은 재고되어야 할 여지를 남기고 있다. 고전기 마야가 농업의 조절 실패로 몰락을 가져왔다고 하는 점은 부수적이거나 결과적인 부분이지, 중심적인 이유라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지력쇠퇴설 이외에도 갑작스런 기후의 변화, 지진, 화산폭발, 전염병, 외부 세력의 침입, 중앙집권적인 사회체제 붕괴 등 다양한 추측이 가능하다.
한편 사회적인 관점에서의 몰락에 관한 설명은 결정적인 원인을 설명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붕괴의 전반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는 상당한 설득력을 제공하고 있다. 이들은 가족중심적인 정치체제(Familicracia)를 형성하였으며 이러한 씨족과 부족이 정치, 경제 운영의 중요한 부분을 관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공동 연맹체의 행정을 담당하는 상부 대표 기관들은 각 공동체의 이익을 증대시키는 역할을 대행한다는 기본적인 체제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고전기 대단위 마야의 도시들은 이러한 씨족과 부족들의 연맹체가 확대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고전기 마야가 차츰 발전해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중앙 연맹의 관할 하에 이루어지는 일들이 증가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새로운 신전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작은 씨족 단위로는 그것이 불가능하였고 중앙 연맹에서 각 씨족들이 협조하여 인력의 동원, 물자의 수급 등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고전기 마야가 대단위 토목, 건축, 출판, 과학, 종교 활동 등을 좀더 본격적으로 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중앙 정부의 역할이 증가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각 씨족의 필요에 의한 대행기관으로 시작하였던 중앙 정부가 고전기의 발달과 함께 하는 일이 많아지고 각 씨족의 위임 하에 일정부분은 중앙의 독자적인 결정에 의하여 사업이 추진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점차적으로 중앙연맹의 중요성이 증가하게 되고 그만큼 독자적인 권력이라는 것도 형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흐름이 대단위 사업의 필요성과 함께 역류하기 힘든 분위기로 마야 사회 전체를 이끌어나갔으리라는 것을 예상해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마야의 최대 전성기라 말할 수 있는 고전기 마야의 정점인 기원후 400~700년 정도의 흐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정치적인 운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전통은, 그리고 그들의 독특한 정서는 외형적인 변화만큼이나 빠르게 변화하지 못하였다. 문화적인 정서는 사실상 각 민족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성격으로 시간에 따라 그렇게 쉽게 바뀌질 않는다. 마야의 경우에도 유럽의 신대륙 정복 이후 500여 년간의 식민지화와 현대화 과정을 겪으면서도 사회, 정치적인 외형은 바뀌었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정서는 거의 바뀌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급속한 서구화를 통해 한국의 문화가 많이 바뀌고 있는데 과연 앞으로 우리의 정서까지도 서양적인 것으로 쉽게 바뀔 수 있을지 하는 의문이 든다. 인류의 다양한 역사 속에서 한 민족이 가진 정서는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며 이를 최대한 긍정적으로 이용하는 민족이 결국은 잘 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좌우간 마야의 경우에는 필요에 의하여 점차적으로 증대하기 시작한 중앙집중적인 권력이 어느 정도 독자적인 권력을 키워나가게 되고 이에 따른 폐단이 생기면서 마야 사람들의 기본적인 정서와의 갈등이 생겨났을 것을 예상해 볼 수 있다. 결국 권력의 바탕을 이루고 있던 각 씨족들이 중앙에 반대를 하게 되고 이것이 일부에서는 민중봉기의 형태로, 다른 곳에서는 사회 혼란과 분쟁으로 번지고 이러한 여파가 당시 활발한 경제, 문화적인 교류가 있었던 마야 전 지역에 급속도로 확산되었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현상이 단순히 마야지역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주변의 전 메소아메리카 지역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는데 이는 멕시코 고원지방의 떼오띠우아깐이 불에 탄 흔적 등을 통해 사회적인 문제가 많은 지역에 공히 나타났던 것임을 예상해 볼 수 있다. 결국 사회는 다시금 이전의 소단위 중심적인 부족공동체의 형태로 돌아가게 된다. 이는 사실상 몰락이라고 보기보다는 체제의 변화라고 하는 편이 더욱 옳을 것이다. 종교적 기념물, 대단위 신전, 이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 등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는 각종 화려한 유물들은 고전기 시대 중앙 집권적인 힘이 강하였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전문화된 집단에 의해 제작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고대 사회의 발전이라는 것은 외형적이고 시각적인 유물을 통해서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다. 부족공동체가 비록 전문화된 작업이나 대단위 사업은 안 하더라도 지방분권적인 체제로 충분히 내부적인 발전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반적인 발전 개념의 틀 안에서는 고전기 몰락 이후 침체기가 있었고 발전이 중지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외형적인 발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건축 등의 활동이 사회적인 변화와 함께 중단된 것이고, 이를 우리는 고전기의 몰락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좀더 심층적인 면에서 바라볼 때 행복이나 삶의 질을 말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시각이 항상 바른 것일 수는 없다. 오히려 고전기 이후의 마야는 중앙집권적인 대단위 사업들이 없어지면서 좀더 소규모의 정치단위를 유지하게 된다. 상대적으로 각 구성원들의 개별적인 삶의 질 면에서는 고전기보다도 더욱 높았을 것 역시 예상해 볼 수 있다.
정리해보면 마야사회의 지방분권적인 체제가 고전기를 맞이하여 중앙집권적인 대단위사업을 중심으로한 체제로 변환되었다가 고전기의 말기에 이르러 다시금, 새로운 지방분권적인 사회 정치 체제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결국 사회적인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는 고전기 마야의 몰락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것이다.
사회적인 측면으로 마야 고전기의 몰락을 설명하는 것은 그 배경적인 부분에서는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 마야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해지면서 이러한 부분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어 사회붕괴이론을 뒷받침하거나 부정할 수 있는 증거들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고전기의 몰락이 마야사회 전반에 걸쳐 이루어지는 시기, 거꾸로 말하면 마야 고전기의 모순을 극복하고 부족공동체가 마야사회 전체에 다시금 완성되는 시기가 후고전기의 초기에 해당한다. 이후 중기와 말기를 통해 다시금 새로운 중앙집권적인 융성을 보이는 곳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이 역시 후고전기 말기에 들어서면서 몰락을 하고 에스빠냐 사람들의 침략이 있었던 당시 마야는 다시금 부족공동체의 분위기가 우세하였던 시기가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중앙집권과 부족공동체적인 관계가 어떠한 명확한 한계를 가지고 대립하거나 경쟁하였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떠한 시기에도 어떤 하나가 완전히 다른 하나의 체제를 잠식한 시기는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도 없었다. 또한 지역에 따라서도 그 정도의 차이가 심한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어 정복당시 유까딴 지역은 지방분권적인 분위기가 과테말라 고원지방에 비해서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가 완전히 지배적인 분위기를 이끌 수는 없었다. 또한 지방분권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연맹체 장(長)의 역할이 두드러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끼체(Quich?와 같이 중앙집중적인 형태가 지배적으로 보이는 경우에도 각 부족공동체 장이나 씨족장에 대한 존중은 기본적인 것이었다. 각 씨족, 혹은 부족회의는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의 원천이 되는 등 양자의 병립이 내부적인 미세한 요소들의 작용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었다.
후고전기 중기(기원후 1000년 ~ 기원후 1250년)
Poscl뇋ico Intermedio
고전기 말기에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중앙집중적인 대단위 정치의 붕괴는 후고전기 초기의 잠재적인 침묵을 깨고 기원후 1000년을 넘어서면서 서서히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까지 작은 부족공동체들로만 남아있던 마을들이 하나둘씩 모여서 새로운 종교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여 대단위 건축물들이 만들어지거나 출판사업이 본격화되는 등 다양한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특히 이 시대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메소아메리카 중앙고원지방 - 당시는 메시까가 이 지역을 주도하였다 - 등과의 밀접한 연관성이다. 물론 전고전기나 고전기에도 메소아메리카의 전 지역이 많은 교류를 가졌었다. 전고전기에는 올메까라는 문화양상이 전 아메리카대륙에 걸쳐 큰 유행으로 퍼졌었고 고전기에는 멕시코 고원에 자리잡았던 떼오띠우아깐문화(78쪽 참조)가 전체의 흐름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하여도 영향관계라고 하는 것이 후고전기만큼 직접적이고 선명하게 나타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후고전기에는 좀더 구체적인 면들이, 예를 들어 건축에 사용되는 기둥양식, 착몰(Chac Mol) 등이 고원지방의 것들과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영향 관계가 고원지방으로부터 침입해온 똘떼까족들이 마야를 정복하여 식민지를 건설한 것이라는 주장이 1990년대 이전 학계의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부 책자에서 거론되고 있는 낡은 주장들로 학문적인 가치를 잃은 지 오래다(279쪽 참조). 다만 이시기에 보다 광범위한 상호 영향관계가 있었던 것은 최소한 외형적인 면에서 볼 때 분명하게 나타난다.
전설에 의하면 기원후 987년에 멕시코 고원지방에 있는 뚤라라는 도시에서 추방당한 퀘잘꼬아뜰(Quetzalc뾞tl: 나후아뜰어로 깃털 달린 뱀)이라는 이름을 가진 신이 마야의 유까딴 지역으로 들어와 마야어로 꾸꿀깐(Kukulc뇆: 유까딴 마야어로 깃털 달린 뱀)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마야 사람들의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신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13) (각주13_ 특히 이러한 점은 똘떼까 계통의 삐삘족의 문화에서 두드러진다. )그런데 이러한 영향관계는 단순히 종교적인 면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면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양지역간 활발한 물자의 교역이 있었다. 장거리 교역품은 공예품, 소금, 꿀, 꼬빨, 면, 카카오 등 다양했다. 후고전기 중기의 대표적인 도시로는 유까딴 지역의 치첸이차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도시는 후고전기의 중기를 즈음하여 최대의 발전을 보였다. 그러나 기원후 1250년경 후고전기 중기의 마감과 함께 쇠퇴하게 되었다.
후고전기 말기(기원후 1250년 ~ 기원후 1492년)
Poscl뇋ico Tardio
마야 후고전기 말기의 대표적인 도시로는 마야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도시는 다른 마야의 도시에 비하여 규모가 작지만 역사적으로는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제일 먼저 이 도시의 이름에서 마야라고 하는 이 문화를 대표하는 이름이 나왔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다른 면에서는 이 도시에서 발달한 주변을 둘러싼 담장 형식이 독특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14) (각주14_ 「제 17장 전쟁」 중 <전쟁용 성의 존재에 관한 논란>부분 참조)
이 시기에 들어 유까딴 동부해안을 중심으로 발달한 해상교통의 중심지를 발판으로 중미나 남미에까지 이르는 해상 교역이 활발해진다. 그러나 15세기 중반에 이르러 마야빤 역시 의문의 붕괴를 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후고전기에 번성하였던 도시들을 등지고 다시 밀림 속으로 흩어져 갔다. 마치 유럽인들의 침입에 의한 종말을 예견하듯이 마야 후고전기의 활발한 중앙집권적인 문화와 정치·경제는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사라져 간다. 따라서 유럽인들이 이곳을 침입했을 때는 이미 중앙집중적인 정치단위로 모여 있지 않았으며 각자 부족, 혹은 씨족공동체 단위로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공동체들이 모여 하나의 단위를 형성하기도 하였지만 이들은 단순하고 간단한 정치·경제 혹은 종교적인 활동들만을 하였다. 그러나 하나의 정치적인 집중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는 점은 이후 유럽인들의 마야정복에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하나의 나라와 싸워서 이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십 수백 개의 독립적인 공동체들이 유럽인들이 적응하기엔 힘든 열대정글이라는 환경 속에서 독자적으로 생활하고 있었으며 이들 각자를 하나하나 정복해야만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마야의 마지막 공동체를 완전히 정벌한 시기가 정벌을 시작한 후로 200여 년 이후라는 점을 통하여 당시의 이러한 정치, 사회적인 특징들이 만들어내었던 어려움을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